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21
325화. 자유거래(5)
* * *
“진입로를 네가 닫겠다고?”
“예비군을 전부 불러들이라니…… 무슨 생각이지?”
민구의 제안에 두 근무자가 각기 다른 대사를 내뱉었다.
아마도 평소 생각하던 ‘우선순위’가 같지 않았기 때문일 거다.
어쩌면 나이나 출신 성분과도 관련이 있을까?
“…….”
민구는 습관적으로 두 근무자의 인상을 살폈다.
진입로에 먼저 관심을 보인 자는 50대 중반의 남성이었다.
푸근하게 늘어진 볼과 달리 눈빛이 꽤 무섭긴 했지만 유부남 특유의 중후함이 느껴졌다.
반면 예비군이란 단어를 발음한 자는 30대 초반의 사내.
아들인 정우와 엇비슷한 나이다.
오른쪽으로 살짝 휜 코와 얇은 입술이 매정한 인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여보……!”
곧이어 보급 팀 대열에서 애가 탄 듯한 목소리가 쏘아져 나왔는데, 이에 반사적으로 눈을 번쩍 뜬 중년 남자와 달리 30대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보급 팀을 통해 면회를 올 사람이 없다는 뜻이리라.
‘저쪽은 가진 게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군.’
민구는 30대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애초부터 가족이 없었거나 난리 중에 전부 잃어버린 경우일 거다.
따라서 이 사내의 우선순위엔 가족 대신 국가라든지 자존심 등이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탓!
이윽고 보급 팀 사이에서 실루엣 두 개가 툭 튀어나왔다.
사위가 어둑한 와중에도 분명히 보이는 긴 머리칼.
각각 50대, 20대로 보이는 두 여성이었다.
아마도 중년 근무자의 아내와 딸일 것이다.
“조, 조심해! 저쪽으로 돌아서 와!”
아니나 다를까, 민구의 앞에 서 있던 50대 근무자가 기겁을 하며 손을 휘둘렀다.
불청객을 피해서 옆으로 오라는 거다.
그러곤 모든 무장을 해제한 채 가족들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파아아앗!
밤공기를 시퍼렇게 가르며 나아가는 중년 사내.
“…….”
민구가 씁쓸한 눈빛으로 가족 상봉 장면을 보고 있자 여전히 제자리에서 정수 칼날을 쥐고 있는 30대 남성이 고개를 까닥였다.
“이봐, 아직 대화가 안 끝났잖아.”
“말해.”
“우리야 여길 지켜야 하니 네가 살려 둬야 할 필요가 있다고 쳐도, 예비군들은?”
“뭘 걱정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민구가 무심한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자 사내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네놈 속셈이야 뻔하잖아. 전부 먹어 치우겠다는 거 아닌가?”
“그래서 그게 왜 문제지?”
이제 제법 ‘구원자다운’ 말을 뱉게 된 민구.
그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보이자 도리어 상대의 말문이 막혔다.
“너희의 그 예비군이란 녀석들이 날 죽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그런 거라면 더더욱 불러내야지.”
“……?”
“이 나라가 할 수 있던 최선은 기껏해야 횡단로를 유지하는 수준이었잖아. 이 문제를 해결할 힘이 있었다면 진즉에 움직였을 거 아니야? 오히려 내 덕분에 파멸은 피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하는데.”
“뭐?”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사내가 눈을 파랗게 밝혔지만 막상 민구에게 덤벼들진 못했다.
조금 전 그의 공격 한 번에 정수 칼날이 잘려 나가던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어차피 다 죽어. 그렇다고 너희를 욕보일 생각까진 없다. 이 횡단로를 지켜 내고 있던 점에 대해선 진심으로 경의를 가지고 있으니까.”
민구는 이 말과 함께 저편에서 가족들을 부둥켜안고 있는 중년의 근무자를 바라봤다.
그러곤 다시 젊은 각성자와 시선을 맞댔다.
“함정을 파라는 게 아니야. 난 그 예비군이라는 녀석들이 오든 말든 진입로를 닫으러 갈 거다.”
“…….”
“하지만 이렇게까지 해서 횡단로를 유지할 정도의 민족이라면 자기 나라의 진입로 정돈 본인들이 직접 닫고 싶어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자신이 있다면 합공을 하든 뭘 하든 나를 쓰러뜨려. 그리고 진입로를 직접 닫아라.”
“오만방자하군. 저 안쪽엔 우리보다 훨씬 강한 자들이 즐비해. ‘진짜 지옥’에 들어가 있는 괴물들이지. 네놈이 감히 도전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가? 네 말이 사실이라면 난 오늘 이 땅에서 죽게 되겠지.”
민구는 어깨를 으쓱하고선 횡단로를 좌우에서 감싸고 있는 이공간으로 눈을 돌렸다.
“이런 초소가 총 몇 개나 있지?”
“일곱 개다.”
“보나 마나 저 안쪽에는 더 강한 침입자들이 버티고 있겠고.”
“…….”
사내는 여전히 민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을 꾹 닫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시간이 부족하겠는데.”
턱을 쓰다듬으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는 민구.
그러자 그를 따라 이공간 어딘가를 쳐다보던 사내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일 찾아올 침입자 말이야. 오늘 기어들어 온 녀석까지는 어떻게든 상대를 할 수 있겠지만…… 9일 차는 장담할 수 없어.”
현재 시각, 오후 10시 40분.
9일 차가 개시될 때까지 9시간 20분 정도가 남았다.
과연 저 시간 안에 횡단로의 끝자락까지 닿을 수 있을까?
거리도 거리지만 나머지 여섯 개 초소와의 마찰, 각 구간에서 맞닥뜨리게 될 침입자들과의 전투도 큰 문제다.
제시간에 횡단로 끝의 진입로에 닿는 건 결코 쉽지 않을 터였다.
“이제 와서 말을 바꿀 생각은 아니겠지? 네가 분명 말했다. 저 사람들을 전부 살려 놓겠다고.”
슥.
30대 각성자가 보급 팀 사이에 섞여 있는 민간인들을 가리킨다.
저들의 호송 책임이 민구에게 있다는 이야길 하고 있는 거였다.
이에 민구는 보급 팀 방향을 흘깃 본 뒤에 1번 초소를 둘러봤다.
“약속은 무조건 지킨다. 하지만 저 사람들을 데리고 7번 초소까지 가는 건 곤란하겠는데.”
“뭣?”
“7번 초소에 닿을 때쯤이면 9일 차 진입로가 열릴 거야. 그 안에서 나타날 괴물이 나조차도 찢을지 모르는데 저들이라고 별수 있겠나? 여기 머무는 게 최선이다.”
“무슨 개소릴…….”
“두말할 것 없이 이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야. 민간인 수십을 진입로 코앞까지 끌고 가는 것보단 초소 근무자들을 살려서 이리로 보내는 게 성공 확률이 높지.”
“그건 네가 진입로 폐쇄에 성공한다는 가정하에 가능한 일 아닌가?”
꽤 예리한 사내의 지적.
민구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내가 진입로 폐쇄에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야지.”
“……뭐?”
“넌 러시아의 구원자 채널을 사용할 수 있잖아. 예비군들을 호출하면서 나머지 초소에 전달해. 횡단로 끝으로 가려는 자가 있으니 미리 길을 터 두는 게 좋을 거라고.”
* * *
새벽 3시 26분.
캔자스 주 북동부 외곽의 무법자 아지트 근처.
미 대륙의 2위 구원자 맥 테일러는 늦은 저녁을 먹는 중이었다.
육포와 생수, 그리고 아지트 지하의 창고에서 찾아낸 초콜릿.
오도독.
그가 직사각형의 초콜릿을 한 입 베어 물자 마치 오돌뼈를 씹는 듯한 소리가 크게 났다.
초콜릿이 얼어 있던 탓이었다. 무려 발전기와 연결된 냉장고 안에서 발견된 음식이었으니까.
크릉.
씹는 소리가 상당히 컸는지 기척을 죽인 채 바닥에 엎드려 있던 재규어가 고개를 들었다.
이에 맥은 자신도 모르게 씹기를 멈추고서 무거운 침을 삼켰다.
피차 서로를 공격하기 껄끄러운 입장이긴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으니 종의 차이가 여실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쩌억.
한동안 맥을 바라보던 재규어가 입을 길게 찢으며 하품을 한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재규어의 몸길이는 약 1미터 80센티.
같은 고양잇과 맹수인 호랑이에 비하면 한참 작긴 했지만 위협감을 느끼기엔 충분한 덩치였다.
게다가 지금은 어둠 속이 아닌가.
인간은 밤눈이 어두운 편이다.
스윽.
이어서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하자 제아무리 대담한 맥이라고 해도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수면 위로 드러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는 상어의 지느러미처럼, 재규어의 실루엣도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다시 나타나곤 했다.
“……뭐냐.”
맥의 손에 들린 초콜릿이 서서히 녹기 시작한다.
그사이 재규어는 맥의 주변을 벌써 네 차례나 돌고 있었다. 시퍼런 안광을 흘리면서 말이다.
‘이제 와서 한판 해 보자는 건 아닐 테고.’
맥 테일러는 자신도 모르게 박정우가 잠들어 있을 아지트 쪽을 슬쩍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재규어를 향해 눈을 돌리는 순간.
“……!”
파앗!
시퍼런 빛이 카메라 플래시처럼 터지며 그의 시야를 가렸다.
“아!”
뭔가 일이 터졌다는 생각에 맥은 전신에 보호막을 두르면서 오른손으로 정수 칼날을 빚어냈다.
동작이 워낙 날쌘 상대니 어쭙잖게 파동을 쏴서 정수를 소모하는 것보단 근접전을 하는 게 나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
곧장 거센 기척이 날아들 줄 알았더니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이 펼쳐졌다.
파바밧!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던 재규어가 다름 아닌 아지트 방향으로 냅다 뛰기 시작한 것이다.
“뭐, 뭔데?”
경황없는 얼굴로 벌써 저만치 멀어진 재규어를 보던 맥은 뒤늦게 깨달았다.
투웅…….
퉁…….
어디선가 진동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가만히 서서 신경을 곤두세워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미약한 진동이었지만 분명히 뭔가가 있었다.
‘또 궤멸자……?’
아니다. 궤멸자 정도였다면 재규어가 저렇게 황급히 달아날 리 없다.
맥은 머리를 다시 회전시켰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가지 유력한 가설을 세울 수가 있었다.
‘설마.’
드드드드듭……!
그사이 한층 더 가까워진 정체불명의 진동.
재규어는 이미 아지트 안쪽으로 진입하는 중이었고, 맥은 곧장 허공으로 팔을 뻗어 정수 파동을 뿜어냈다.
파아아아앗!
정우가 지시한 대로 건물 지붕을 날려야만 했으니까.
츠아아악!
아지트의 콘크리트 지붕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워졌고, 거의 동시에 엄청난 강도의 진동이 일대를 뒤덮었다.
쿠드드드드!
이럴 줄 알았으면 굳이 건물 지붕을 날리지 않았을 거다.
‘진짜 놈인가.’
궤멸자들이 나타나던 때와는 뭔가 다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익숙한 존재감이 그의 신경을 마구 자극했다.
거대한 정수 덩어리 특유의 존재감 말이다.
‘역시.’
불청객의 진입 방향은 북서쪽.
슥.
맥이 정수가 감지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일이 벌어졌다.
우우웅……!
서쪽 저편의 대지가 파랗게 빛나는 것 같더니 그 빛이 아주 빠르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박정우!」
다급해진 맥이 음성에 정수를 실어 대륙의 최강자를 호출했고, 그러는 사이 맥의 발밑은 물론 아지트가 세워진 부지 전체가 파랗게 빛나다 못해 일렁이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고밀도의 정수가 주변에 뿌려지고 있는 거다.
마치 박정우가 실력 행사를 할 때처럼.
「박……!」
맥이 동공을 최대로 키운 채 이를 악문다.
숨이 턱 막히고 발음조차 끝까지 해낼 수 없을 정도의 압력이 온몸을 옥죄고 있었다.
그러더니.
콰아아아아아!
파랗게 젖어 있던 발밑의 대지가 송두리째 솟아올랐다.
‘미친.’
가파르게 치솟는 맥 테일러의 고도.
그는 자신이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미터 상공까지 튀어 올랐음을 깨닫고 보호막을 둘렀다.
그러고 나선.
‘아.’
두 발이 아직도 수십 미터 상공에 머물러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니, 정확히는 신장이 못해도 수십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뭔가가 그를 떠받치고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용.’
지금 맥은 용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의 허리 위에 올라타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막 저 멀리.
끼익.
아직은 지상에 붙어 있는 아지트 안쪽에서 박정우가 걸어 나왔다.
그는 여전히 피곤해 보였지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선물이 제때 도착했군.”
체고 수십 미터, 몸의 길이는 수백 미터에 이르는 불가사의한 괴물을 보면서 희미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