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08
312화. 저울(4)
* * *
‘캠’의 촬영 메커니즘은 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 걸까?
지금까지 캠은 발화자를 주시하거나 또는 박정우 등의 주요 인물이 바라보는 방향을 자동적으로 비췄다.
다시 말해서 캠은 상황을 스스로 인지, 판단하는 존재이고, 자신의 기준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한 장면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자신과 연결된 맞은편의 성역에 말이다.
그런 점에서.
-으아아!
-기, 기다려! 같이 가!
-여보! 뒤를 봐! 애가 넘어졌잖아……!
지금 남양주와 연결된 스크린에 시카고 주민들의 선별 실황이 생생하게 송출되고 있는 것 역시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일 터였다.
두두두……!
수천 개나 되는 발 구름이 동시에 발생하자 대지가 통째로 흔들리는 듯했고, 이 소리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실로 처참했다.
남녀노소, 그리고 비인간까지 뒤섞인 3,800여 개체의 시카고 주민.
애초에 성별이나 종에 따라 모여 있던 게 아니고 대부분 가족 단위로 붙어 있었기에 이 거대한 무리가 좌우로 엇갈리기 시작하자 어마어마한 충돌이 일어났다.
퍼벅, 퍼버버벅!
육탄전이 벌어진 것이다.
상대적으로 신체 능력이 좋은 자가 앞사람을 마구 밀쳐 내는 건 물론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다른 성별과 부딪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특히 목발을 짚던 자들은 두 다리가 성한 사람들이 밀고 들어오는 걸 버티지 못하고 제자리에 넘어졌는데, 이렇게 된 이들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곧장 앞뒤로 밀려든 사람들이 머리든 목이든 되는대로 밟으며 지나갔기 때문이다.
방향 전환이 쉽지 않은 휠체어도 마찬가지.
일대의 모두가 마치 포식자를 피해 달아나는 물소 떼처럼 무섭게 움직였다.
건장한 사람도 한 번 땅바닥에 엎어지면 팔이나 손가락 정돈 부러지는 걸 감수해야 했고, 이 모든 광경은 캠의 시야를 통해 고스란히 남양주로 전해졌다.
“…….”
“아.”
“세상에.”
총원 237.
남양주의 주민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스크린을 바라봤다.
제아무리 경쟁 구도에 있는 상대라지만 같은 성역인 탓에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였다.
심지어 이쪽도 곧 저렇게 인원 선별을 해야 할 처지가 아니던가.
슥.
이윽고 중성이 스크린에서 눈을 뗀 뒤 남양주 쪽을 돌아보자 주민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편으로 우르르 물러났다.
그러다 누군가가.
“우, 우린 꼭 죽일 필요까진 없잖아요? 저쪽하고 상황이 다르니까…….”
이런 주장을 펼쳤다.
이에 중성은 음성을 낸 사람을 찾아 눈을 움직이며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나라엔 진입로가 없잖아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30대 임산부였다.
아마도 차세대 할당제를 통해 이곳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인즉슨.
‘남편을 보호하려는 거군.’
중성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린 임산부의 바로 뒤편에 그녀와 비슷한 또래의 사내가 울 듯한 표정으로 서 있는 걸 봤다.
주변에 서 있는 다른 남자들에게 묻힌 것처럼 보일 정도의 작은 체구, 총기가 느껴지지 않는 눈빛.
중성은 직감할 수 있었다. 결코 쓸 만한 자원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성역에서 저 사내는 ‘잠재적 아버지’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내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기에 저런 말까지 해 오는 것이고.
“죽이지 않으면 어떤 방법이 있지요?”
중성이 이렇게 묻자 여자가 제법 부푼 자신의 배를 슬그머니 만지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추방…… 하는 거죠. 맨몸으로 내보낸 뒤에 알아서 살게 하면 되잖아요? 이제 밖엔 괴물도 없고……. 굳이 죽여야 하나 싶어요.”
쓸쓸함이 아주 짙게 묻어나오는 어조다.
남편이 이 성역에 남지 못하리란 걸 인정했기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닌가.
물론 그렇다고 아주 체념한 건 아닐 터였다.
항상 그렇듯이 최악보단 차악이다. 당장 죽는 것보단 맨몸으로라도 추방당해서 혹시 모를 후일을 기약하는 게 나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추방’이란 단어가 튀어나오자마자 다른 임산부들도 일제히 소리를 냈다.
“그러네. 맞는 말 아닙니까?”
“진짜 또 모르죠. 이 일이 끝날 때까지 바깥에서 살아남게 된다면…….”
“솔직히 우린 추방할 필요도 없지 않나요? 시카고야 괴물들 때문에 사람들을 정리해야 한다지만 여긴 괴물이 나타날 염려도 없는데.”
“생각해 보니 맞네.”
차세대 할당제 수혜자의 비율은 무려 방주 전체 좌석 중 30%.
성역 총원은 237명이므로 약 71명이 여기에 해당된다.
1. 방주의 전체 좌석 중 30%를 ‘차세대 할당 좌석’으로 지정한다.
2. 차세대 할당 좌석에는 아래에 해당하는 인원만이 탑승할 수 있다.
가) 임산부 또는 임산부와 그의 배우자.
나) 10세 이하의 아동.
다) 출산 및 육아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판단되는 인원.
이 중에서 나, 다 항과 임산부까지 제외한 잉여 인원, 그러니까 ‘남편’들의 수는 30여 명이었다.
이에 반해 최악의 경우 남양주에서 시카고를 위해 내주어야 하는 좌석의 수는 70개나 됐다.
따라서 남편들의 생존율은 극히 낮을 전망이었고, 이를 모를 리 없는 ‘아내’들이 입김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가치가 낮은 사람들을 방주에서 내보내는 건 찬성이에요. 하지만 굳이 죽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사실 성역 밖으로까지 내보내야 할 이유가 있나 싶기도 하고.”
가장 처음으로 이의를 제기했던 임산부가 중성과 시선을 맞대며 말했고, 여론이 뒤바뀔 조짐이 보이자 나머지 잠정적 추방자들도 하나둘씩 목소리를 보탰다.
“맞아요. 시카고와 이곳의 상황은 많이 다르지.”
“방주에서 내보내는 정도로만 합시다.”
장내가 다시 소란스러워지자 중성이 선웅에게 시선을 줬다.
“저도 방주에 탄 사람을 다시 내보낼 수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선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긴 했지만…… 대상을 방주에서 도로 내보내는 권한이 제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스크린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실질적 결정권자인 정우의 의향을 묻기 위함이었다.
“이 부분은 정우 씨가 정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죽이는 게 맞다 하시면 그대로 집행하고, 성역에서의 추방이나 방주에서의 퇴거까지만 조치하라고 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실은 그도 추방이나 퇴거 정도만 하는 게 옳다고 생각 중이었다.
여러 아내와 남편들의 말대로, 적어도 한반도 내에서는 이미 아군 판정을 받은 민간인을 굳이 죽일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예외는 없습니다. 전부 죽이십시오.
스크린 안쪽에서 뻗어 나온 정우의 대사가 모든 이의 바람과 예상을 박살 냈다.
“어……?
“왜, 왜죠?”
“여긴 진입로가 없으니까, 전혀 문제 되지 않잖아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고무되어 있던 남양주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일찍이 인간이길 초월해 버린 탓에 이상한 고집이 생긴 걸까?
아니면 극도의 원칙주의자라서?
모두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자 곧 정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현재 시각, 오후 8시 16분.
“……?”
“음?”
“무슨…….”
-대략 12시간 뒤에 9일 차 선두 특혜 투표가 시작되고, 아주 높은 확률로 해방 지역의 불가침 상태가 해제될 겁니다.
정우는 지금 폐쇄 조치 8일 차에 들어 바뀐 공통 특혜 항목을 이야기하는 거였다.
[1] 지구에 대한 진입 제한 1단계 하락. [2] 해방된 지역의 불가침 상태 해제. [3] 패스파인더 삭제. [4] 더는 구원자가 정수를 읽을 수 없음. [5] 특혜 선택자 중 무작위 3명 희생.이 중에서 4번은 이미 발동되었으므로 9일 차 투표 때 새 항목으로 대체될 것이다.
다만 날이 갈수록 생존 난이도가 급격히 오르는 폐쇄 조치 특성상 새로운 4번 항목 역시 결코 만만하지 않을 테고, 따라서 다수의 구원자가 2번 항목에 표를 던질 수밖에 없으리란 게 정우의 주장이었다.
일단 1번과 5번은 사실상 선택이 불가능.
3번 역시 패스파인더가 워낙 중요하기에 많은 표를 받진 못할 것이다.
진입로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패스파인더의 진입로 추적 기능은 그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정수 표식으로 다른 각성자의 무위를 가늠할 수 있다는 점은 덤.
-12시간 뒤면 남양주도 더는 안전지대가 아니게 됩니다. 앞으로 성역 바깥에 무엇이 돌아다닐지 알 수 없어요. 그러니 남은 자원이라도 제대로 보존하기 위해서 성역 안팎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좋습니다. 제가 보는 앞에서 추방 인원을 처리하고, 남은 시간 동안은 뒷수습을 하십시오.
“…….”
정우의 말을 들은 선웅은 바짝 마른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각자의 자리에 뻣뻣이 굳어 있는 임산부와 남편들, 그리고 자신을 비호해 줄 이조차 없는 일부 저가치 인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그런데 정우 씨, 뒷수습이라 하심은 정확히 어떤…….”
-남편을 잃은 아내들이 얌전히 있을 리가 없겠지. 반발이 심한 인원은 빠르게 정리하는 것이 변수를 최소화하는 방법일 겁니다.
“…….”
이 대화는 시카고와 남양주 양측에 모두 오롯이 송출되고 있다.
냉정함을 넘어 이유 모를 섬뜩함마저 느껴지는 정우의 말에 시카고의 요원들조차 경악을 금치 못했다.
“12시간이면 아직 여유가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불가침 해제라는 게 확정된 것도 아니고……. 당장 이 자리에서 추방 인원을 미리 정리한다는 건 리스크가 상당한 일이라고 보는데요.”
선웅이 대담하게도 정우의 지시에 맞선다.
그의 상식에선 납득하기 어려운 주문을 받은 탓이었다.
그러자 정우가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선웅의 말을 받았다.
-만약 이 자리에서 변수를 바로 잘라 내지 않으면 추방자들에게 12시간 동안 전략 회의할 시간을 주는 셈이 됩니다. 쿠데타든 뭐든 벌어지겠죠. 추방자 입장에선 가만히 있는 것보다야 어떤 사고라도 일으키는 게 최선일 테니까.
정우의 말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선택권을 줄여야 해요. 적어도 임산부들은 남편이 바로 죽어 버리면 아기라도 살리기 위해 무모한 짓을 하지 않겠죠.
“…….”
이쯤 오자 선웅은 더 할 말이 없게 됐다.
정우의 말이 옳다고도, 그렇다고 틀렸다고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금 주변을 둘러본 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때쯤.
삐익.
스크린 너머에서 짤막한 기계음이 났다.
톰슨이 맞춰 둔 타이머가 다 된 것이다.
시카고의 1차 주민 선별 완료.
예상대로 몸이 불편한 자의 9할가량이 성역의 중앙부를 채 벗어나지 못하고 바닥에 박힌 채 꿈틀대는 중이었다.
이로부터 좌우로 각각 100미터 떨어진 지점엔 톰슨이 지시한 대로 남녀가 각각 모여 있었는데, 특별한 지시가 없었음에도 이미 알아서 특기 분류를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어느 정도 서로 면이 있는 사이다 보니 누가 의사고 누가 엔지니어인지, 농부 출신은 누구인지 잘 알고 있던 것이다.
문제는 특기라고 할 만한 것이 있을 리 없는 아이,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외관상으로도 자신들의 정체를 숨길 수 없었기에 또래끼리 모여 있었는데, 그 수가 수백에 달했다.
실로 비참한 상황.
그럼에도 장내의 어른 중 이들을 비호하려고 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장 스크린 안쪽의 남양주만 봐도 임산부와 그녀들의 남편이 강제적 사별을 앞둔 상태이지 않은가.
이런 분위기에서 감히 자비 따위를 기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옥…… 여기가 아마 지옥일 거야…….
시카고의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고, 곧 그 위로 박정우의 무심한 음성이 끼얹어졌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군. 우선 시카고의 인원부터 500명까지 줄이도록 하지.
-……!
현재 시카고의 총원은 약 3,800명.
그리고 방금 3,300명에 대한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