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26
330화. 큰손(2)
* * *
첫째와 둘째.
정우는 아직 이들의 이름조차 몰랐다.
그저 탑과의 거래에서 두 존재를 만나게 됐는데, 하나가 먼저 와 있었고 다른 하나가 조금 늦었기에 첫째와 둘째라고 부르게 된 것뿐이다.
또한 그뿐인가?
정우는 이 두 존재가 우주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분명한 건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존재보다도 상위에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들과 접촉할 때마다 벌어지는 현상이 그 방증이었다.
지금까지 지구에 진입한 그 어떤 존재도 이 행성의 법칙을 완전히 거스르지 못했다.
관찰자 테르가도 그림자를 숨길 순 없었고, 궤멸자 또한 제한된 조건 안에서 기척을 감출 수 있었을 뿐, 지극히 지구적인 환경에서 싸워야만 했다.
그나마 불가해한 특성을 보여 준 침입자라면 녹스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을 거스르거나 관통하는 능력을 가졌으니까.
그러나 그것마저도 지금 마주한 첫째, 둘째와는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조악한 힘이었다.
이 두 존재는 지구에 오자마자 시공간을 무시하고 자신들만의 영역을 만들지 않았는가.
행성 외부에서 파견된 평가관도 동석할 수 없고, 심지어 폐쇄 절차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정수조차 무력해지는 영역을 말이다.
여기에 더해 출처 불명의 정수를 새로 지급해 주던 ‘여신 거래’나 행성 기록을 열어 준 ‘사학자’ 같은 지난 상품으로 미뤄 봤을 땐…….
‘이 녀석들의 자율도는 지구보다도 한참 높아. 어쩌면 이들에겐 행성 폐쇄조차도 대수롭지 않은 이벤트일지 몰라.’
|구매자 교체- 80,000
판매자가 마주한 구매자를 다른 존재로 교체합니다.
거래 의사가 있는 구매자 중 가장 깊은 존재가 방문합니다.
‘가장 깊은 존재.’
정우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반드시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두 존재의 기분에 따라 무려 8만 포인트나 들여 만든 이 자리가 무의미해질 수도 있고, 반대로 상상도 못한 이득을 취할 수도 있으리라.
‘애초에 행성 폐쇄 결과 따위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놈들이야. 이 녀석들이 흥미를 보이는 건 오로지…….’
흔하지 않은 어떤 것.
그것이 거래 상대의 번뇌든, 말도 안 되는 선택이든 이들은 특출한 무언가를 접할 때 흥분하는 것 같았다.
탑을 통해 이루어졌던 첫 만남 당시에도 이쪽이 다섯 개나 되는 상품을 집어 든 것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런 점에서.
‘…….’
정우는 놈들이 여전히 자신에게 관심을 보일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다섯 개나 되는 상품을 가지고 놈들과의 거래를 마친 뒤로부터 3일이 지났다.
그런데 다시 만난 거래자가 팔다리와 눈을 모두 잃은 채 나타났으니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후우우우욱…….
또 한 번 거대한 무언가가 이 어두운 공간의 아래쪽을 스쳐 지나간다.
저 녀석이 바로 ‘첫째’다.
비교적 친절하고 성격도 온화한 편. 대화의 틀을 짜고 주도한다.
반면에.
스아아아앗.
육신 없이 싸늘한 느낌만으로 존재하는 ‘둘째’는 성격이 급하고 포악했다.
첫째가 짜 놓은 대화의 틀 사이에 제멋대로 침입하며 상대와의 소통에도 큰 관심이 없다.
첫 만남 당시에도 정우는 둘째가 쏟아 내는 의미의 유속이 너무 빨라서 극히 일부만 알아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팟.
이윽고 어둠 속에서 일련의 표식들이 홀연히 떠올랐다.
역시 초월적인 문자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그 안에 담긴 함축적인 의미가 오롯이 전달되는 우주의 언어.
그러나 이들이 만들어 낸 문자는 다소 유난했다.
문자에 담긴 의미의 양이 여태 보아 온 초월적 문자들보다 훨씬 방대했고, 그 전달 속도도 매우 빨랐다.
‘여전하군. 아직도 이 녀석들과 대등하게 대화할 수 없는 건가.’
인간, 아니 일개 행성의 유력한 구원자 수준으론 이 두 존재가 쏟아 내는 의미를 온전히 잡아내는 것조차 버거운 것이다.
왜인지 분한 마음이 든다.
그러자 첫째가 이를 알아차렸는지 정우가 알아보기 쉽도록 의미의 양과 유속을 줄였다.
「거래를 위해 이곳에 왔다.」
그래도 아예 인간의 문자를 띄워 주던 첫 번째 만남에 비하면 확실히 다른 태도였다.
이제 이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걸까.
물론 ‘둘째’는 여전히 제멋대로였다.
의미의 유속을 줄이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양껏 했으니까.
스아아아아…….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둘째의 의미들 속에서, 정우는 반복되는 몇 가지를 간신히 건져 낼 수 있었다.
또, 지구, 거래, 흥미롭다, 말랐다, 예상하지 않은, 무모한, 소멸…….
이 중에서 ‘말랐다’라는 의미는 육신이 말라 보인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거래 상대, 그러니까 박정우의 존재가 말라비틀어졌다는 뜻이었다.
더 빼낼 것이 없어 보인다는 소리.
‘예상하지 않은’이라는 의미도 결코 평범한 문구가 아니었다.
‘지구와의 거래에 입찰한 게 아니었구나. 이 녀석들도 어디와 연결될지는 알지 못한 거였어.’
무작위 대상, 영역과의 거래에 응했는데 수일 전 거래했던 지구의 박정우란 존재와 또 매칭된 상황.
‘거래를 하자. 상품을 보여 줘.’
정우는 이 말과 함께 손짓을 하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이미 양팔을 팔아 버렸으니까.
후우우우욱…….
첫째가 정우의 몸 근처를 또 스쳐 지나간다.
그러더니 이번엔 허공에 문자를 띄우지 않고 의미를 내뿜었다.
초월적인 문자보다 훨씬 추상적이고 유속이 빠른 의미들이었다.
파앗.
이 의미들이 향한 대상은 정우가 아니라 둘째였고, 거의 동시에 둘째에게서도 엄청난 밀도의 의미들이 분말처럼 뿜어져 나왔다.
마치 식물들이 꽃가루를 주고받는 것만 같다.
아마도 저것이 첫째와 둘째가 사용하는 고유의 언어이리라.
‘…….’
정우는 감히 두 존재의 대화를 잡아낼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느낄 순 있었다.
둘은 현 사태에 대해 논의 중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재회와 그사이 볼품없이 찌그러져 버린 거래자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더니 마침내.
후우우욱.
첫째가 다시 어둠 속을 헤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둘째가 정우에게 접근했다.
쉬아아아앗…….
의식이 통째로 얼어붙는 것만 같은 악랄한 존재감.
‘뭘 하려는…….’
정우가 조금 당황하는 찰나.
쉬잇.
둘째가 정우로부터 시퍼런 빛을 내는 초월적 문자들을 빼냈다.
‘……?’
정우의 시선이 문자들로 향한다.
그것들은 다름 아닌 정우 자신이 행성 폐쇄 이후 쌓아 온 자산을 의미하고 있었다.
「29,893,272,335」
|상환 완료자
무한대 | 충신 | 여신 거래 | 사학자 | 간파
「75,760」
|융합 가능.
보유한 정수 총량부터 탑에서 구매한 상품들, 그리고 녹스와의 거래물까지.
이런 걸 한꺼번에 모아서 보는 건 정우도 처음이었다.
‘이걸 왜……. 무슨 의미지?’
그러자 이번엔 첫째가 초월적 문자를 사용해 말을 걸어왔다.
「몸은?」
몸. 녀석이 표면적으로 사용한 단어는 ‘몸’이었지만 실제로 의미한 바는 정우가 물리적으로 잃어버린 양팔과 두 다리였다.
설마 이쪽을 걱정해 주는 걸까.
정우는 첫째가 계속해서 어둠 속을 헤엄치는 걸 느끼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팔았다. 이것 말고는 팔만 한 게 없었어.’
그러자 허공에 새로운 문구가 나타났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뭐……?’
정우가 반문하는 사이 초월적 문자에 담겨 있던 나머지 의미가 그의 의식 속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네게 팔 것이 없다.」
정확히는 팔고 싶은 게 없다는 뜻이었다. 더는 정우에게서 받을 수 있는 게 없어 보이니까.
‘거래를 위해 이곳에 왔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거래를 해. 저번처럼 상품을 내놓으라고. 선택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다급해진 정우가 어둠 속에서 몸을 비틀자 주변 공간이 바르르 떨렸다.
어쩌면 그의 의식체 자체가 진동 중인 걸지도 몰랐다.
그러자 어디선가 싸늘한 기운을 띤 의미들이 정제되지 않은 형태로 밀려 나왔다.
둘째가 말을 하고 있는 거였다.
그러나 이번엔 거래 상대에게 뜻이 명확히 전달되길 원했는지 이전보단 훨씬 이해하기가 수월했다.
「이 행성을 팔아. 그럼 상품을 보여 주겠다.」
‘미친 새끼들.’
정우가 분개한다.
이건 자신이 여태 달려온 목적을 팔아 버리라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내가 그걸 팔겠다고 해서 팔 수 있긴 한가?’
「네게 팔 의지가 있다면 권한은 우리가 만든다.」
아마도 사실이고 진심일 것이다.
정우는 순간 의식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이 행성은 팔 수 없어. 난 지구의 구원자다.’
「그럼 더 볼일이 없겠군.」
이번 대사는 그사이 어둠 저 아래 까마득한 곳까지 내려간 ‘첫째’의 것이었다.
거래할 의사가 없다면 이만 작별하자는 이야기다.
때맞춰 둘째 특유의 차가운 기운도 서서히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 공간을 닫고 돌아가려는 듯.
‘제길.’
정우가 당혹감에 빠진 것도 이때쯤이었다.
이제 그는 자신이 우주적 존재를 여전히 잘 알지 못한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첫째와 둘째의 변덕은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것이었고, 이들이 보이는 흥미라는 것도 지극히 주관적이고 일시적인 개념이었다.
지구로 치면 이들에게 정우는 아주 커다란 먹이를 힘겹게 끌고 가는 개미인 것이다.
개미의 색깔이 조금 특이하고 팔다리도 성치 않은 것 같아 눈길이 가긴 했지만 그래 봐야 개미는 개미.
첫째와 둘째의 입장에선 언제든지 개미 구경을 그만두고 가던 길을 갈 수 있었다.
애초에 종이 다르고, 사는 세계가, 차원이 다르지 않은가. 그러니 이 개미가 저렇게까지 해서 먹이를 가져가려는 데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스르르릅…….
무한한 것 같던 이 어두운 공간에서 유한함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놈들이 정말 귀환하고 있었다.
‘기, 기다려……!’
이대로 8만 포인트를 증발시킬 것인가?
정수가 유효한 영역이었다면 창이라도 날려서 놈들의 주목을 끌었겠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백지! 백지 수표를 발행하겠다!’
어쩌면 사상 최악의 실수가 될지도 모를 공약을 만들고 말았다.
「백지?」
빠르게 쪼그라들던 어둠의 영역이 움직임을 멈춘다.
그러더니 희미해졌던 첫째와 둘째의 존재감이 다시 불어났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말해라.」
‘내 수표에 이 행성을 적을 순 없다. 어떤 일이 있어도 지구에 손상이 가해져서는 안 돼.’
「그럼 백지가 아니다.」
정우와의 대화에 응한 것은 첫째였으나 둘째도 이 대화에 참여하고 있다는 게 분명히 느껴졌다.
낮게 웃는 것으로 말이다.
‘씨발, 이것조차 싫으면 꺼져. 나보다 더한 제안을 할 수 있는 판매자가 또 있을까? 이 행성 빼고는 다 주겠다고. 뭘 가져갈지는 너희가 고민하면 돼.’
정우가 배수의 진을 친다.
실제로 그에겐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이 거래가 끝나고 나면 곧바로 9일 차 폐쇄 절차와의 싸움이다.
현재 미국에 남아 있는 어쭙잖은 구원자들이 녹스를 제대로 감당해 낼 수 있을 리 없고…… 조만간 전투태세를 갖춘 녹스들이 대륙에서 가장 큰 정수를 찾아 덤벼들 게 뻔했다.
따라서 그에겐 압도적인 힘이 필요했다.
9일 차 침입자가 떼 지어 덤벼들어도 어떻게 할 수가 없을 정도의 힘 말이다.
그리고 정우의 생각엔 그 힘을 줄 능력이 첫째와 둘째에게 있었다.
행성 거래조차 임의로 만들 수 있는 존재들이니까.
「이것이 ‘거래’가 아니었다면 너는 소멸했을 것이다.」
첫째가 약간의 불쾌감을 나타낸다.
반면 둘째는 고유의 야생적인 언어로 재밌다, 라는 의미를 뿜어내고 있었다.
‘어차피 오늘 아니면 내일 소멸할지 모르는데 너희 심기가 대수인가? 내 제안은 여기까지다. 이제 너희가 결정해.’
그러자 첫째가 전에 없이 거친 움직임으로 어둠을 헤치며 정우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홰애애애액!
그러곤 허공에 짤막한 문자를 띄워 올렸다.
「네 제안을 승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