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04
308화. 무질서(6)
* * *
지구 폐쇄 개시 8일 차, 남양주의 성역.
‘의사당’의 허름한 테이블에 상체를 기댄 채 생각에 빠져 있던 중성은 시계 알람을 듣고서 몸을 움찔했다.
삐빅, 삐빅, 삐빅.
현재 시각, 오후 8시 정각.
판자벽 너머에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제법 요란하게 들려왔고,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거나 괜히 바닥을 차는 등의 기척도 쉬지 않고 느껴졌다.
흥분, 초조함 따위의 기운이 감지된다.
“…….”
중성은 바짝 마른 혀로 입술을 핥은 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다음엔 조심스럽게 의사당 출입문을 열어 젖혔다.
끼이익.
그러자 의사당 앞마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중성을 쳐다봤다.
뚝.
일시에 완전히 멎어버린 웅성거림.
중성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백 명이 한참 넘는 군중과 이들 사이에 포박된 채로 우두커니 서 있는 어느 사내였다.
어디서 얼마나 두드려 맞았는지 양쪽 눈두덩이가 부울 대로 부어서 동공이 제대로 보이지가 않을 정도.
입고 있던 옷도 사정없이 찢겨서 마치 걸레짝을 대충 걸친 것 같은 차림이었다.
아마도 피해자의 유족 내지는 친구, 동료들이 구타한 흔적일 것이다.
어쩌면 상당히 오래 전부터 강력 범죄에 대한 처벌 수위 상향을 제청하던 의사들도 구타에 참여했을지 모른다.
“준비 됐습니까?”
중성의 물음에 사내를 좌우에서 꽉 붙들고 있던 조선희의 남편 강성호와 광수대 출신 형사 이성태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갑시다.”
두 호송인의 신호를 받은 중성은 곧장 의사당에서 약 백여 미터 떨어진 성역 중심부로 발을 옮겼다.
그러자 얼굴이 피떡이 된 사내와 두 호송인을 비롯한 장내의 군중도 중성을 따라 우르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슷, 서석, 츠즉,
따박, 따닥.
신발 밑창과 체중에 따라 제각기 다른 발소리.
선두에서 이들을 이끌던 중성은 왜인지 저 소리가 무섭게 느껴졌다.
어떤 식으로든 사람이 많이 모이면 무서운 소리를 내는 법인 걸까.
아니면 단순히 날이 어둑해서일까.
‘김채수.’
중성은 저만치 보이는 성역 중심부의 누런 조명을 바라보면서 뒤따라 끌려오는 사내의 이름을 소리 없이 읊조렸다.
김채수. 39세, 남성, 성역 북부에 마련된 농업 지구에서 일하던 근로자.
성역의 주민이 200명을 넘어버린 지금, 아무리 중성이라고 해도 모든 사람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김채수가 누구인지 정도는 잘 알았다.
매일 식사 시간마다 배식소에서 벌어지는 팔씨름 대회 때문이었다.
사실 말이 대회지 상품 하나 걸려 있지 않은 친목 경기였는데, 워낙 즐길 거리가 없는 곳이다 보니 성역의 건장한 남성 전원이 참가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김채수는 이 대회의 모든 회차에서 무패를 기록한 일종의 동네 스타였다.
다시 말해서 힘으로 치면 김채수를 꽉 붙든 채 호송 중인 성호와 성태보다 한 수 위라는 거다.
그래서인지 김채수가 완전히 제압된 상태임에도 그의 주변에선 긴장된 분위기가 짙게 흘렀다.
“이쪽입니다.”
중성과 용의자 호송인들이 성역 중심부에 가까이 이르자 그곳에서 미리 대기 중이던 또 다른 그룹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다름 아닌 전직 거창 지청 검사이자 성역에서도 같은 역할을 맡게 된 김동호와 그의 보조인들이었다.
박정우가 이곳을 완전히 떠나고 난 뒤 성역의 구성원이 백 명 가까이 늘었고, 이에 따라 안정적인 인원 통제를 위해 일종의 공권력을 도입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김동호가 수장으로 있는 ‘검사부’였다.
부서의 규모상 감히 검찰이란 이름을 붙이지 못했을 뿐, 하는 일은 이전 세계의 검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입법부에 해당하는 투표권자 그룹인 ‘의회’가 있고 형사 출신 인물인 이성태를 필두로 하는 집행부가 자리를 잡았으니 유사하게나마 삼권 분립이 갖추어진 셈이다.
척.
중성이 먼저 성역 중심부의 강단에 올라서자 그 뒤를 이어 집행부의 호송인 두 사람이 김채수를 데리고 올라갔다.
평소 조례나 투표, 긴급회의 등이 진행되는 강단 위엔 오늘 이례적으로 대리자 조선웅이 출석해 있었다.
혹시 모를 과격한 무력 사태를 방지하기 위함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오늘 이 자리에서 성역 최초의 사형 집행이 치러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판결문을 읽겠습니다.”
중성은 품에 들어 있던 종이를 신중하게 꺼내든 뒤, 어제 새벽에 김채수에 대한 사형을 구형했던 검사부장 김동호와 잠시 눈을 맞췄다.
그러곤 오늘 점심녘부터 의회 구성원들과 긴 논의 끝에 결정내린 사안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판결은 기성 방식대로 주문과 이유를 차례로 읊되, 성역 구성원의 과반이 참관한 가운데 내려져야 했다.
따라서 현재 이곳엔 외곽 근무자를 제외한 140여 명의 주민이 모여 있는 상태였다.
“사건 번호, 004가001 살인. 피고인 김채수, 1번 농업 지구 근로자…….”
중성이 판결문을 읽기 시작하자 장내 분위기가 경직됐지만 다들 이 판결의 결론이 무엇일지는 잘 알고 있었다.
김채수는 현행범이었으니까.
그것도 십여 명이 입원 중이던 병동 천막에서 간호사를 때려 죽였다.
정확히는 김채수가 일방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도중에 간호사가 기물에 머리를 부딪쳐 뇌출혈로 사망한 사건.
당시 김채수의 아내가 출산 임박으로 병동에 입원해 있었는데, 인력 부족으로 남자 간호사가 출산 징후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죽은 이는 말이 없으니 피해자 주장은 들을 방법이 없었고, 김채수는 상대가 아내의 신체를 필요 이상으로 점검하며 추행했다는 주장을 펼쳤으나 검사부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대가 명백히 자신을 추행한 것으로 여겼다는 김채수의 아내가 한 주장 또한 마찬가지. 가해자와의 특수 관계를 참작한 결과였다.
다만 문제는 고의성이었다.
김채수가 정말 피해자를 죽일 마음으로 폭행을 했냐는 거다.
이 부분에 대해선 목격자들의 진술이 크게 엇갈렸으나 이런 강력 범죄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의료진들의 은근한 로비, 그리고 김채수가 몸에 지니고 있던 커다란 문신 따위가 여론을 아주 쉽게 편중시켰다.
본래 폭력적인 성향이 있던 인물, 즉 잠재적인 범죄자가 기폭제를 마주쳐 폭발한 것뿐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여러 사정으로 인해 의회로 전달된 공소 자료는 상당히 편협했는데, 암묵적으로 최종 결정권을 가진 중성에겐 우발적 살해라거나 암묵적 범죄자 같은 불확실한 요소는 애초에 참고 대상이 아니었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이건 선례를 만들게 될 첫 사례다. 그리고 병동에서 의료진이 죽었어.’
이 두 가지였다.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살리는 공간에서 폭력 행위가 일어나선 안 돼. 엄벌을 해서 본을 삼아야 하는 일이다.’
물론 이번 판결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견고하던 의료진의 기득권이 더욱 강화될 게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여태 그만한 가치를 해왔고, 앞으로도 대체가 불가능한 집단이다.
그리고 법조적 양심으로 봐도 결과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자를 다른 방식으로 처리할 순 없었다.
범죄자를 장기 격리할 정도로 공간 여유가 있는 환경이 아니니까.
대지를 그런 곳에 쓸 바엔 감자라도 하나 더 심는 게 의미 있을 것이다.
따라서.
“주문, 피고인을 사형에 처한다.”
중성은 판결문에 적힌 그대로 39세의 인간 남성 김채수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140여 명의 참관인들 사이에서 날카로운 비명 하나가 쏘아져 올라왔다.
“아아아악……!”
바로 김채수의 아내였다.
게다가 현행법상 사형 집행은 선고 시점으로부터 20분 이내가 원칙.
판결 낭독에 참관한 주민들이 가급적 형 집행을 직접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고, 실제로 선고가 내려지자마자 집행부 소속의 사내들이 김채수를 단상에서 끌어내렸다.
그러곤.
“이쪽으로.”
한때 외부자들을 처형했던, 땅이 울퉁불퉁한 지점으로 그를 밀치며 데려갔다.
“……정말 이런 식으로 진행하는 겁니까? 너무 러프한데요.”
전직 백동일보 선임기자이자 현재 성역의 서기를 맡고 있는 강명일이 막 단상에서 내려가기 시작한 중성의 뒤를 쫓으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이에 중성은 건조한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제대로 된 청사 하나 짓지 못하는 우리가, 같은 주민을 죽이는 일을 어떻게 말끔히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법이든 규칙으로든 누군가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건, 살인사건을 한 번 더 벌이는 것과 사실 다를 게 없죠. 그러니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겁니다.”
이러는 와중에도 처형 장면을 보기 위해 우르르 움직이고 있는 참관인 무리 속에선 아까 그 찌르는 듯한 비명이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이에 피해자의 유족과 의료진 일부가 집행부 직원들을 향해 여자 좀 조용히 시키란 신호를 보냈으나 집행부장인 이성태가 그것까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금일 배정된 기록인들은 처형장 측면으로 서십시오.”
중성이 딱딱하게 굳은 혀로 지시를 내렸고, 이를 받든 세 사람이 울퉁불퉁한 대지를 밟아가며 처형장 오른편에 일정 간격을 두고 나란히 섰다.
그러자 곧 집행부 직원들이 의자와 간이 책상을 가져다 줬다.
이것이 무엇이냐면, 새로 도입된 ‘기록법(法)’이었다.
그 대상이 누가 됐든, 성역의 공동체 안에서 사형을 집행할 때는 반드시 세 가지 방식으로 증거를 남기기로 한 것이다.
첫째는 사진.
둘째는 글자로 된 기록.
셋째는 그림이었다.
사진의 경우 표면적으로 보이는 사실 그대로를 담아내며, 글자로 된 기록은 사진이 미처 담지 못한 세부 사정을 품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림은…….
스슷, 스슷, 스스슷.
중성과 명일은 말없이 지켜봤다.
성역의 주민 이백여 명 중에 그림 실력이 가장 뛰어난 자가 눈앞의 장면을 빠르게 옮겨 담는 걸 말이다.
많은 역사가 담긴 고르지 못한 땅, 밧줄로 몸이 포박된 채 무릎을 꿇고 엎드린 어느 사내, 그 뒤에서 총을 든 채로 대기 중인 세 사람.
현장을 병풍처럼 거뭇하게 두른 것들 역시 마찬가지로 사람이었다.
풍경의 대부분이, 사람이다.
마침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라 남녀 가리지 않고 모두의 머리칼이 허공에 흩날렸는데, 이 사이로 또 여지없이 예비 망자의 아내가 땅에 몸을 쑤셔 박듯이 처절한 괴성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이 모든 장면은.
스슷, 스스슷. 슷…….
연필을 쥔 채 불규칙하게 흔들리는 손을 통해 오묘하게 그려졌다.
사실과 같기도, 또 한편으론 보이는 것과 전혀 다르기도 한 것 같은 기묘한 그림.
“아아아아……!”
살인자의 죽음을 미리 애도하는 소리가 쏘아져 나올 때마다 화가의 손목이 비틀린다.
시잇.
덕분에 총을 든 사형집행인들의 외곽선이 크게 엇나갔으나 화가는 이를 바로잡지 않았다.
뒤에서 이를 쭉 지켜보던 중성과 명일도 아무런 지적을 하지 않았고 말이다.
그렇게 연필을 쥔 사람은 다소 엉망진창인 그림을 가까스로 완성했고, 그가 종이에서 손을 떼어내기 무섭게 중성이 허공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이를 확인한 대리자 조선웅이 울퉁불퉁한 대지 쪽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이어서 세 개의 총구가 몸을 움츠린 사내를 향해 서서히 들어 올려졌다.
그러곤.
삐익.
누군가 낮게 분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세 정의 총이 일제히 격발됐다.
그리고 이 장면까지가 모두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