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06
310화. 저울(2)
* * *
「박정우가 시카고에 성역을 세웠다. 그리고 그가 수천의 시카고 주민을 99명까지 줄이려 한다.」
이 정신 나간 상황에 충격을 받은 건 비단 시카고의 주민뿐만이 아니었다.
“……허.”
“저게 지금 실시간인 거죠?”
“저 사람이…… 박정우인가요?”
“생각보다도 훨씬 어려 보이는데.”
남양주에 세워진 성역의 주민 총원은 237명.
이 중에서 무려 120여 명은 박정우가 한반도를 떠난 뒤에 합류한 자들이었다.
즉, 지금 남양주 상공에 나타난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 중 태반은 박정우를 난생처음 보는 것이란 의미다.
이들이 박정우에 대해 아는 것은 ‘역사서’에 적힌 피상적인 정보뿐이었다.
이름 석 자, 나이, 대략적인 키와 몸무게, 그리고 이 남자가 성역을 만들기 위해 어마어마한 일들을 저질렀다는 사실 정도.
물론 성역의 수석 서기인 강명일의 기록을 토대로 편찬한 ‘역사서’의 중반부엔 박정우의 행보가 상세히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었다.
하기야 박정우를 직접 겪어 본 ‘구세대’조차 그가 정확히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하지 않는가.
어쨌든 남양주의 ‘신세대’들에게 박정우는 일종의 신화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한반도의 건국 신화인 단군 이야기처럼 말이다.
분명 어떤 방식으로든 실존은 했겠지만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으니 전해지는 것처럼 정말 그랬는지는 알 수 없는, 어쩌면 허구와 과장이 다소 섞였을지도 모르는, 그런 것.
그런데 그런 것이 갑자기 눈앞에, 성역의 허공에 나타난 거다.
심지어 시카고에 또 다른 성역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
한동안 떠들썩하던 남양주가 다시금 조용해지기 시작하자 스크린 너머의 시카고 전경을 뜯어보던 중성이 입을 열었다.
“그쪽에 남길 인원이 99명이라 하심은…… 방주 좌석 때문이신 거지요?”
이에 곧바로 스크린 안에서부터 박정우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렇습니다. 이 도시에 남은 좌석을 다 할애하는 셈이죠. 현 상황에선 최선이지 않습니까?
“……으음.”
정우의 말에 중성은 입을 꾹 다문 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쯤 남양주 성역의 저편 그늘에서부터 시퍼런 실루엣이 튀어나왔다.
파아아앗!
다름 아닌 대리인 조선웅이었다.
“정우 씨……!”
그가 구원자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자 중성을 비추고 있던 ‘캠’이 잽싸게 눈을 돌려 선웅을 바라봤다.
-아, 조선웅.
누군지 알아보겠다는 듯한 정우의 응답.
그런데 이 짤막한 대사 하나에 ‘구세대’들의 표정이 일제히 어두워졌다.
“……?”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어조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박정우가 조선웅이란 이름을 발음할 적에는 말이다.
당사자인 선웅도 소름이 돋을 정도의 위화감을 느꼈기에 스크린 가까이로 달려가다 말고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정우 씨, 괜찮으십니까?”
-예.
“…….”
선웅은 상대의 답을 듣고도 미심쩍다는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러자 중성이 다른 질문으로 화제를 돌렸다.
“저…… 혹시 민구 씨와 냄새 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아십니까?”
-아직 살아 있다면 러시아에 있을 겁니다.
“아아…….”
중성은 방금 대답을 통해 최소 세 가지를 파악했다.
첫 번째, 현재 박정우의 곁엔 아무도 없다.
한반도에 체류할 때도 보통 인간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의 고삐조차 잡아 줄 존재가 없다는 거다.
두 번째, 중국이든 미국이든 어디선가 정우와 민구, 냄새가 재회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민구와 냄새가 러시아로 갔다고 하니 이쪽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세 번째, 지금 화면 속의 존재는 이전의 박정우가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추측이었지만 분위기로 보건대 이 자리의 구세대는 모두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설마 그사이 큰 충격을 받아서 기억이 훼손된 건가?’
여태 쭉 남양주에서만 지내던 중성으로선 상상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정우 씨는 여전히 구원자로 기능하고 있다…….’
중성은 일단 중요한 사실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박정우가 새 성역에 충분한 공을 들이고 있다는 사실.
수천의 사람을 죽이고 99명만 남기겠다는 생각이 끔찍한 건 사실이지만 이건 그만큼 성역의 존속을 확실히 하겠다는 의미도 됐다.
더군다나 그 분별 방식을 자신의 편리대로 정하지 않고 일부러 이쪽에 물어 오지 않았는가.
한국에서 성역의 규칙을 정할 때 자신을 제외한 일행들에게 투표권을 줬던 것처럼 말이다.
“우선.”
중성은 간단히 운을 띄운 뒤 스크린 속 정우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외국인들을 조심스레 훑어봤다.
“시카고 성역의 예비 주민들을 대표할 합당한 존재가 필요합니다.”
-대표자? 한 명이면 됩니까?
“예, 다만 시카고에 계신 분들이 대부분 인간일 테니 같은 종족인 것이 좋겠고, 주민들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군요.
슥.
스크린 너머의 정우가 어딘가를 바라본다.
그러자 시카고 쪽의 캠이 빙글 돌면서 정우의 시선을 좇았다.
슈르륵.
이윽고 캠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일리노이주의 넘버 3, 베네딕 톰슨이었다.
-……?
조금 당황한 듯한 톰슨의 얼굴 위로 정우의 무심한 음성이 쏟아져 내린다.
-네가 하는 게 적당할 것 같은데. 여태 시카고를 쭉 지켜 온 게 네 녀석 아닌가? 주민들을 통제하던 것도 너고.
-그건 맞지만…….
이제 남양주의 주민들은 스크린을 통해 톰슨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톰슨도 마찬가지로 시카고 쪽의 스크린에 비친 아시아계 사람들을 바라봤고 말이다.
-그럼 나더러 우리 주민들의 목숨을 대신 흥정하란 말인가? 내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군.
톰슨이 얼굴을 굳히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서자 정우가 그의 대사를 정정해 줬다.
-이건 흥정이 아니야. 물리적으로 내가 너희들에게 내줄 수 있는 자리는 99개뿐이다. 그러니까 저 자리에 누구를 채워 넣을지 정하라는 이야기다. 검수는 저 사람이 해 줄 거야. 유사한 작업을 많이 해 본 사람이니까.
스크린 속의 김중성을 가리키는 정우.
그러더니 뒷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널 비롯한 이 자리의 각성자들은 주민 선별이 끝나면 죽는다. 그러니 어떤 사심도 없이 작업에 매달릴 수 있겠지. 자격은 충분한 셈이야.
-…….
톰슨은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는 정우의 말에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시애틀 학살자’가 이곳에 와서 성역을 만들 것이란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그 대가는 이쪽이 가진 정수일 거란 걸 짐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 요원은 아닌 것 같았다.
타앗!
박정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요원 두 명이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달음질했다.
그러나 성역의 땅을 밟고 있는 상태라 정수를 사용할 수 없었고, 따라서 이들이 낼 수 있는 속도는 기껏해야 시속 30킬로 내외였다.
현장을 둘러싼 민간인들의 눈에도 느려 보일 지경이었으니 탈주자들이 정우에게 곧장 붙들린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콰악!
정우는 팔을 뻗을 것도 없이 나무가 뿌리를 뻗듯 정수 가시들을 발아래로 내보냈다.
쿠드드득……!
단단히 굳어 있던 땅을 사정없이 헤집으며 양 갈래로 뻗어 나간 정수 가시들은 목표물의 발밑에 닿고 나서야 지상으로 솟아올랐다.
그러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갈래로 증식했다.
스스슷, 스슷, 슷!
두 탈주자는 삽시간에 온몸이 수백 조각으로 나뉜 뒤 복잡하게 분열한 정수 가시들 사이로 흘러내렸다.
마치 아주 잘게 다진 고깃덩이처럼.
스르릅, 철퍽, 철벅.
-…….
“…….”
마침 시카고의 캠도 이 광경을 아주 기민하게 촬영하고 있었기에 남양주의 주민들 역시 모든 걸 함께 보게 됐다.
이 성역을 만들었다던 어느 사내가 태평양 건너의 미국에 가서 외국인들을 도륙하고 있는 장면 말이다.
“……아.”
그나마 남양주에서 정수에 대한 이해가 높은 편인 대리자 조선웅은 자신도 모르게 침음을 흘리며 입을 틀어막았다.
저건 자신이 아는 정수 운용과는 차원이 다른 무언가였기 때문이다.
박정우는, 확실히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시카고 쪽에서 터져 나왔다.
-전원 동작 그만!
시카고 대표로 지정된 톰슨이었다.
다른 요원들마저 도망갈 기색을 보이기에 미리 엄포를 놓은 것이다.
-이미 시애틀에서 혼자 요원 수십을 죽인 자다. 우리가 정수도 없이 여길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톰슨 역시 현재 단 한 올의 정수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정수가 실린 것처럼 쩌렁쩌렁 울렸다.
-아무리 발악을 해도 우린 어차피 죽게 될 거야. 그러니 이왕이면 남은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가치 있게 쓰는 게 낫지 않겠나? 선별이 진행되는 동안 인원 통제를 도와다오.
성역으로 인해 모든 요원이 힘을 잃었지만 권위마저 완전히 잃은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시카고의 주민 입장에선 똑같은 민간인보단 한때 요원들이었던 자들의 지시를 따르려 하지 않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수천의 주민을 99명까지 줄이려면 나이나 성별, 직업 등등에 따라 그룹을 나누어야 할 거다. 따라서 통제를 도와줄 인원이 반드시 필요했다.
-…….
이에 나머지 요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이내 톰슨을 향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반박할 수가 없는 말이군.
-당장 죽는 것보다야 이 개판이 어떻게 정리되는지 보고 가는 게 낫겠죠.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죽는 것보단 결말을 알고 죽는 게 나아.
요원들의 입장 정리가 어느 정도 되자 이번엔 지금까지의 전개를 넋 놓고 바라보던 시카고의 주민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뭐……?”
“잠깐! 그럼 우리에겐 아무 선택권이 없어?”
“99명만 살린다는 거 자체가 미친 소리잖아! 뭘 기준으로 선별할 건데?”
“우리 중에서 몇 퍼센트나 살게 되는 거지……?”
“1,000명 중 99명이라고 해도 9.9퍼센트밖에 안 돼. 그런데 이 자리에 모인 게 못해도 삼사천 명은 될 테니까…….”
장내가 다시 소란스러워지자 앞으로 벌어질 일을 빠르게 예감한 중성이 정우에게 요청했다.
“정우 씨, 거기 계신 요원이란 사람들이 힘을 되찾게 된다면 몇 명까지 감당하실 수 있습니까? 이대론 통제가 안 될 겁니다.”
그러자 정우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눈을 돌려서 시카고의 모든 요원을 방주에 태웠다.
파팟, 팟, 팟.
맥을 제외하고 현재 생존 중인 미국 측 요원의 총원은 무려 11명.
-어?
-엇.
11명의 요원이 일제히 움찔하며 각자의 손목을 살피자 이를 본 중성이 슬그머니 뒷덜미를 쓰다듬었다.
이미 미국도 박정우를 어쩌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는 걸 알아챈 거다.
“시카고 측 대표분을 제가 뭐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톰슨…… 베네딕 톰슨입니다.
“좋습니다. 톰슨 씨, 지금부터 주민들을 크게 두 그룹으로 나누어 주십시오. 일단은 인간과 비인간으로 구분해 주시고, 각각의 그룹을 성별에 따라 두 개로 다시 한번 나눠야 합니다.”
-…….
이 이야길 들은 톰슨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목을 가다듬더니 중성에게 물었다.
-그럼 그다음엔 보유한 특기별로 사람들을 또 나누고, 그다음엔 상대적 노약자들을 쳐내겠군요.
“대단한 변수가 있지 않은 이상, 그렇게 될 겁니다.”
-그렇겠죠…….
톰슨도 한때 순위권 구원자였다 보니 만에 하나 자신이 성역을 만들게 된다면 어떻게 운영할지에 대해서 고민을 해 본 적이 있었던 거다.
-그럼 저도 한 가지 조건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공평한 선별을 위해서 말입니다.
“예, 말씀하시죠.”
중성이 얼마든지 의견을 받아들이겠단 자세를 취하자 톰슨의 눈이 일순 번득였다.
-이쪽의 주민을 99명까지 줄여야 하는 이유는 사실 방주에 남은 자리가 그것뿐이기 때문 아닙니까?
“……맞습니다.”
-현재 방주 좌석이 총 몇 개죠?
이에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조선웅이 대신 대답을 했다.
“340석입니다.”
-그럼 그쪽은 이미 200명 넘게 데리고 있는 거잖아.
답을 들은 톰슨의 말투가 묘하게 비틀린다.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재빨리 바톤을 다시 넘겨받은 중성.
-이쪽도 성역이니 무조건적으로 좌석을 똑같이 배분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민을 선정하는 기준은 똑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쪽의 주민보다 이쪽 주민들의 가치가 더 높고 그 수도 많다면…….
“그 수만큼 자리를 양보하는 게 맞다, 이 말씀이십니까?”
-정확합니다. 그쪽에서 상대적으로 가치가 낮은 사람을 죽이면 우리 쪽의 고가치 인원을 살릴 수 있을 테니까.
양측의 주민들로선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의 강경한 주장.
이건 정우의 말처럼 어차피 죽어서 사라질 입장이기에 꺼낼 수 있는 제안이기도 했다.
“…….”
매사 냉철하던 중성도 이때만큼은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맞는 말이다. 이 자리에 그 정도로 가치 있는 자가 많다면 양쪽의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지.
절대자인 박정우가 승인을 내렸다.
-지금부터 선별을 시작해. 방주 좌석이 가득 찬 뒤에도 시카고에서 인재가 계속 나온다면 그 자리는 남양주에서 만들도록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