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11
315화. 분기점(2)
* * *
파아아아앗……!
정우의 열람 주문과 함께 사위의 공간이 에너지 형태의 9일 차 기록으로 가득 찼다.
거대한 비눗방울처럼 보이는 고밀도의 에너지들.
저 안엔 행성 사9005의 9일 차가 오롯이 담겨 있을 것이다.
슥.
정우가 ‘비눗방울’ 중 하나에 시선을 두자, 이전과 마찬가지로 방대한 양의 정보가 머릿속에 쏟아져 들어왔다.
각기 다른 곳에서 찍은 스냅샷을 초당 수천 장씩 연달아 보는 것 같은 느낌.
“…….”
이렇게 십여 초를 더 버텼다가는 정신이 분해될지도 모른다.
정우는 기록에서 시선을 떼어낸 뒤, 자신이 원하는 데이터를 주문했다.
“9일 차에 가장 강했던 구원자의 시야를 보고 싶다. 재생 시점은 녀석이 9일 차 침입자를 처음 발견했을 때로.”
그러자 사방에 흩어져 있던 행성 기록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스스슷…….
다음엔 기록들 사이를 훑던 정우의 시선이 특정 지점에 강제로 고정됐다.
그러곤 그의 의식이 또 한 차례 빨려 들어갔다.
행성 기록이 지정한 시간대로 말이다.
‘흡……!’
확실히 이 행성 기록이란 장치는 우주 내에서도 고차원적인 수준인 게 분명했다.
이미 경험해본 의식 이동임에도 여전히 낯설고 위압적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
시야 제공자에게로 의식이 전이되면서, 전에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위화감이 밀려들어왔다.
삐이…….
처음엔 이명인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소리들이 구체화되면서 머릿속을 마구 헤집었다.
-에너지 증폭 감지.
-열렸어.
-온다.
-차단막을 전개해.
다른 존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귓속말을 해오는 듯한 느낌.
그리고 이때쯤 정우는 이미 시야 제공자의 몸 안에 들어와 있었다.
‘아.’
전이가 끝났음을 깨달은 그는 잽싸게 눈을 돌려 자신, 그러니까 시야 제공자의 몸을 확인하려고 했다.
그러나 저번과 마찬가지로 손과 발을 포함한 모든 신체가 블러 처리 되어 있어 육안으로 형체를 확인하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다만 제공자의 거의 모든 감각과 동기화가 된 상태라 이 존재가 인지하는 대부분을 똑같이 느낄 수 있었는데, 덕분에 몇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됐다.
하나, 이 생물의 수명은 아주 길다는 점.
현 시점 사9005의 최강자인 이 존재는 지구 시간으로 800년 가까이 살아온 상태였다.
둘, 행성의 다른 존재들과 의식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
아마도 종족 고유의 특성일 것이다.
적어도 이 행성의 주민들에겐 굳이 구원자 채널이 필요 없었다. 같은 종족이라면 아무리 복잡한 의미라고 해도 서로에게 원격으로 전달해줄 수가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주민이 똑같은 생각을 하거나 ‘우리는 하나.’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의식을 공유하긴 하지만 각 개체의 개성과 특징은 별개로 존재하는, 아주 독특한 종족이었다.
‘이 정도면 6일 차까지 쭉 무작위 살해를 골라온 게 전혀 이상하지 않군.’
행성 폐쇄를 막아내는 데에 최적화된 특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사아아아…….
이 종족은 비행을 할 수 있었다.
‘맙소사.’
현재 고도를 뒤늦게 깨달은 정우는 이 육신의 등허리에 뭔가가 붙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몸으로 느껴지는 형태나 크기는 마치 물고기의 아가미 같았는데, 그 기능은 전혀 달랐다.
드으응, 드으웅…….
낮은 진동을 계속 내면서 일종의 부양력을 생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건.
‘날개 같은 거군.’
이제야 이 괴이한 육신에 적응을 한 정우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시야 제공자는 지상에서 약 30미터가량 떠오른 채, 이제 막 아가리를 벌리기 시작한 진입로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쿠아아아……!
마치 커다란 흑색 소용돌이처럼 보이는 9일 차 진입로.
허공에 일어난 파문처럼 제자리에서 일렁이던 이전의 진입로들과 달리 지금 정우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아주 격렬하게 움직였다.
그러다가.
-변화 감지!
-열렸다!
-침입자 진입!
아까부터 계속해서 머릿속을 쑤셔대던 다른 존재들의 음성이 비슷한 형태로 통일됐다.
그리고 시야 제공자의 근처에서 꿈틀대던 진입로도…….
꾸드득!
무언가가 깨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몸체를 까뒤집었다.
이제 진입로는 더 이상 원형도, 나선형을 그리는 소용돌이의 모습도 아니었다.
흡사 마구잡이로 찢어놓은 종잇장처럼 파편화된 상태로 행성 사9005의 허공에 흩어졌다.
정우와 시야 제공자의 의식에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들이닥친 것도 이때.
‘……!’
정우도 그랬고, 시야 제공자 역시 방금 막 진입로가 활성화됐음을 알아차렸다.
홱.
행성 사9005의 최강자가 진입로를 향해 양손을 뻗는다.
그러곤.
콰아아아앗!
단단히 포갠 양손바닥 사이로 시퍼런 무언가를 쏘아냈다.
곧게 뻗은 넝쿨줄기 같이 보였는데, 아마도 지구로 치면 ‘정수 창’에 해당하는 공격일 것이다.
쐐애애애액!
‘엄청나군.’
정우는 방금 공격에서 느껴진 정수 밀도를 되새기면서, 십중팔구 진입로가 박살 날 거라고 생각했다.
정확한 수치를 볼 순 없었지만, 최소 백억 단위 수준의 공격이었으니까.
그러다가 잠시 잊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을 상기했다.
‘잠깐.’
정우가 재생을 주문한 기록의 조건은 ‘행성 사9005의 최강자가 9일 차 침입자를 처음 발견했을 때.’였다.
다시 말해서 지금 보고 있는 진입로 안에서 9일 차 침입자가 등장할 거란 이야기다.
‘이번 공격으론 진입로가 닫히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진입로의 폐쇄 조건 자체가 백억 이상의 정수라서?
아니면…….
콰직!
정우의 생각은 진입로 근처에서 발생한 파열음에 가로막혔다.
시야 제공자는 이미 소리의 발원지를 바라보고 있었고, 정우도 서둘러 녀석의 시선을 좇았다.
그러자.
쉬아아앗…….
정말이지 기척도 소리도 없이 행성 안으로 진입 중인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문자 그대로 형이상학적인 어떤 것.
굳이 표현하자면 적색을 띠는 모래 파도와 흡사했다.
정말 물밀듯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그것은 삽시간에 축구 경기장 수준으로 몸집을 키웠다.
그럼에도 물속의 해파리처럼 너무나 가볍고 유연하게 움직였고, 자유자재로 넘실대며 허공을 헤쳐 나갈 때마다 일대의 공간을 뒤틀었다.
또한 시간에도 영향을 주는 존재일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조금 전 놈에게 닿았다가 수십 동강이 난 정수 창이 곧바로 사라지지 않고 놈의 주변에서 함께 넘실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아주 천천히.
‘대체 뭐지?’
정우조차도 당혹감을 느꼈고, 사9005에서 가장 강한 존재인 시야 제공자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곧 녀석의 날카로운 경고가 정우의 의식을 뚫고 어디론가 쏘아져 나갔으니까.
-도망쳐. 정수를 아껴라.
이건 녀석이 다른 지역의 진입로 근처에서 대기 중일 나머지 구원자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본인은 후퇴하지 않았다.
스으으으…….
이 괴이한 침입자를 대체 무어라 불러야 할까.
이것은 시야 제공자의 정수 창을 간단히 막아낸 뒤에도 이렇다 할 반격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쉬르릅.
진입로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뒤엔 자신을 막아선 자그마한 존재 앞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니, 정확히는 특정할 수 없는 형태로 물결치던 모래알들을 좀 더 견고한 모습으로 쌓아 올렸다고 봐야 할 거다.
5일 차 침입자였던 관찰자 다홉이 실체를 드러내기 전에 물기둥으로 존재했듯, 이번 침입자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쏴아아아앗…….
좌우로 넓게 펼쳐져 있던 모래들이 이번엔 위로 높게 치솟는다.
시야 제공자는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해 몸을 조금씩 뒤로 물렸다.
정우는 그동안 침입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는데, 그래서일까.
‘…….’
왜인지 저 모래 속의 무언가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록 속의 괴물이 시야 제공자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정말로 놈이 현 시점의 박정우를 직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는 이야기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정우는 실로 그렇게 느꼈다.
‘지금 이 기록 속에 있는 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존재 아닌가? 저게 날 감지한다는 게 가능해?’
결코 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
그러다 이윽고 태산처럼 높게 쌓인 붉은 모래 사이에서 칠흑색 구체가 빠져 나왔다.
스릇.
직경 20미터 크기의 완벽한 구형체.
‘뭣…….’
정우는 조금 놀라긴 했지만, 지난번 행성 기록을 통해 궤멸자를 봤을 때와 달리 항상성 하락이 이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잠시 뒤엔 항상성 하락보다 더 큰 충격을 받게 됐다.
스아앗.
검은 구체의 표면에 ‘초월적인 문자’가 하얗게 새겨졌을 뿐더러.
「날 기다리던 게 너희뿐인가?」
시야 제공자와 정우를 동시에 짚고 있었으니까.
‘……뭐?’
-뭐라고?
구체의 첫 인사와 함께 정우와 제공자가 동시에 반응을 보였고, 이에 새 침입자는 이렇다 할 부연 없이 다음 대사를 띄워 올렸다.
「가진 것을 보여라. 내 배를 채워야만 오늘을 지날 수 있을 것이다.」
* * *
현재 시각, 오후 8시 47분.
박정우가 반투명한 막을 뒤집어쓰며 기척을 감춘 때로부터 십여 분이 지난 시점.
시카고의 주민 선별이 막바지에 치닫는 와중에, 성역을 감싼 금빛 보호막이 일순 흔들렸다.
그러면서.
투퉁!
경고음 같은 것이 시카고 전역을 두드렸다.
“어?”
“……아.”
“이건 설마.”
민간인과 요원들의 반응이 크게 갈린다.
아무래도 견문이 좁을 수밖에 없는 민간인들은 방금 들은 소리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해 그저 겁을 먹기만 했고, 반대로 요원들은 눈빛을 날카롭게 세우며 경고음이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적어도 이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소리는 외부의 존재가 성역 안쪽에 침입했다는 의미라는 걸.
거기에 더해서.
“다시 나가는 소리가 없지 않았습니까?”
“간도 크군.”
후속 경고음이 없었다는 사실을 통해 외부자가 보호막 바깥으로 되돌아나가지 않았다는 사실도 바로 유추해냈다.
시카고보다 한참 앞서 뉴욕에 세워진 성역 덕분에 이 금빛 보호막의 기능에 대해 잘 알아서였다.
어쨌든 요원들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박정우가 자신들을 방주에 태워놓고 가서 말이다.
만에 하나 저 소리의 원인이 총을 든 무법자들이거나 맹수 떼라면 어렵사리 선별해둔 인재들을 잃게 됐을 거 아닌가.
하지만 이 자리엔 성역 내에서도 정수 운용이 가능한 요원이 11명이나 됐기에 처치 곤란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직접 가보죠. 마저 진행 하십시오.”
톰슨이 다른 요원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사이, 사태를 조용히 지켜보던 맥 테일러가 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반적이지 않은 기척이 느껴져서다.
그리고 실제로 잠시 뒤.
투다닷!
경쾌한 발소리와 함께 웬 짐승 소리가 시카고 허공을 찔렀다.
캬오오오!
이에 시카고의 수백 주민과 요원들이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쳐다봤고, 곧이어 모두가 보게 됐다.
“자, 잠깐! 쏘지 마십시오!”
46세, 남성.
미네소타 치안국의 넘버 5 에드 헤일리가 웬 맹수를 타고 달려오는 모습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