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15
319화. 분기점(6)
* * *
오후 9시 45분.
정우 일행이 탄 헬기는 이제 시카고를 떠나 대륙 남서쪽을 향해 비행 중이었다.
캔자스와 오클라호마 등이 있는 방향으로 말이다.
물론 반대 방향인 동쪽으로 2개 주만 가로지르면 뉴욕의 성역에 닿을 수 있었으나 현 시점 정우의 최우선 과제는 ‘안전한 수면’이었기에 그럴 수 없었다.
미국의 1인자인 맥 테일러가 박정우의 수발을 들고 있긴 하지만, 이것이 결코 미 대륙 연합의 전폭적 지지를 뜻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뉴욕의 성역에 발을 들이게 되면 정우도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게 되고, 그의 가치를 직접 본 일이 없는 뉴욕 측 각성자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처형을 집행할 게 뻔했다.
또한 치안국이 건재해서 언제고 수준급 기습을 해올 수 있는 지역도 ‘휴식처’에서 제외.
따라서 정우가 이 넓은 대륙에서 수면을 취할 수 있는 곳은 얼마 되지 않았다.
치안국이 존재하지 않는 무법지대로 들어가거나 본래부터 인구 밀도가 극히 낮았던 산간지대를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오클라호마가 훨씬 한적하긴 하겠지만 바로 밑에 텍사스가 붙어 있어. 그리고 텍사스엔 여전히 정예 요원들이 정찰을 다니지. 밤을 편하게 보낼 순 없을 거야.”
박정우에게 ‘충언’을 해주고 있는 이 사내는 다름 아닌 맥 테일러였다.
인간 남성, 37세, 미국의 1위 구원자이자 서면계약권자.
한때 자신이 지구를 구원할 재목이라고 여기던 그였기에, 이쯤 오자 박정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반면 헬기의 조종간을 붙잡은 샬롯 터너의 대사엔 제법 날이 서 있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요? 어차피 누가 오든 다 죽일 수 있을 거 아니에요?”
비록 박정우에게 목숨을 의탁하고 있는 입장이긴 하지만 그의 사상엔 전혀 동의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이 헬기를 순순히 조종하고 있는 이유는 자신의 생존 때문만이 아니기도 했다.
슥.
샬롯이 룸미러를 통해 뒷좌석에 몸을 파묻고 있는 토드 파커를 바라본다.
“…….”
44세 남성, 마취 전문의, 샬롯과는 연인 관계에 있는 인물.
사실 행성 폐쇄 이후에 이어진 인연이라, ‘전우’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어쨌든 두 사람은 서로의 버팀목이었고, 샬롯이 이렇다 할 사고를 치지 않고 있는 이유 역시 토드 파커가 쭉 살아 있길 원하기 때문이었다.
“네 생각은 어때? 만약 캔자스로 간다면 진입 직후엔 청소를 좀 해야 할 거야. 무법자 캠프가 몇 개 있는 걸로 알거든. 대신 처음에 수고를 좀 하면 날이 밝을 때까진 신경 쓸 일이 없을 거다.”
맥이 정우를 쳐다보며 물었고, 이에 정우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만 열어서 대답했다.
“가장 가까운 곳이 어디지?”
“캔자스.”
“그럼 그곳으로 가. 최대한 빨리 휴식을 취한 뒤에 9일 차 정산을 하고 용을 쫓는다.”
“…….”
정우의 말에 장내 모두가 서로의 눈치를 봤다.
심지어 바닥에 몸을 늘어뜨리고 있던 재규어마저 고개를 번쩍 들 정도.
“용을 쫓는다고……?”
맥이 일행을 대표해 정우에게 묻자, 항상 그렇듯 무심한 투의 답이 돌아왔다.
“녀석이 아니었으면 굳이 서쪽으로 선회하지 않았을 거다. 가능하면 놈이 9일 차 진입로와 맞닥뜨리기 전에 붙잡아야 해.”
“왜지? 9일 차 침입자가 용을 꺾을 정도로 강한가?”
“…….”
이번엔 정우가 입을 다문다.
행성 기록을 통해 봤을 뿐, 9일 차 침입자가 직접 싸워본 게 아니라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어서였다.
그리고 용이란 녀석의 수준도 제대로 알지 못하잖은가.
“이번 침입자도 거래를 제안하는 유형이다. 그러니 가능하면 용이 거래를 개시하기 전에 만나보는 게 좋겠지.”
“거래? 또 탑처럼 그런 방식인가?”
“이번엔 좀 달라. 어차피 곧 보게 될 거다.”
정우는 맥에게 이렇게 답한 뒤 저 멀리 보이는 달에 시선을 뒀다.
정확히는 온갖 시련을 돌파해온 구원자에게만 출력되는 특유의 인터페이스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현재 정수 총량 말이다.
「29,845,603,176」
|상환 완료자
‘298억.’
시카고의 요원들을 흡수해 여신 거래를 완전히 해소한 그에겐 이제 ‘상환 완료자’라는 모종의 호칭 같은 게 붙어 있었다.
이건 그가 임의로 제거할 수 없었고 정수 총량을 확인할 때마다 하단에 병기됐다.
아마도 현재 보유한 정수에 우주로부터 지급 받은 것이 섞여 있음을 표시하기 위함일 거다.
‘왜 굳이.’
정우는 미간을 살짝 꿈틀댔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이런 새로운 표시엔 하나같이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두두두…….
이 와중에도 헬기의 프로펠러에선 요란한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무리 못해도 반경 수 킬로미터 내의 모든 존재가 이쪽의 위치를 알고 있을 거다.
그래서일까.
피잇……!
한동안 헬기 소음만이 울려퍼지던 상공에 또 다른 무언가가 끼어들었다.
“어……?”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조종석의 샬롯이었고, 그 다음엔 맥이 고개를 돌려 헬기 측면을 살피려 애썼다.
“빛 같은 건 안 보였습니까? 신호탄 소리 같았는데.”
마침 이때 맥의 반대편에 앉아 있던 정우는 이미 문제의 신호탄을 보고 있었다.
우측 약 1킬로미터 지점에서 주황색 불빛이 스멀거리듯 떠오르는 중이었던 거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캔자스인가?”
정우가 불빛을 물끄러미 보며 이렇게 묻자, 조종석의 샬롯이 짤막하게 답했다.
“맞아요. 이제 막 진입한 수준이긴 하지만.”
“그럼 저건 너희들이 말한 무법자란 녀석들이 쐈다고 봐야 하나?”
“……!”
그러자 비로소 다른 일행들이 정우가 보던 창문 쪽으로 몸을 틀었다.
“아.”
“정말 신호탄이네.”
“당연히 우릴 보고 쏜 거겠죠?”
그러나 그 누구도 위치가 발각됐다는 사실에 겁을 먹거나 우려를 표하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엔 각 주의 수호자급 요원을 혼자 도살한 괴물이 함께 있지 않은가.
“저쪽에 착륙할까요?”
심지어 샬롯은 신호탄이 올라온 방향으로 가면 되겠냐며 물어오기까지 했다.
그사이 상공으로 솟구쳤던 불빛이 도로 낙하하기 시작했고, 정우는 손가락으로 창문을 두드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 녀석들이 이 늦은 시간에 길에서 잘 리는 없고…… 야영지라도 마련을 해놨겠지.”
상대를 직접 찾아가잔 이야기다.
“그렇겠죠.”
샬롯은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조종간을 틀었다.
투드드드드……!
동체가 기울면서 프로펠러 소리가 묘하게 바뀌었고, 정우는 발치의 패스파인더를 바라봤다.
“…….”
물론 패스파인더의 정수 표식은 상대의 위치를 가리키고 있지 않았다.
이 헬기 안에만 해도 브라질에서 건너온 재규어와 미국의 1위 구원자가 타고 있었으니까.
따라서 만약 패스파인더가 헬기 안쪽이 아니라 갑자기 바깥쪽을 가리키게 된다면, 그건 정말 엄청난 상대가 나타났다는 뜻인 거다.
“잔챙이뿐이군.”
정우가 이 말과 함께 고밀도의 ‘레이더’를 뿌리자, 각성자가 아닌 샬롯과 토드마저 섬뜩함을 느꼈다.
주변 공기에 다른 무언가가 섞여 들어오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다음엔.
촤르르륵!
정우가 예고도 없이 헬기 출입문을 열어 젖혔다.
“헉! 미, 미쳤어요?”
샬롯이 쏘는 듯한 음성을 냈으나 정우는 그녀 대신 맥을 돌아보며 지시를 내렸다.
“헬기 정돈 잘 간수할 수 있겠지.”
“……물론이다.”
맥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재규어를 흘깃 봤다.
이에 그의 시선을 느낀 정우가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재규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홧.
점잖은 기척과 달리 실제 그의 동작이 매우 잽쌌기에 순간 재규어가 살기를 뿜어냈으나 거기까지였다.
캬릉!
앙칼진 울음과 함께 알록달록한 맹수의 몸뚱어리가 헬기 바깥으로 끌어내려졌다.
홰애액!
정우가 녀석의 목덜미를 쥔 채 헬기에서 뛰어내린 거다.
난데없이 밤공기를 가르게 된 재규어의 수염이 뒤편으로 바짝 접혔고, 곧 그 위로 정우의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정우가 놈의 허리를 양 다리로 감싸며 올라탄 것이다.
꽈드득…….
상대의 몸에 어마어마한 근력이 깃들었음을 깨달은 재규어는 낙하하는 와중에도 두려운 표정을 지었고, 이를 본 정우가 그새 코앞까지 다가온 대지를 가리켰다.
“착지해. 지금부터 네 기동능력을 평가할 거다.”
* 뭐……?
당황한 재규어는 본능적으로 어금니를 드러내면서도 일단 착지를 위해 전신을 파랗게 빛냈다.
맹수들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신체 강화.
스아아앗.
정우의 피부마저 파랗게 물들 정도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고, 때맞춰 그의 ‘레이더’에 움직이는 물체들이 감지됐다.
헬기를 보고 신호탄을 쐈던 자들이 푸른빛의 재규어를 보고서 접근 중이었던 것이다.
그러더니.
쐐애애액!
제법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정수 창 여섯 발이 정우와 재규어를 덮쳤다.
크릉!
방금 막 땅바닥에 발을 디딘 재규어는 눈에서 시퍼런 안광을 흘리며 전방으로 급가속을 했고, 그 위에 올라타 있던 정우는 순간 기시감을 느꼈다.
쉬아아아앗……!
놈이 급가속을 하는 순간, 관찰자 테르가와 싸울 때 냄새가 보여줬던 속도감이 거의 그대로 재현됐으니까.
‘읍……!’
마치 의식이동을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의 압력이 두 존재를 짓눌렀고, 찰나의 순간 뒤엔 정우의 주변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억?”
“엉……?”
“뭐, 뭐지.”
각자 눈에서 파란 빛을 뿜어내고 있는 6인의 남녀.
복장은 제각각이었지만 그래도 색깔은 어두운 계열로 통일한 흔적이 엿보였다.
아마도 야간 전투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방편일 거다.
물론 눈을 감아도 사물 인식이 가능한 정우와 태생이 야행성 동물인 재규어에겐 별 의미 없는 전략이었다.
캬오오……!
정우를 태운 재규어는 이미 6인의 습격자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은 상태였고, 놈이 길게 울음을 빼자 여섯 중 셋이 도주를 선택했다.
헬기에서 야생 재규어가 뛰어내린 것만 해도 충분히 긴장해야 할 돌발상황이었는데 그 위에 웬 사내가 타 있기까지 하니 더는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파팟, 팟!
‘피라미들이었군.’
정우는 어둠 속으로 빠르게 스며드는 중인 세 탈주자를 잠시 바라봤다.
물어볼 것도 없이 각자 전력질주 중인 걸 텐데, 적어도 정우의 기준에선 너무 느렸기 때문이다.
어차피 한참 뒤에 쫓기 시작해도 금방 잡을 수 있는 녀석들이다.
정우는 탈주자에게서 시선을 거둔 뒤, 용케 전장에 남아 있는 세 용자를 하나씩 훑었다.
여자 하나에 남자 둘.
투지가 있어서 이곳에 남았다기보다는 믿기 어려운 광경 그 자체에 발이 묶인 눈치였다.
셋 다 입을 쩍 벌린 채 보호막조차 감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크르릉…….
여전히 야성이 번득이는 재규어는 초식동물 같은 모습으로 굳은 세 인간을 번갈아 봤다.
그럼에도 결코 먼저 공격을 하진 않았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온 맹수 특유의 감성이라고 봐야 할 거다.
자신보다 더 강한 정우가 가만히 있는 걸 보고서 공격본능을 억누르고 있는 거였다.
야생에선 길에 놓인 먹잇감조차 전투력이 상위에 있는 짐승들이 먼저 먹고, 상대적 약자는 그들이 먹고 남긴 걸 챙겨가지 않던가.
게다가 이 세계에서 생물을 죽이면 단순히 고기만 나오는 게 아니라 정수가 떨어진다.
재규어로선 자신이 정우의 몫을 탐냈다간 살아남지 못할 거란 걸 모를 수가 없었다.
대신에.
크릉, 끄릉.
계속해서 입을 쩍 벌렸다 닫기를 반복하며 정우에게 불안하단 표시를 했다.
이에 정우는 냄새에게 하던 것처럼 재규어의 이마를 살짝 쓰다듬은 뒤, 오른손으로 군청색 정수 창을 빚어냈다.
콰드드드득!
여느 정수 창과는 달리 생성되는 소리부터가 다르다.
지독할 정도의 밀도 탓에 기이한 무늬가 그려진 제대로 된 창이었으니까.
“헉…….”
“……?”
이를 본 습격자 3인은 상대가 이전에 봐 왔던 치안국의 요원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걸 직감했고, 이를 깨닫자마자 바닥에 머리를 처박으며 사정을 했다.
“사, 살려주십시오!”
“무엇이든 도와드리겠습니다!”
“제…… 제발 목숨만은…….”
그리고 때맞춰 정우가 그토록 기다리던 첫 번째 순간이 찾아왔다.
팟.
세 사람을 훑어보던 그의 시야에 이질감이 느껴지는 문구가 새로 떠오른 것이다.
「구원자, 인간 님의 순위 평가가 완료되었습니다.」
| 현재 인간 님이 체류 중인 지역은 ‘미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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