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18
322화. 자유거래(2)
* * *
완전히 시동을 꺼 버린 차량 대열.
민구는 발치에 수북이 쌓인 청소부와 장어들의 사체를 발로 밀어내며 중얼거렸다.
“멍청한 놈들. 예상을 못한 건 아니다만.”
그러곤 북서쪽으로 길게 뻗은 횡단로를 바라봤다.
“…….”
조금 전 습격해 온 침입자들이 전부일 리 없다.
모르긴 몰라도 저 안쪽으로 계속 이동하다 보면 2차, 3차 기습이 이어질 거다.
어쩌면 이미 다음 공격대가 몰려오는 중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이봐.”
민구가 러시아 측의 차량 대열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을 건네자 저편에서부터 이반 스트라호프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더 못 간다.”
“왜?”
“당신이 저들의 가족을 다 죽일 테니까.”
“그걸 알고서 날 데려왔던 게 아니었나? 애초에 이 길의 존재 이유도 시베리아의 진입로를 닫기 위해서였잖아?”
“…….”
민구의 물음에 이반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초소’를 지키고 있다던 근무자들의 목숨까지 바칠 생각은 없었다는 뜻이리라.
아마도 초소 측의 정예 각성자들이 민구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 어쩌자는 거지? 여기 앉아서 죽을 때만 기다리고 있을 건가?”
민구의 두 번째 물음.
이에 이반이 차량 대열 방향을 돌아봤다.
“예카테린부르크로 돌아가서 재정비를 할 거다.”
“뭐?”
민구는 눈썹을 꿈틀대다가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내가 너희를 순순히 보내 줄 거라고 판단한 근거는?”
“어차피 우리가 없으면 1번 초소까지도 가지 못해. 설마 저걸 타고서 수백 킬로를 달릴 생각은 아니겠지.”
슥.
이반이 말한 ‘저것’은 다름 아닌 냄새였다.
한때 행성 최강자 박정우를 태운 채 우주적 존재들과 싸워 온 영물(靈物) 말이다.
“…….”
이반의 말에 민구는 잠시 헛웃음을 지었다.
하기야 상대는 민간인인 데다가 억 단위의 정수를 지닌 짐승을 본 적도 없지 않겠는가.
“후우.”
민구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음엔 물자를 실은 차량 중 하나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홰앳!
그러자 그의 손끝에서부터 시퍼런 정수 실 한 가닥이 뿜어져 나왔고, 곧 5톤 트럭 하나가 두부처럼 썰려 나갔다.
투우웅!
짐이 잔뜩 실려 있던 적재함이 땅바닥에 처박히며 포격음 수준의 굉음을 낸다.
“무, 무슨 소리야?”
“이번엔 또 뭔…….”
앞다퉈 차에서 뛰어내리는 민간인들.
다들 또 괴물이 나타난 줄 알고서 횡단로 바깥쪽을 정신없이 둘러봤으나 당연히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고, 이내 모두의 시선이 대열 최전방의 이반과 민구에게 쏠렸다.
“내가 너희를 가만히 두고 있던 건 그저 휴식이 좀 필요했기 때문이야. 시베리아 안쪽으로 진입하게 되면 단 한시도 쉴 수 없을 테니까.”
민구는 이 말과 함께 자신의 뒤편에 잠자코 있던 냄새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이 녀석의 힘을 빌리면 몇백 킬로 정도는 1시간 이내에 주파할 수 있다. 너희 따위의 도움이 없어도 진입로까진 충분히 갈 수 있다고.”
민구가 이 말과 함께 눈을 파랗게 빛내자 이반을 포함한 러시아인들이 몸을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이어지는 민구의 대사.
“적어도 내가 진입로를 닫을 때까진 이 길이 남아 있어야 할 거 아닌가? 이건 내 복귀로이기도 하니까.”
“그, 그렇지.”
이반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고, 민구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묵직한 목소리를 냈다.
“그래서 너희가 필요할지도 몰라. 아무래도 가족들이 살아 있다는 걸 알면 좀 더 순순히 굴지 않겠나.”
초소의 근무자들을 말하는 거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들은 민간인들이 한꺼번에 입을 열었다.
“오……?”
“근무자들을 살려 주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럼 엄밀히 말해서 적이 아닌 거잖아?”
빠르게 바뀌는 여론.
폐쇄 절차 개시 이후 한순간도 주도권을 가져 본 적이 없는 자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보이면 그것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것이다.
의심하고 경계해 봐야 자신들의 힘으론 결과를 바꿀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탓.
반면에 이들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는 이반 스트라호프는 여전히 의구심이 남아 있는 듯했다.
“정말로 당신이 초소를 보존해 준다고 해도…… 진입로가 모두 닫힌 이후에는?”
초소의 존재 의의가 사라지면 그 안의 근무자들도 결국 죽일 거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그 이후엔 나도 몰라.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까.”
민구는 거짓 없이 대답했다.
만에 하나 시베리아에 자리 잡은 그것이 이 행성에 남은 마지막 진입로라면 더 이상의 유혈 사태를 벌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베리아 이후에도 계속해서 무언가와 싸워야 한다면…….
‘그러면 횡단로를 역주행하면서 근무자들을 다 죽이는 수밖에 없겠지.’
따라서 지금쯤 미 대륙을 누비고 있을 박정우의 행보가 관건이라고 봐야 할 거다.
그곳의 진입로 제거 상황에 따라 이곳의 전개도 달라질 테니까.
‘알아서 잘하고 있겠지.’
민구의 시선이 이공간에 잠식된 허공으로 향한다.
박정우가 어떤 괴물인지 잘 알기에 이젠 녀석이 걱정되기보다는 그가 체류 중인 지역의 안위가 더 걱정됐다.
과연 놈을 감당할 수 있는 세계가 존재는 할까?
“더 할 말이 없다면 다시 출발하지. 시간이 많진 않으니까.”
허공에서 눈을 떼어 낸 민구가 이반을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반이 차량 대열의 선두를 향해 시동을 켜라는 신호를 보냈다.
* * *
오후 10시 23분.
캔자스 외곽의 평지.
머리 위에선 헬기의 기동음이 요란하게 났고, 발밑에선 땅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재규어의 거친 호흡이 들려왔다.
그리고 십여 미터 전방에선.
“헉, 허억!”
“학, 학……!”
죽을힘을 다해 현장을 벗어났던 탈주자 세 사람이 여전히 달음질 중이었다.
‘이 근처인가 보군.’
정우는 아직까지도 세 사람이 나란히 달리는 걸 보고서 근방에 무법자들의 아지트가 있음을 직감했다.
한국에서 청와대의 벙커를 찾기 위해 경비대원들을 도망치게 놔뒀던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인간이 사지에 내몰리면 본능적으로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게 되는 것이다.
파팟!
갑자기 세 사람이 속력을 더욱 높인다.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음이 틀림없었다.
이에 정우도 ‘레이더’를 펼쳐서 근방에 무엇이 있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화아아앗!
그러자 전방 수백 미터 지점에 자그마한 농가 하나가 감지됐고, 그 밑에 지하실로 추정되는 20여 평의 공간까지도 훤히 들여다보였다.
‘저긴가.’
투두두두두……!
맥과 마취의가 탄 헬기가 계속해서 따라오고 있었기에 저쪽도 지금쯤이면 뭔가가 접근 중임을 알았을 거다.
“슬슬 따라잡지.”
정우의 말에 그를 태운 재규어가 날카로운 울음을 냈다.
캬릉!
그러더니 전신에서 파란빛을 뿜어내며 추적 대상과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
쐐애애애애액!
마치 쏜살에 올라탄 듯 어마어마한 속도감이 정우를 감쌌고, 찰나의 순간이 지난 뒤엔 도망자들이 그와 재규어의 뒤편에 있게 됐다.
“헉.”
“……!”
“미친.”
저절로 멈춰진 세 탈주자의 다리.
그리고 이때쯤, 정우가 레이더로 탐지했던 아지트 쪽에서 인간 넷과 네발짐승 하나가 달려 나왔다.
아마 탈주자들의 기척을 느끼고 나왔다기보다는 헬기 소음 때문에 이것을 격추하려고 출동한 걸 거다.
“여기가 너희 아지트인가?”
정우의 물음에 세 사람 모두 입만 뻥긋거리며 무어라 대답하지 못했고, 그사이 건물에서 뛰쳐나온 녀석들이 정우의 앞쪽까지 접근해 왔다.
“뭐, 뭐야?”
“짐승이 있는데? 표범이야?”
4인조에 도베르만 하나.
이들은 무려 열대 우림 맹수를 탄 동양인이 눈앞에 있는데도 쉽사리 위축되지 않았다.
나름대로 산전수전 겪어 온 자들이라는 거다.
그러나 정우의 힘을 어느 정도 아는 탈주자 3인조는 사색이 되어 이렇게 외쳤다.
“다 죽기 전에 전부 불러와! 완전 미친놈이라고……!”
“신호탄!”
그리고 이를 들은 4인조 중 하나가 정우 방향으로 한 발자국 나섰다.
척.
한눈에 봐도 장내의 최고 실력자였다.
덩치가 유난히 큰 건 물론 갑작스런 돌발 행동을 했음에도 다른 일행이 전혀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봐. 저 헬기 좀 착륙시키지 그러나? 상당히 신경 쓰이는데. 안에 뭐가 들었나 궁금하기도 하고.”
덩치가 대륙 최강자, 아니 어쩌면 행성 최강자일지도 모를 존재를 향해 말을 건넨다.
이에 정우는 약 50미터 상공에서 활공 중인 헬기를 슬쩍 바라봤다.
그러자.
타앗!
그의 눈동자가 움직이기 무섭게 덩치가 제법 빠른 속도로 몸을 날려 왔다.
정말이지 지겨울 정도로 흔한 수법이지만 그만큼 효과가 있는 선공법이었다.
시선을 잠시 돌려 두고 그사이에 신체 강화를 이용해 거리를 좁히는 것 말이다.
“…….”
물론 수준이 비슷한 상대에 한한다.
쏴앗!
덩치가 달려듦과 동시에 정우의 신체가 일순 파란빛을 내며 깜빡거리는 것처럼 보였고, 그다음엔…….
“억.”
“……?”
“뭐, 뭣.”
둘을 제외한 모두가 눈을 크게 뜨며 신음을 흘렸다.
꾸드득.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덩치가 박정우의 왼손에 붙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우, 우웁!”
목이 상당히 강하게 조여 오는지 허공에 들린 덩치의 두 발이 심하게 요동쳤다.
그리고 정우는 그런 상대를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정도 수준으로 무법자를 자처할 수 있는 곳이라니…… 확실히 편하게 잘 순 있겠군.”
“……?”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대사에 무법자들의 동공이 흔들렸고, 이때쯤 덩치의 고개도 옆으로 크게 기울었다.
뚜둑.
목이 부러진 탓이었다.
“아지트는 저게 전부인가?”
덤덤하게 발음된 정우의 대사 밑으로 푸욱, 하는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덩치의 시체가 땅바닥에 떨어지면서 낸 소리였다.
“아…….”
무법자들은 방금 자신들이 본 게 뭔지 고민하면서 서서히 뒤로 물러섰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야 이젠 일상에 가까웠지만 조금 전 그건 뭔가 다른 느낌이었으니까. 왜인지 사람끼리 싸운 것 같지가 않았다.
그르릉…….
이 와중에도 아지트 측의 도베르만이 투기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것도 곧 재규어의 위협 한 번에 사그라졌다.
캬오오!
* 시끄러워.
지금은 비록 박정우의 승용물 신세로 전락했지만 이 짐승은 한때 브라질의 순위권에 들었던 존재다.
철저한 약육강식의 법칙이 적용되며 파견된 존재 대부분이 6시간 이내에 사망했다던 바로 그 브라질 말이다.
캬악!
재규어가 또다시 입을 길게 찢으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자 끝내 도베르만이 꼬리를 말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애초에 정우에겐 이들의 존재가 길가의 잡초와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이었기에 재규어와 도베르만의 기 싸움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이 근처에 아지트가 이게 전부냐고 물었다.”
그가 무법자들에게 재차 질문을 던지자 다음번엔 음성 대신 다른 게 쏘아져 나올 것임을 직감한 한 사내가 입술을 바르르 떨며 답을 내놨다.
“그, 그렇습니다. 적어도 이 구역엔 이곳이…….”
그리고 때맞춰서.
쿠궁!
두드드드…….
상당히 먼 곳에서부터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크기의 진동과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
“또 무슨…….”
무법자들의 반응으로 봐선 놈들이 숨겨 둔 비밀 병기 따위는 아닐 것이다.
크릉.
방금 전까지 도베르만을 압박하던 재규어조차도 심상치 않은 진동에 주춤했다.
‘뭐지?’
정우 역시 의아한 건 마찬가지.
아직까진 레이더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고 있었고, 그렇다고 패스파인더의 정수 표식이 회전 중인 것도 아니었다.
즉, ‘용’이 이쪽을 인지하고서 안부를 물으러 오는 건 아니라는 거다.
그러자 간만에 그의 의식 속에서 평가관 ‘다467’이 말을 걸어왔다.
-구원자 인간 님의 부피가 한계치에 근접했습니다. 다수의 침입자가 접근 중입니다.
‘다수의 침입자?’
이 시점에 침입자라고 한다면 궤멸자들 아니겠는가.
이에 정우는 사태 파악이 끝나자마자 보호막을 넓게 전개해 저 멀리 보이는 무법자들의 아지트를 감쌌다.
파아아앗!
“잠 한 번 제대로 자기 어렵군.”
정우의 이 말이 끝나자마자 그가 펼쳐 둔 보호막 바깥에서 강렬한 대지 폭발이 연달아 일어났고, 곧 땅 밑에서부터 육중한 실루엣이 하나둘씩 솟구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