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3
33화. 생방송 (1)
오후 9시 23분.
어둠 속을 멍하니 보던 정우의 귓가에 파트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여느 때와 다름없는 물음이었지만, 정우로선 기분이 묘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전까진 구원자라는 탈을 쓴 살인마에 불과했다면, 지금은 진짜 구원자가 돼 있었으니까.
물론 아직 폐쇄한 진입로도 없고, 그 방주란 것에 누굴 태울지, 뭔가 태우긴 할지조차 결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했다.
이제부터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이 이 나라의 생명체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리라는 점 말이다.
구원자 1위, 폐쇄 권능 보유.
게다가 처음으로 ‘죽인다’ 외의 다른 선택지를 갖게 됐다.
‘혼란스럽다.’
이것이 정우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일단 좀 쉴까요. 많이 피곤하네요.”
그는 이 말을 끝으로 어둠에 잠긴 강남역 거리에서 눈을 돌렸다.
그러고는 뒤편, 여태 걸어오던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강남역 11번 출구가 있었다.
“……?”
구원자의 시선이 어디에 가 있는지 알아차린 선웅이 의구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돌아가자는 이야기인가?
이 뒤라고 해 봐야…….
피범벅이 된 역사에서 잠을 자겠단 이야긴 아닐 테고.
“아.”
뒤늦게 한 가지를 떠올린 선웅이 낮은 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다.
* * *
대기업.
소시민의 삶을 살던 정우에겐 그저 게임이나 영화의 배경 화면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항상 눈에 보이긴 하지만, 그 실체가 와닿지 않는 것들 말이다.
물론 그들이 만든 휴대폰이 자신의 손에까지 쥐어져 있는 걸 깨달을 때면 문득 소름이 돋곤 했다.
그래도 기업이란 건 결국 사람이 모여서 만든 집합체에 불과하지 않은가.
큰 전쟁이나 전례 없는 대재앙이 닥치면, 제아무리 위세를 떨치던 대기업이라 해도 별수 없을 것이라 생각해 왔다.
손발이 돼 줘야 할 실무자들이 뿔뿔이 흩어질 테니까.
하지만 오산이었던 것 같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정우는 저 멀리, 빛나는 대성전자 사옥을 바라보며, 아까 강남역에서 조우했던 자들을 떠올렸다.
구원자이면서도 사측에 협조하고 있던 박 팀장과 정수 3천 개짜리 사내.
대체 회사에서 어떤 청사진을 제시했기에 그만한 인물들이 복종한 걸까?
세상의 종말을 사무실에서 맞이하고 싶지 않다며 바삐 퇴근하던 아침의 자신과 대비된다.
“이해가 안 가네요. 세상이 망해 가잖아요. 그런데도 자신이 다니던 회사에 충성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뭘까요.”
답답한 마음에 혼잣말처럼 내뱉은 대사였다.
그런데 선웅이 그의 말을 받았다.
“대성 정도면…… 아침에 일이 터지자마자 진지하게 대책을 수립하기 시작했을 겁니다. 그리고 명확한 결론과 해법을 내놨겠죠. 거긴 대한민국의 인재가 다 모여 있는 곳이니까요.”
자신의 회사가 정부보다 더 믿음직스럽다면 자연스레 의지하게 되지 않을까.
회사 쪽에서도 기득권을 놓지 않기 위해서 인력을 보존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을 테고.
아무리 세상이 개판으로 변해 간다 해도 인간의 상식이나 판단 기준이 하루아침에 뒤집히진 않는다.
선웅은 대성 그룹을 지지하는 자들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고 봤다.
그러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본래 전쟁이 나면 가장 이득을 보는 건 기업체입니다. 실제로 대성도 6.25 이후에 득세했고요. 나라에 돈 들어갈 곳이 많아지니, 자본가들에게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거든요.”
대한민국에서 본격적인 정경유착이 시작된 시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 전쟁은 인류 문명이 통째로 사라질 수 있을 정도로 급이 다른걸요. 대성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선두권 구원자들까지 제어할 수 있을까요.”
정우는 이 말을 하면서 대성전자 사옥을 향해 발을 디뎠다.
놈들은 강남역에 보내 놓은 직원들이 몰살당한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직도 불을 환하게 켜 두고 있었다.
발치의 패스파인더는 이제 북쪽 어딘가를 가리켰다.
다시 말해, 눈앞의 사옥 안에 아주 강한 자가 있진 않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북쪽이면 강 건너인가. 체력부터 회복하고, 내일 상황을 보자.’
이 시간에 한강 너머로 가기엔 부담스러웠고, 실제로도 몸이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하루 사이에 너무나도 많은 일을 겪은 탓이다.
“음, 갑자기 대성 쪽으로 다시 가신다는 건…… 그 방주라는 시스템 때문인가요?”
말을 꺼낼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었는지 선웅의 눈빛에 머뭇거리는 기색이 가득했다.
이곳까지 오면서 정우가 대략적으로 이야기를 해 줬기에 선웅도 대성의 제안과 방주에 대해서 알았다.
그래서 더욱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안전하게 잠을 청할 수 있는 강남역 일대 건물들을 놔두고 굳이 대성을 다시 건드리려는 이유 말이다.
이에 정우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도로가 마비되어 경찰들도 제대로 움직이질 못하잖아요. 대기업이라고 별수 있을까요. 지금 가서 저 사옥을 털면, 빨라야 내일 아침에나 지원 병력이 올 겁니다.”
“아…….”
상상도 하지 못한 대답에 선웅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가서 잔류 인원을 정리하고, 지원군이 올 때까지 잠이나 자며 기다리겠다는 소리 아닌가.
보통 대담한 자세가 아니다.
본래 이런 사람이었던가?
아니면 여태 겪어 온 일이 사람을 변하게 만든 것일까.
그래 봐야 겨우 하루가 지나고 있을 뿐인데…….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전직 사업부 팀장 조선웅이 다소 사무적인 어조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러고는 스스로 깨달았다.
어느새 자신조차 많은 걸 놔 버렸다는 사실을.
사람을 죽이는 일, 멋대로 건물을 강탈하는 일.
정우가 행하는 여러 일을 방관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다.
구원자들의 대의와 별개로, 살인이란 건 몹시 불편한 행위다.
특히 곁에서 그걸 지켜봐야 하는 선웅의 입장에선 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젠 그 불편함마저 희석되고 있음에 그는 슬픈 마음이 들었다.
그마저도 아주 건조하고, 어렴풋한 마음이었다.
“오세요. 교대로 불침번을 서야 하니까, 서둘러 가야 잠을 좀 잘 수 있을 겁니다.”
벌써 저 멀리까지 걸어 나간 정우가 뒤를 돌아보며 선웅에게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가시죠.”
어둠 속에 멀거니 서 있던 선웅이 고개를 번쩍 든다.
그러자 그의 시야에 정우와 그 뒤편의 대성전자 사옥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이제 곧 초토화될 어느 대기업의 거점은, 마치 정우의 후광이라도 된 듯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대성전자 사옥까지 불과 이십여 미터.
지금까진 어둠 속에 파묻혀 은밀히 이동할 수 있었지만, 이 앞부터는 아니었다.
사옥 근처에 노란 빛을 뿜어내는 가로등이 촘촘히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음…….”
선웅이 단음으로 운을 떼며 우려를 표하려는 찰나, 정우가 먼저 등불의 범위로 성큼 들어서며 말했다.
“이건 일방적인 사냥이라고 봐야죠. 그런 거 하나하나 고민할 필요까진 없어요.”
어떻게 보면 아주 오만한 대사였지만, 선웅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현 시점, 이 나라에서 가장 강한 구원자라고 하니까.
츠즉.
운동화의 고무 밑창이 콘크리트 타일과 마찰하며 낮은 소리를 낸다.
선웅은 노랗게 물들어 가는 정우의 뒤통수를 잠시 바라보다가 곧 걸음을 옮겼다.
“아직도 사람이 있네요.”
정우가 시선을 정면에 둔 채로 입만 열어 이야기했다.
그의 말대로, 저 앞에 보이는 대성전자 사옥의 1층 로비에서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직원들이 대기 중이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강남역에서의 일을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무전을 치기도 전에 다 죽였고, 내가 알기론 생존자도 없었으니까…….’
정우는 당시 상황을 돌이켜 보면서 로비의 전경을 훑었다.
영안실을 연상케 하는 백색 조명이 높은 천장에서부터 내리쬐었고, 그 밑의 직원들 역시 싸늘한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 경계가 허술했다.
로비의 그 누구도 가로등 근처를 지나고 있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으니까.
“조금 떨어져서 오세요. 인원이 꽤 되네요.”
사옥 입구까지 십 미터 정도 남은 지점.
정우가 왼손을 살짝 들면서 천천히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쯤 되자 저쪽도 방문자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로비 외곽에 서 있던 경호원 중 몇 명이 움찔하더니, 정우를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이다.
건물 1층이 통유리로 감싸여 있어서 양측 모두 서로의 모습을 온전히 볼 수 있었다.
정우는 경호원들이 입구 쪽으로 모여드는 걸 보면서 휴대폰을 꺼냈다.
현재 시각, 오후 9시 38분.
‘열 시 쯤엔 잘 수 있을까.’
고개를 들자 까마득히 높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무려 43층짜리 건물이다.
이 시간까지 몇이나 되는 직원이 남아 있을지는 모른다.
어쨌든 휴식을 취하기에 적당한 공간을 찾으면서, 방해가 되는 녀석이 있다면 다 죽일 생각이었다.
덜컥.
이윽고 입구 중앙의 대형 유리문이 열리며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들이 걸어 나왔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평균 정수량이 60개밖에 안 됐다.
“무슨 일이십니까?”
선두에 서 있던 남자가 제법 정중한 목소리를 낸다.
정우는 즉답하는 대신, 고개를 살짝 꺾어 사내들 뒤편의 로비를 슬쩍 봤다.
로비 측면의 안내 데스크에선 여직원 두 명이 무료하다는 표정으로 휴대폰을 보는 중이었다.
낯선 사람이 정문 앞까지 와 있는데, 저런 반응이라니…….
“각성자가 여기에 왔던 적이 전혀 없나요? 어떻게 십 단위의 정수로 여길 지키고 있습니까?”
정우가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이야기하자 그에게 말을 건네 왔던 사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정우는 그 안에서 무엇이 나오는지 궁금했기에 가만히 놔뒀다.
그러자 행운동에서 봤던 물건, 권총이 튀어나왔다.
딱 봐도 실탄이 들어간 실제 총이었다.
“아.”
이 정도면 인정할 만하다.
정수가 천 개 단위는 되어야 총알을 막을 수 있으니까.
눈앞의 경호원은 전부 여덟 명.
이들이 전부 실탄을 난사한다면 웬만한 각성자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은근히 정우를 둘러싸고 있던 다른 경호원들도 저마다 총을 꺼내기 시작했다.
대체 이 많은 총을 어떤 경로로 구했는가…… 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곧 상대가 질문을 던지는 바람에 화제가 전환됐다.
“혹시 구원자…… 이십니까?”
조심스러운 말투와 달리 사내의 두 손은 권총을 쥔 채로 정우의 이마로 향하고 있었다.
일종의 사전 지시 같은 것이 있지 않았나 싶다.
타인의 정수량을 볼 수 있는 것 같은 인원이 발견되거든 반드시 붙잡아 두라는 식으로.
슥.
그사이 경호원 중 하나가 휴대폰을 꺼내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장내가 워낙 조용해서, 전화 연결음이 정우의 귀에까지 아주 생생하게 들렸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벌써 여섯 번째 연결음.
소리가 한 번 울릴 때마다 정적의 두께가 한 겹씩 늘어나는 듯했다.
그에 정우가 몸 바깥으로 보호막을 빚어내며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강남역으로 건 전화입니까? 그런 거라면 받을 사람이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