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1
31화. 수배 (3)
사내가 부른 ‘박 팀장’이 11번 출구로 오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근처에서 대기 중이었는지, 맞은편에서부터 부하들을 잔뜩 데리고 나타났다.
하나같이 시커먼 양복에 푸른 배지.
대성 그룹의 직원들이었다.
그리고 정우가 박 팀장을 알아보는 데에도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함정은 절대 아니라며……? 절대란 말을 함부로 쓰는 놈이었네.’
그가 새로 나타난 인물들의 정수량을 확인할 수 있을 때쯤 되자 선두에 있던 사내가 주춤했기 때문이다.
상대도 이쪽의 정수량을 봤다는 의미.
즉, 저자가 바로 대성 측의 구원자인 박 팀장이고…….
“무장 님이시죠? 사연은 잘 봤습니다.”
정우가 먼저 비웃듯이 이야기하자 순간적으로 박 팀장이 이를 악무는 게 보였다.
역시나.
이에 놈의 뒤편에 서 있던 사내들이 잽싸게 움직였다.
정우를 포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곧 박 팀장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손님입니다.”
일종의 은어인 듯. ‘손님’이란 말에 사내들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사이 정우는 이들의 정수량을 파악했다.
박 팀장이 322개.
이에 반해 그가 끌고 온 직원들은 정수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
2개에서 30개 사이.
일부는 살인 경험조차 없는 풋내기인 거다.
박 팀장, 그러니까 ‘무장’이 이야기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매우 실망스러웠다.
‘그럼 패스파인더가 왜 이쪽을 가리키고 있던 거지?’
이런 생각을 하며 사내들을 마저 훑던 정우의 시선이 한곳에서 멈췄다.
‘여기 있었군.’
무려 정수 3천 개를 가진 남자가 구석에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도전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구원자는 확실히 아니다.
그렇다고 포식자인 것도 아니고……. 믿기지 않지만, 미분류 인원이었다.
박 팀장이 감히 최초의 채널에 장난질을 할 수 있던 이유가 이거였던 것이다.
정우가 그를 신기하다는 눈으로 보자 놈은 시선을 맞받아치는 대신 박 팀장을 쳐다봤다.
마치 명령을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대체 뭐야?’
정우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말하는 사자보다 더 진귀한 구경거리다.
정수 3천 개짜리 각성자가 하위권 구원자의 명을 받들다니.
“이런 식으로 경쟁자들을 처리하고 있는 건가요.”
정우가 만년필을 다시 그러쥐며 묻자 살의를 느낀 박 팀장이 양손을 펼쳐 보였다.
싸울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아니, 어차피 싸워도 승산이 없으니 자세를 확 낮추겠다는 쪽에 가까웠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드디어 저희가 찾던 분을 뵙게 됐는데요. 부디 시간을 조금만 내주십시오.”
그러더니 정우를 향해 허리를 깍듯이 숙였다.
“…….”
다짜고짜 배꼽 인사를 받게 된 정우는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순위권 구원자를 직접 만나 보기 위해서 강남역에 각성자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흘렸다는 소리 아닌가.
정수 3천 개짜리 비밀 병기를 대기시켜 둔 채로.
“어……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이게 그렇게 중요한 일입니까, 죽음을 불사할 정도로? 여러분, 지금 목이 달아나기 직전인 건 알고 계시죠?”
정우의 마지막 말에 ‘3천 개’가 괘씸하다는 듯이 표정을 구겼다.
상대의 정수량을 보고 있다면 저런 얼굴을 할 수 없을 텐데…… 놈이 구원자가 아니라는 게 확실해졌다.
또한 놈의 포지션도 드러난 셈.
이 사내는 일이 틀어졌을 경우 실력 행사를 하는 일종의 해결사였던 거다.
‘설마 순위권자의 허들을 3천 개 아래로 잡아 놨던 건 아니겠지.’
정우는 설마설마하면서도 자신의 추측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오늘 대법원에서 봤던 4위 구원자 ‘영지’의 정수는 천 개가 좀 넘었다.
39위인 박 팀장이 322개를 가지고 있던 상태고.
따라서 정수를 6,800개나 가진 괴물이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못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놈이 하필 강남역으로 오고 있다는 것도 몰랐겠지.’
이미 망자가 된 홍예성의 말을 빌리자면, 이거야말로 운명이다.
대기업이고 뭐고, 정우는 눈앞의 사내들을 죽이기로 결정했다.
‘여길 정리하면 정수가 1만 개를 넘어간다.’
벌써 먼 옛일처럼 느껴지는 행운동의 진입로가 생각난다.
정우가 흥분한 기색을 여실히 드러내자 박 팀장이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팍!
돌로 만든 타일이 깔려 있음에도 꽤 묵직한 소리가 났다.
“자, 잠시……! 저희의 제안이라도 들어 보시죠. 이대로 모든 구원자가 사람을 계속 죽여 나가면 결국은 인류 멸망입니다. 정말 그걸 원하십니까? 멀리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요.”
정우가 심드렁한 말투로 대답했지만, 박 팀장은 기회를 잡았다고 여겼는지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이 일이 다 끝나면요? 그때도 서로를 죽일까요? 아니죠, 복구해야죠. 그동안 파괴된 것들, 잃은 것들……. 그러려면 최소한의 인프라는 남겨 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쉽게 말해서, 대성 그룹을 살려 달라는 소리다.
어떻게 보면 업혀 가겠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요지만 따지면, 정우가 의사를 미리 구해 두려는 이유와 비슷했다.
“그러니까, 제 스폰을 하겠다는 거죠? 절 지원해 주는 대신 대성은 끝까지 살아남고. 그쪽의 공식 입장입니까?”
정우의 물음에 박 팀장이 고개를 더 숙였다.
“그렇습니다.”
하기야 정부도 대놓고 구원자를 찾고 있는 마당에 대성 같은 대기업에서 손 놓고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럼 당장 해 줄 수 있는 건 뭡니까?”
“예……?”
정우가 만년필을 만지작거리자 박 팀장의 시선도 그리로 꽂혔다.
“절 지원해 준다면서요.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냐고요.”
“그야 당연히 음식부터 시작해서 숙소, 생필품, 장비, 저희 지사가 있는 지역에서의 전폭적인 지원……. 금전적인 부분에서도 아쉽지 않게 챙겨 드리겠습니다.”
초조한 표정의 박 팀장이 줄줄이 대사를 읊는 사이, 정우의 만년필이 그의 머리를 향했다.
슥.
“어엇!”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다른 직원들이 눈을 치켜뜨며 신음을 흘렸고, 곧 푸른 파동이 장내를 휘감았다.
푸아아악!
박 팀장과 그 주변에 있던 모든 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놈의 능력으로는 방어조차 할 수 없도록 천 개가량의 정수를 불어넣은 공격이었다.
“여차하면 뒤를 칠 준비나 하고 있던 주제에 고작 돈? 진입로를 닫는 데 뭐가 필요한지 전혀 모르나 보네.”
물론 이야기를 들어야 할 대상이 죽고 없는 허공에 대고 한 말이다.
솔직히 무슨 제안이 와도 대기업의 밑이나 닦을 생각은 없었지만, 대량의 정수를 조달해 준다고 해도 시원찮을 판에 조금 전의 대답은 최악이었다.
티틱.
정우가 박 팀장과 나머지 직원들에게서 떨어져 나온 정수 덩어리를 흡수하자 대번에 ‘해결사’가 실력 행사를 해 왔다.
“이 미친 새끼가!”
놈은 허리춤에서 삼단봉을 꺼낸 뒤 곧바로 정우를 향해 휘둘렀다.
‘방출 타입이구나.’
둘 사이의 거리는 4미터.
정우는 삼단봉에서부터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는 걸 보자마자 신체 바깥으로 방어막을 구축했다.
파아앗……!
현재 그의 정수는 7,165개다.
따라서 이 사내가 전력으로 빚어낸 방어막은 모르는 사람이 봐도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당신 같은 사람이 대성에 또 있나 묻고 싶었는데, 그냥 직접 찾아다니는 게 빠르겠지.”
정우는 상대의 정수 방출이 자신의 방어막을 뚫지 못한 걸 보면서 나지막하게 이야기했다.
그래도 꽤 매서운 공격이었다.
무려 7천 개짜리 방어막에 균열이 생겼으니까.
일격에 싸움을 끝낼 심산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보다시피 실패했고, 앞으로 약 3초 동안은 놈이 사용할 수 있는 정수가 거의 없을 터.
“음.”
정우가 앞으로 걸어 나가며 만년필을 들어 올리자 예상대로 놈이 당혹스러움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대량의 정수를 다루는 사람인 만큼, 자신이 상대하던 자가 어느 수준인지 깨달은 것이다.
“자, 잠시만…….”
끝내 사내의 입에서 나오고 만 빤한 대사.
정우는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만년필을 든 채로 물었다.
“정수 3천 개면……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안다는 뜻인데, 대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지?”
어째서 대성 그룹에 충성하고 있느냐는 물음이다.
그것도 자신보다 훨씬 약한 자들의 명령을 받으면서까지.
정말 너무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다.
이에 녀석이 일그러진 얼굴로 힘없이 말했다.
“저도 처음엔 닥치는 대로 죽였죠. 하지만 그쪽도 아까 듣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서로를 계속 죽이다간 결국 남는 게 없을 겁니다. 이 일이 모두 끝난 뒤도 생각해야죠.”
그러더니 유언을 남기듯이 덧붙였다.
“대성은 미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 힘을 미래를 위해 쓰기로 결정한 겁니다. 구원자들의 목적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들었는데…… 그쪽은 아닌가 보군요.”
이 말을 끝으로 사내의 시선이 박 팀장이 있던 자리에 닿았다.
정우는 그걸 보면서 이자가 진심임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살려 줄 순 없었다.
대신 아까보다 한층 수그러진 말투로 이별을 고했다.
“이제 겨우 하루 지났을 뿐인데, 뭘 닥치는 대로 죽였다는 겁니까.”
이윽고 정우가 만년필을 쥔 손에 힘을 주자 죽음을 직감한 사내가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이내 만년필 끝에서부터 역(逆) 고깔 형태의 파동이 뿜어져 나갔다.
푸아아악!
정수 3천 개.
이건 정우가 여태 만나 본 상대 중에서는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의 거물이었다.
그럼에도 그저 만년필을 까닥이는 것만으로 존재가 지워지는 걸 보자 문득 허무한 마음이 들었다.
또한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언젠간 나도 이렇게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까, 하는.
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이 오래 주어지진 않았다.
머릿속에서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정수 1만 개 달성이 임박했습니다.
담당 평가관 ‘다467’이었다.
얼른 눈앞의 3천 개짜리 정수를 흡수하라는 소리다.
평소와 달리 놈의 목소리에서 조급함과 기대 같은 것이 느껴졌다.
‘1만 개의 달성은 제가 하는 건데, 왜 그쪽이 흥분을 합니까.’
정우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발을 내디뎌 정수 덩어리를 깨뜨렸다.
그러자 발끝에서부터 싸늘한 기운이 스며들더니 정수 보유량이 급속도로 불어났다.
스아아앗!
네 자릿수의 정수가 다섯 자리로 불어나는 순간이었다.
이때만큼은 이마 안쪽이 찌릿해질 정도의 압박감이 그를 옥죄었다.
“으억……!”
숨이 막히는 듯해서 상체를 숙이는 와중에 시야 측면의 채널에 글자가 떠올랐다.
[39] 청주수호자: 어…….짧지만 의미가 분명한 메시지.
기존에 39위였던 ‘무장’이 죽으면서 그 밑의 구원자의 순위가 한 단계씩 상승한 것이다.
[41] 목동: 대번에 죽었네. 이거 뭐 무서워서 엄살이라도 부릴 수 있겠나. [46] 정수왕: 애도요.알게 모르게 정우의 덕을 보게 된 하위권 구원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다음엔 여느 때처럼 신입이 들어왔다.
|50위 구원자가 채널에 접속했습니다.
[50] 정석: 오, 여기가 소문으로만 듣던 그곳입니까?이번 녀석은 누가 봐도 인간.
콘셉트인지, 본래 성격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신입답게 굴었다.
그러나 잊어선 안 된다.
이놈은 불과 몇 초 전까지 2번 채널의 꼭대기에 있었다.
거기선 왕처럼 행세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난리도 아니군…….’
정우는 가슴팍까지 치고 올라온 냉기가 점차 사그라지는 걸 느끼면서 날숨을 크게 쉬었다.
그리고 그의 호흡이 끝나자마자 눈앞에 다섯 자리의 수가 큼지막하게 나타났다.
「10,707」
마치 게임의 퀘스트 완료 문구처럼 금빛 휘광을 바탕에 깔아 둔 채였다.
‘아, 이건…….’
이 숫자가 현재 자신의 정수량이라는 걸 정우가 깨달을 때쯤엔 이미 다음 절차가 진행되고 있었다.
빠아아아아앙!
대형 금관악기를 힘차게 부는 소리가 하늘을 찢을 듯이 터져 나왔다.
“헉.”
깜짝 놀란 정우가 허공으로 고개를 들었고, 11번 출구 아래쪽에서부터 선웅이 뛰어 올라왔다.
“정우 씨! 괜찮으십니까?”
이 ‘신호음’이 정우에게만 들린 게 아니라는 방증이었다.
그러고는 다소 고압적인 톤의 목소리가 신호음과 마찬가지로 쩌렁쩌렁 울렸다.
「튜토리얼 최초의 통과자가 나타났습니다.」
공기가 통째로 진동하는 게 피부에 느껴질 정도였다.
“튜토리얼……?”
선웅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적어도 정우는 이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았다.
이전에 평가관이 그러지 않았던가.
정수 1만 개를 모아야 비로소 튜토리얼을 벗어날 수 있다고.
방금 그 조건을 충족했을 뿐이다.
다만…….
‘잠깐, 최초의 통과자라고?’
정우가 눈을 부릅뜨기 무섭게 그의 시야에 또 하나의 변화가 생겼다.
|박정우 님의 소속 지역 내 순위는 ‘1’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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