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24
328화. 자유거래(8)
* * *
‘흐음.’
분명 정신이 나간 선택지였음에도 정우는 더없이 침착했다.
그에게 현시점 가장 큰 문제는 공통 특혜가 아니라 이 모든 게 끝난 뒤 나타날 9일 차 침입자 녹스였기 때문이다.
‘별수 없지. 불가침 해제뿐이다.’
다만 새 특혜의 정확한 의미는 확인해 둘 필요가 있었다.
[4] 더 이상 정수가 흡수되지 않음.‘더 이상 정수가 흡수되지 않는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지?’
그러자 평가관이 부연을 해 줬다.
-4번 특혜를 선택하실 경우 유동 상태의 정수가 더는 기능하지 않게 됩니다.
‘…….’
묘하게 꼬여 있는 말.
한때는 이것이 평가관 특유의 묘한 화법인 줄 알았으나, 지금은 생각이 달랐다.
이건 우주 방식의 문법인 거다.
초월적인 문자로 적힌 것이 아닌 이상 반드시 모든 의미를 따져 봐야 한다.
‘유동 상태의 정수라는 게, 생물을 죽이면 떨어지는 구체를 뜻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엄밀히 말해서 모든 유형의 정수가 흡수되지 않는 건 아니겠네.’
실제로도 4번 항목에 ‘모든’이라는 표현은 들어 있지 않다.
‘정수가 유동 상태 말고도 다른 형태로도 존재할 수 있나? 만약 그렇다면 다른 방식으론 정수를 더 얻을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러나 평가관은 정우의 추론을 확인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정우는 다시 묻는 수밖에 없었다.
‘여신 거래처럼 행성 외부에서 빚을 얻는 건 여전히 가능한가?’
-그렇습니다.
‘역시 그렇군.’
정우는 평가관의 답변을 통해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정수의 흡수, 그러니까 우주는 유동 상태의 정수와 접촉하는 걸 ‘흡수’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흡수 이외의 방법으론 여전히 정수를 늘리는 게 가능하다.’
직접 경험해 본 것은 여신 거래뿐이지만 상대는 우주의 무언가가 아니던가.
얼마든지 해괴한 방식이 등장할 수 있었다.
‘그럼 더는 흡수되지 않게 된 정수 구체들은 어떻게 되지? 계속 그 자리에 남나?’
-그렇습니다.
‘침입자들은? 침입자들도 결국엔 구체를 흡수해서 가져가는 거 아니야?’
-침입자들은 정수를 흡수하지 않습니다. 운반하거나 섭취합니다.
‘……그게 그거잖아.’
정우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어찌 됐든 우주의 판정에 따르면 침입자들이 정수를 줍는 행위는 ‘흡수’로 간주되지 않는다.
사실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몰랐다.
지구의 존재들은 정수를 흡수해서 자신의 힘으로 사용하지만 침입자들은 그러지 않으니까.
말 그대로 운반, 섭취인 것이다.
‘알겠다. 우선 공통 특혜는 2번을 선택하지.’
[2] 해방된 지역의 불가침 상태 해제.그가 2번 특혜를 선택하자 틱, 하는 소리와 함께 새로운 문구가 나타났다.
|개별 특혜를 선택합니다.
|변경된 공통 특혜에 대응하여 개별 특혜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일부 항목이 삭제됐으며 대신 새로운 특혜가 추가되었습니다.
|본 특혜는 선택자에게만 적용됩니다.
지난 회차와 같은 안내다.
‘또 새로운 특혜가 생겼다고?’
하기야 공통 특혜와 개별 특혜는 상호 대응 관계에 있으니 공통 특혜가 바뀔 때마다 이쪽에도 변화가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삿.
이윽고 9일 차 개별 특혜 목록이 나타났다.
1. 서면 계약
-우주적 구속력이 있는 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습니다.
2. 우비
-더는 이계의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3. 강림
-지정한 대상과 함께 소속 지역 내 원하는 지점으로 즉시 이동합니다.
4. 대장간
-정수를 이용해 무구를 만듭니다.
5. 성역
-지정한 구역 내에서 외부인의 정수 사용을 금지합니다. 진입로를 직접 폐쇄한 구역만 지정할 수 있습니다.
‘……무구? 이건 또 뭐야.’
기존 4번이었던 전시안이 사라지고 대장간이라는 항목이 생겼다.
정우는 본래 서면 계약이나 우비를 선택할 계획이었기에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설명 좀 해 주는 게 어때.’
정우가 평가관에게 부연을 요청하자 의식 속에서 다467의 기척이 크게 일어났다.
-대장간을 이용하면 정수의 일정량을 무구로 변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구로 변환한 정수는 손상되지 않으나, 본래의 성질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본래의 성질?’
이렇게 묻던 정우는 아, 하면서 스스로 답을 깨쳤다.
본래의 성질. 생물의 몸 안에서 화력으로 기능하는 성질을 뜻하는 거다.
그러니까 대장간은 일정량의 정수를 아예 몸 바깥으로 빼내는 능력인 것이다.
이를테면 현재 가진 정수 298억 개 중 100억 개를 빼내서 검을 만들 경우, 그 직후부터 정우의 실질적인 정수 총량은 198억 개가 되는 셈.
‘손상되지 않는다는 게 파괴되지 않음을 의미하는 건가? 내 충신처럼?’
충신, 절대 부러지지 않는 정수 칼날.
-그렇습니다.
‘그럼 충신의 하위 호환인 거잖아.’
물론 방어구를 만드는 방법도 있겠지만 이것 또한 충신을 이용해 일부분 대체할 수 있다.
정수 총량을 손해 보면서까지 선택할 능력은 아니라는 게 정우의 결론이었다.
그러다.
‘잠깐.’
그가 생각의 흐름을 바꿨다.
‘무구로 만든 정수가 몸에서 빠져나가는 거라면, 무한대 특성은 어떻게 되는 거지? 둘의 기능이 충돌하잖아.’
[무한대]정수를 아무리 소모해도 20% 미만으로 줄어들지 않습니다.
정우가 탑에서 구매한 다섯 개 상품 중 하나다.
‘내가 만약 보유한 정수 전량으로 무구를 만든다고 해도 무한대가 작동하나?’
-…….
이번엔 평가관이 곧장 답을 내놓지 못했다.
대답하길 망설이는 걸까? 아니면 녀석조차도 답을 모르는 걸까.
그러더니 놈의 기척이 잠시 희미해졌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어딘가로 보고를 올리는 듯.
그리고 잠시 뒤.
-소지하신 모든 정수로 무구를 제작할 경우에도 무한대는 작동합니다.
평가관이 답을 가져왔다.
‘그럼 내 몸 안에 현재 정수량의 20퍼센트가 남고, 동시에 100퍼센트짜리 무구도 생기는 거겠군.’
-그렇습니다.
정우의 현재 정수 총량은 29,893,272,335개.
이것의 20퍼센트라고 한다면 약 59억 7천만 개다.
정수 운용법이 조금 달라지긴 하겠으나 어쨌든 60억 가까이 되는 정수를 외부로부터 또다시 수혈받는 거나 다름없는 것이다.
‘우주도 멍청할 때가 있는 거야? 아니면 내가 길을 잘 찾아가고 있는 건가?’
만일 6일 차에 탑과의 거래를 통해 무한대를 구매하지 않았다면 이 선택지는 결코 주어지지 않았을 거다.
정우로선 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4번, 대장간을 선택하겠다.’
마침내 그가 최종 결정을 내리자 눈앞의 문구가 사라지며 특혜 선택이 접수됐음을 알렸다.
스슷.
다음엔 얼마간의 정적이 흐르더니 차단되어 있던 감각들이 하나둘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시야가 복원됐고, 다음엔 청각, 그리고 촉각까지 돌아오면서 뺨과 이마 언저리에 세찬 바람이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콰아아아아……!
그를 태운 ‘용’이 여전히 진입로를 향해 달리고 있었던 거다.
「각 지역의 최상위 구원자가 특혜 권한 선택을 마쳤습니다.」
…….
「투표 결과에 따라, 현 시간부로 해방된 지역의 불가침 상태가 해제됩니다.」
…….
「효력 개시.」
‘다들 생각이 비슷했군.’
정우는 윤곽이 점점 또렷해져 가는 주변 풍경을 눈으로 훑었다.
이번 투표로 인해 한반도를 포함한 모든 해방지에 침입자들이 들이닥칠 거다.
청소부 떼부터 궤멸자, 어쩌면 녹스까지 말이다.
따라서 이 시점까지도 성역에 들지 못한 자들은 대부분 죽게 되리라.
‘그럼 이제…….’
정우의 시선이 발치의 패스파인더로 향한다.
불가침 상태마저 해제했으니 내일은 패스파인더를 포기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하루하루 생존 환경이 각박해지고 있다.
이제 정말 끝을 내지 않으면 위험할지도.
* 굴!
한동안 계속 전력 질주만 하던 용이 갑자기 큰 소리를 냈다.
이에 정우와 재규어가 거의 같은 순간에 몸을 일으켰고, 곧 모두의 시야에 ‘그것’이 들어왔다.
스으으으으…….
9일 차 진입로.
이미 변이가 시작돼서 더는 이전에 알던 시커먼 통로의 모습이 아니었다.
잘게 찢어서 물 위에 흩뿌린 종잇장처럼 파편화된 상태로 허공에 떠 있었으니까.
“시작됐군. 우린 이미 9일 차에 들어와 있다.”
정우가 이 말을 하는 순간.
쉬아아앗……!
진입로에서부터 바람이 새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행성 기록에서 봤던 현상이 똑같이 벌어졌다.
잘게 조각난 진입로의 각 파편 안쪽에서 붉은색을 띠는 모래 같은 것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어떤 기척도 소리도 없었고, 심지어 물속의 부유물처럼 너무나도 부드럽게 움직였다.
지구의 중력 따위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듯.
그러더니 곧 모래들이 모여 커다란 파도를 이뤘고, 이때부터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뿜어냈다.
“…….”
일찍이 탑과의 거래를 통해 초월적인 존재들과 마주해 온 정우조차 긴장하게 될 정도.
놈은 순식간에 몸집을 수백 배 가까이 불리더니 기록에서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직경 20미터 크기의 칠흑색 구체를 뱉어 냈다.
‘녹스.’
저것이 9일 차 침입자의 본체다.
이렇게 직접 보니 놈에게도 ‘시선’이 있다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누가 먼저 거래를 하겠나?」
이윽고 구체의 표면에 초월적인 문자가 흰색으로 새겨졌다.
모든 것이 기록으로 본 그대로라 소름이 돋는다.
정우는 잽싸게 용에게서 떨어져 나오며 녹스가 머물고 있는 자리로 걸어 나갔다.
“거래는 나만 한다.”
그러자 녹스가 분명히 정우에게 시선을 줬다.
다음엔 다시 초월적인 문자를 띄워 올렸다.
「가진 것을 보여라. 내 배를 채워야만 오늘을 지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자엔 복합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감정과 의도까지도 담을 수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 보고 있는 문구엔 의미 외에 그 어떤 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스스스슷.
구체 형태의 녹스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온다.
이제 곧 녀석이 거래를 개시할 수 있는 표식을 만들어 낼 거다.
“잠깐.”
정우가 손을 살짝 내밀며 녹스를 제지하자 놈이 정말로 움직임을 멈췄다.
그렇다고 무어라 말을 걸어오지도 않았으나 상대의 다음 대사를 기다리고 있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이에 그는 고개를 뒤로 돌려 녹스의 시야 안에 정확히 몇 개체가 있는지 재차 확인했다.
정우 자신, 재규어, 그리고 용.
총 세 개체.
그렇다면 과연.
“이 자리에 네가 인지할 수 있는 존재가 몇이지?”
녹스가 보고 있는 실제 참관자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
정우는 질문을 던진 뒤 조금 초조해진 마음으로 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녹스가 구체 표면에 띄워 올렸던 문구를 새것으로 바꿨다.
심지어 그건 초월적인 문자도 아니었다.
지구, 아니 인간 태생인 박정우의 문자.
「4.」
“……!”
넷.
이 자리에 누군가 또 있는 것이다.
십중팔구 다른 행성, 다른 시간의 누군가가 지구의 기록을 보고 있는 것일 터.
그리고 이 말을 다시 뒤집어 보면.
‘어째서 다른 행성이 아닌 여기지? 9일 차의 샘플이라면 사9005도 있잖아? 왜 거길 놔두고 이 기록을 열어 본 거냐.’
이 메시지는 분명 상대에게 전해지고 있을 것이다.
상대도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을 테지만…….
‘내게 전해 줄 순 없겠지.’
미래에서 온 참관자.
지구의 기록에 어떤 특징이 있기에 다른 행성을 제쳐 두고 여길 열어 보게 된 걸까.
정우는 막연함 기대감, 그리고 불안감을 가지고서 녹스를 바라봤다.
“어서 거래를 하자. 네놈 말고도 만나야 할 상대가 많으니까.”
팟.
정우의 이야기를 들은 녹스가 곧바로 새하얀 표식을 만들어 냈다.
예상대로 초월적인 문자였다.
「존재를 분해하여 상품을 생성.」
정우는 문자를 보자마자 손을 뻗어 접촉했고, 잠시 뒤 그의 시야에 계약서 서두가 나타났다.
「간이 거래」
|판매자: 인간
|구매자: 녹스
* 본 거래는 우주가 보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