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20
324화. 자유거래(4)
* * *
“……맙소사.”
토드 파커.
44세 남성, 마취 전문의.
그는 박정우가 재규어에 몸을 싣고 오는 걸 보며 침음을 흘렸다.
그러나 결코 상대가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눈으로 보고 있는 광경이 놀라웠을 따름이다.
막 전투를 마친 박정우의 뒤편으론 토막 난 궤멸자들이 무질서하게 엉켜 있었다.
잿빛 피부를 가져서일까. 놈들이 쌓아 올린 거대한 ‘더미’는 마치 오래된 유적처럼 보였고, 그 사이에서 유유히 걸어 나오고 있는 박정우는 신화 그 자체같이 느껴졌다.
실제로도 저 인물이 지구를 구원할 유력한 존재라고 하니 신화라는 표현이 전혀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저자가 정말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다면 신화보다도 더한 것이 될 테니까.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뒤늦게 헬기에서 내린 조종사, 샬롯 터너도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운 궤멸자들의 사체 더미와 박정우를 번갈아 보며 우려에 찬 목소리를 냈다.
다만 그녀 역시 이 비현실적인 풍경 속에 자신이 속해 있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느낀 것뿐이었다.
“이제 이 사람들이 죽고, 저 남자는 잠에 들겠지.”
토드가 무법자 무리와 정우를 번갈아 가리킨다.
물론 박정우의 완전한 휴식을 위해선 약을 투여해야만 할 거다.
마약에 기대서 살아가는 절대자라니…… 토드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이렇게 대화를 하는 사이, 마침내 정우가 맥 테일러의 보호막 근처까지 다가왔다.
“제법이군.”
보호막 안쪽의 인원이 전부 생존 중인 걸 확인한 정우는 짤막하게 한마디를 했다.
맥이 전투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나머지 일행을 온전히 보존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각 궤멸자는 근처에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산 것의 항상성을 떨어뜨리는데, 그런 괴물이 일곱이나 되지 않았던가?
웬만한 밀도의 보호막이 아니고서는 민간인인 토드와 샬롯까지 지켜 내기는 어려웠을 터였다.
“……다음은 뭐지?”
맥이 정우의 ‘칭찬’을 은근슬쩍 흘려 넘기며 다음 화제를 꺼낸다.
이에 정우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무법자들을 눈으로 훑었다.
“쓸 만한 녀석이 없다면 전부 정수로 바꾼다.”
“……!”
“어?”
대번에 경악하는 무법자 무리.
그러더니 저마다 눈을 부릅뜨며 목에 핏발을 세웠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었으면서 왜 여태 살려 둔 거야?”
“미, 미친 새끼.”
“쓸 만한 녀석이라니…… 그게 무슨 의미지?”
그나마 마지막 사내는 이 와중에도 침착하게 살길을 모색 중인 것 같았는데, 이어진 정우의 대사가 일말의 희망마저 차단해 버렸다.
“의사.”
“……?”
“여기에 의사가 있다면 녀석은 살려 주겠다.”
“다, 다른 건? 하다못해 짐꾼이라도 필요하진 않나? 한 명이라도 살리자고.”
그러나 이내 정우의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아주 충직한 성향의 짐꾼이라면 한 명 정돈 있어도 나쁘지 않겠으나, 무법자 출신 중에 충신 타입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이 안에 의사는 없는 건가?”
정우가 짐꾼이라도 하나 건지라는 제의를 무시하고 재차 묻자 무법자들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 어떤 의사가 치안국이 비호해 주는 도시 생활을 마다하고 유랑 생활을 하고 있겠는가.
게다가 무법자라는 그룹은 기본적으로 전과자들의 집합이었다. 물론 어딘가엔 의술을 지닌 무법자가 하나쯤은 존재하겠지만 적어도 이 자리엔 없었고, 따라서…….
“제기랄.”
“그럼 뭐? 우린 여기서 다 죽는 거야?”
무법자들이 반신반의하는 목소리로 투덜대는 순간 세찬 파공음이 공기를 갈랐다.
쏴아아앗!
정우가 순식간에 정수 칼날을 뽑아 전방의 무법자들을 한꺼번에 베어 낸 거다.
“헉.”
“……아.”
민간인인 토드와 샬롯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술을 꿈틀대던 머리통들이 바닥으로 우르르 떨어져 내린 것에 충격을 받았고, 맥 테일러는 정우가 휘둘렀던 칼날의 크기와 밀도에 감탄했다.
반면 재규어는.
* 배고파.
땅바닥에 핏물을 쏟기 시작한 고깃덩이들을 보며 혀를 날름거렸다.
그러자 이를 본 정우가 무법자들의 정수를 흡수하면서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툭 뱉었다.
“양껏 먹어 놔. 내일은 고기 구경을 하기 어려울 테니까.”
일찍이 맹수 구원자인 냄새를 끌고 다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카릉.
식사 승인을 받은 재규어는 더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이 시체들 사이로 뛰어들어 커다란 아가리를 벌렸고, 이를 본 토드와 샬롯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맥을 바라봤다.
당신이 어떻게 좀 해 볼 수 없냐는 거다.
꾸두득, 뽀득.
그사이 고깃덩이에 입을 파묻은 재규어가 듣기에 끔찍한 소리를 내며 식사를 시작했다.
“우워어억!”
끝내 샬롯이 뒤편으로 달려 나가더니 구토를 하고 만다.
토드도 역겹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리를 뜨진 않았다.
아무래도 의사다 보니 일반인보단 비위가 좋았으니까.
“이제 건물 안쪽이 비었다.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 채비를 하지.”
재규어의 식사 장면을 한동안 바라보던 정우가 먼저 발걸음을 뗐고, 맥은 그를 따라 움직이면서 토드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너무 늦기 전에 샬롯을 데리고 오라는 뜻이었다.
굶주린 재규어가 그녀까지 먹이로 인식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 * *
오후 10시 35분.
무법자들의 아지트는 그야말로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지상엔 널찍한 마루와 침실 두 개, 화장실 하나, 다용도실 하나, 여기에 차고까지 붙어 있었다.
지하는 벽이나 가림막 없이 창고로 쓰이고 있었는데, 두꺼운 매트리스가 여럿 놓인 걸로 봐선 이곳 역시 침실을 겸하던 것 같았다.
“너희가 여길 써라. 난 지상에서 묵지.”
정우가 지하실 바닥에 놓인 매트리스를 쳐다보며 말하자 샬롯이 미간을 찡그렸다.
“어차피 위에 침실이 하나 더 있잖아요? 마루에서 자도 되는 거고……. 굳이 여길 쓸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그러자 정우의 입에서 예상외의 답변이 튀어나왔다.
“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네……?”
“만약 내가 잠든 사이 예상보다 강한 녀석이 기습을 해 온다면 대응을 제대로 못할 가능성이 있어. 아마 아주 먼 곳에서부터 정수 파동이 날아들거나 해서 지상층을 통째로 지워 버리겠지.”
“…….”
“하지만 지하에 있으면 적어도 나와 함께 죽을 일은 없을 거다. 게다가 만약 새 친구가 너희를 원한다면 환승이란 선택지까지 생길 테고.”
다시 말해서 만에 하나 정우가 기습을 당해 누군가에게 죽게 된다면 지하에 숨어 있다가 새 최강자에게 붙으라는 이야기였다.
“그, 그럴 수도 있겠네요.”
샬롯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정우의 말에 수긍했고, 이를 가만히 듣던 토드가 잽싸게 취침 준비를 시작했다.
“그럼 테일러 씨와 아까 그 짐승은…….”
샬롯의 두 번째 질문.
이에 정우의 시선이 지하실 구석에 서 있는 맥 테일러에게 향했다.
“건물 밖에서 재규어와 함께 교대 근무를 서게 될 거다.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지붕을 날려. 그러면 알아서 일어날 테니까.”
“……명심하지.”
이렇게 해서 취침 작전 회의가 아주 간단히 끝났고, 곧 정우가 토드에게 따라오란 손짓을 하며 지상층으로 가는 계단을 밟았다.
수면에 대비한 약 투여를 위해서였다.
그러자 샬롯이 두 사람이 사라지는 걸 지켜보다가 황급히 맥 테일러를 붙들었다.
“정말 저 남자를 끝까지 도울 거예요?”
“……그럼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이젠 계약으로 묶인 상태라 쿠데타도 일으킬 수 없어요. 그럴 생각도 없고.”
“다른 요원은요? 아직 순위권자들이 몇 명 남아 있지 않아요? 저 사람이 잠든 사이에 조용히 불러오면…….”
이에 계단 쪽으로 몸을 향한 채 고개만 돌리고 있던 맥이 정색을 하며 샬롯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 사람들은 저자의 반도 따라갈 수 없어요. 적어도 행성 구원에 있어선 박정우가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아니잖아요.”
여러 의미가 담긴 샬롯의 대사.
맥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말했다.
“행성 구원이라는 건 사람이 아니어야 가능한 임무가 아니었을까요. 만약 저였다면 아까 그 자리에서 바로 분해됐을 겁니다.”
바깥에서 일곱 마리의 궤멸자와 조우했던 순간을 이야기하는 거였다.
“그, 그래도.”
“이해하려고 들지 마십시오. 저조차도 가끔은 저 사람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으니까. 하지만 확실한 건 대체할 수도, 대체되어서도 안 되는 자라는 거죠.”
맥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다시 계단 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러더니 나지막한 음성으로 뒷말을 덧붙였다.
“차라리 다행입니다. 저런 괴물이 실제로 존재해서. 전 저렇게 될 수 없었을 겁니다. 아니, 저렇게 되고 싶지 않아요.”
* * *
같은 시각, 러시아 ‘횡단로’의 어딘가.
민구는 드디어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불빛과 인공물을 보게 됐다.
자그마한 랜턴과 캠핑 의자, 군청색 천막 따위를 말이다.
“저게 당신이 말한 1번 초소인가?”
그가 이렇게 묻자 맞은편 좌석의 이반 스트라호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한 것보다 많이 초라한 모습인가?”
“아니, 어차피 전쟁터잖아. 뭘 세워 봐야 금방 무너졌겠지.”
민구는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는 1번 초소를 담담한 눈으로 살폈다.
이 초소라는 건 사실상 야영지나 다름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전황에 따라 초소 위치를 옮겨 가며 근무하지 않았을까 싶다.
초소 근처에 적갈색 지프 두 대가 세워져 있었는데, 한 대에 여분의 천막이 담긴 걸 보니 거의 확신하게 됐다.
여차하면 현 위치를 포기하고 새 초소를 세울 수 있도록 준비해 둔 것이다.
그만큼 급박한 상황이 자주 찾아왔다는 의미이리라.
“근무자는 저게 전부인가?”
민구가 손가락을 들어 초소 진입부에 서 있는 두 사람을 가리킨다.
덩치가 상당한 사내 둘이었는데, 각자 내뿜는 기운이 범상치 않았다.
“그렇다. 2인 1조가 원칙이고, 좀 더 안쪽에 있는 초소는 3인 근무도 하지.”
이반은 이렇게 대답하고서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신호탄을 쐈다.
피유웃!
특이 사항이 없다는 신호였으나, 1번 초소의 근무자들은 이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듯했다.
차량 대열이 백여 미터 거리까지 다가오자 전신에서 푸른빛을 내며 전투 태세에 돌입한 거다.
“날 감지했나 보군.”
민구가 이 말과 함께 마찬가지로 눈에서 시퍼런 안광을 뿜자 이반이 기겁을 하며 손을 내 둘렀다.
“주, 죽이지 않는다고 했잖아?”
“물론이다.”
팍!
짤막한 답변을 남기고 차량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민구.
그러자 1번 초소의 두 근무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각자 정수 칼날을 뽑아 들었다.
“신분을 밝혀라!”
“뭐하는 녀석이지?”
그러면서도 바로 공격을 해 오지 않는 이유는 정체불명의 방문객이 보급 팀을 산 채로 끌고 왔기 때문이다.
각성자 하나가 아쉬운 때라 혹시나 횡단로 일을 도우러 온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이 있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좋은 일’이란 게 그리 쉽게 일어나던가.
쐐애애앳!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허공을 가른 민구의 손끝에서부터 정수 실이 뿜어져 나갔고.
츠앗!
곧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두 근무자의 정수 칼날이 가로로 잘려 나갔다.
“어……?”
“억.”
믿기지 않는 광경에 제자리에서 꿈쩍도 못하는 두 사내.
그리고 이들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민구의 무심한 음성이 쏘아져 나왔다.
“가족들 앞에서 목이 떨어지고 싶지 않으면 지금부터 내 말을 똑똑히 들어.”
“……?”
“횡단로에 투입되지 않은 러시아의 각성자가 얼마나 더 있지?”
“뭣?”
“놈들을 전부 이리로 불러들여. 내 제안을 받아들이면 너희들의 가족을 모두 살려 주고, 저 안쪽의 진입로를 내가 직접 닫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