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30
334화. 자해(1)
* * *
‘왜 갑자기 보상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쪽을 비웃던 둘째가 어째서 마음을 바꿨는가.
정우는 오래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찾아낼 수 있었다.
두두두두……!
점점 가까워지는 프로펠러 소리에 맞춰 무구가 그쪽으로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첫째와 둘째가 보상을 내리는 조건은 오로지 즐거움을 느꼈을 때다.
그러니 이 말인즉슨.
‘저 헬기가 너희에게 즐거움을 줄 거란 뜻인가?’
전직 대륙 1위인 맥 테일러와 온전한 인간인 헬기 조종사, 마취 전문의.
저 세 사람이 초월적인 존재들에게 향락을 제공할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죽음.’
정확히는 저들의 죽음으로 인한 박정우의 정신적 고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봐.”
정우가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무구를 부르자 녀석이 정말 사람 같은 몸짓으로 뒤를 돌아봤다.
-……?
“나와 목적이 같다면서 왜 저 녀석들을 노리는 거지? 하나는 내 불침번이고 나머지 둘은 인재야. 살려 놔야 한다.”
정우로선 무구와 싸워서 이길 수 없었기에 말로 해결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었다.
-더는 필요가 없다. 정수를 얻는 게 더 효율적이야.
“내 말을 아직 이해 못했나 본데…….”
-불침번은 나로 대체할 수 있다. 그리고 인재 따윈 알 바 아니지. 이미 성역에 인간을 많이 남겨 두지 않았나? 짐은 빨리 덜어 버릴수록 좋다.
“…….”
정우는 무구의 방금 대사에서 최소 세 가지를 건져 낼 수 있었다.
하나, 무구는 온전히 개별적인 존재라고 봐야 한다. 자기만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이때 이쪽의 허락을 구하지도, 구할 필요도 없는 존재다.
둘, 무구의 목적은 행성 구원이지만 ‘구원’의 범주 안에 인간이 들어 있진 않다.
셋, 하지만 나는 인간 역시 구하고 싶다.
‘맙소사.’
세 번째 사실에서 깜짝 놀란 정우가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올린다.
그러자 푸르스름한 빛이 턱밑까지 번졌다.
맞은편 손은 여전히 넝쿨 형태로 변이되어 무구와 연결된 상태였는데, 놈이 십여 미터 이상 나아가 버린 바람에 손이 마치 빨랫줄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다.
‘이걸 끊어 버리면…….’
정우가 기괴하게 변한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무구가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무심한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저 녀석들을 살리려거든 나와 연결을 끊으면 된다. 대신 내가 쥐고 있는 정수를 완전히 포기해야 하겠지. 나 없이도 행성을 구원할 자신이 있나?
연결을 끊었다가 재개하더라도 무구의 판단이 바뀌진 않을 거란 의미다.
물론 무구가 추격하기 어려울 정도의 거리까지 일행을 피신시키는 방법도 있겠지만 이제 곧 녹스 무리가 찾아올지도 모르는 이 시점에 녀석을 그렇게나 오래 재워 둘 여유는 없었다.
다시 말해서…….
‘씨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두두두두두!
그사이에 헬기와 두 존재 간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고, 곧이어 무구에게서 어마어마한 양의 정수 활성이 감지됐다.
아마도 저들을 공중 분해할 생각일 거다.
“맥은 몰라도 헬기는 필요해. 민간인 둘은 살려라.”
구걸에 가까운 정우의 요청.
이에 무구가 또 한 번 무심한 목소리를 흘렸다.
-날 속이려 드는군. 이젠 헬기도 필요 없잖아.
“…….”
사실이다.
재규어와 용을 흡수한 이후 정우의 정수 운용 개념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고, 그는 자신이 더는 땅을 밟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레이더 전개를 위해 사방에 흩뿌리던 정수를 이젠 육체 부양을 위해서도 쓸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물체화를 이용해 날개를 만들 필요조차 없었다.
-방해하지 마라.
무구는 마치 엄포를 놓듯 이렇게 말하곤 오른팔을 흉악한 느낌의 칼날 형태로 바꿨다.
아마 잠시 뒤면 놈이 오른팔을 휘둘러 수십 미터 거리에 떨어져 있는 저 헬기를 간단히 동강 낼 것이다.
그래서 정우는.
팟.
놈이 다음 동작을 취하기 전에 자신과의 연결을 끊어 버렸다.
투둑.
무구의 신체에서 떨어져 나온 정우의 팔이 도로 본래 모습을 찾아갔고, 때맞춰 이리로 향하던 헬기가 지상에 조심스레 착륙했다.
퉁!
스키드가 바닥과 맞닿으며 둔탁한 소리를 내더니 곧이어 동체 측면의 출입문이 빠르게 열렸다.
드르륵!
그 안에서 나타난 건 맥 테일러였다.
미네소타 소속의 요원이자 현시점 미 대륙 2위 구원자.
그가 다소 급하게 모습을 드러낸 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박정우의 근처에서 대량의 정수 반응이 감지됐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행여나 정우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까 해서 힘을 보태러 온 거다.
“괘, 괜찮은 건가?”
경황없는 얼굴로 정우에게 다가간 맥은 곧 무구를 발견하고서 걸음을 멈췄다.
“저건……?”
“내 새로운 무기다. 일일이 설명하려면 길어.”
“……그렇군.”
맥은 여전히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일단 입을 다물었다.
이 시국에 자신의 호기심 따윈 별 가치가 없다는 걸 아는 탓이었다.
박정우의 새 무기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별다른 부연을 해 주지 않는 것도 그럴 만하니 그러는 것일 터.
맥의 이러한 반응은 그가 정우를 온전히 인정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이 사실을 잘 아는 정우는 아주 오랜만에 연민과 미련을 느꼈다.
“…….”
그것도 인간에게 말이다.
정확히는 그나마 자신을 알아주는 존재를 이제 곧 소멸시켜야 한다는 것에서 오는 슬픔이었다.
‘내 감정을 제대로 돌려놨군.’
정우는 가슴 어딘가가 뻐근해지는 와중에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다.
이 자리를 함께하고 있는 첫째와 둘째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 말이다.
그가 무구의 전원을 꺼두고 세 사람을 불러들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미안하다.”
“……뭐?”
더없이 불안한 기색을 보이는 맥.
정우는 그런 그를 보면서 상대가 과연 믿을까 싶은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난 더 이상 이 대륙의 최강자가 아니야. 나에 대한 통제권조차 잃었다.”
물론 마지막 문장은 반만 사실이었다.
정우는 지금이라도 자신이 원한다면 세 사람을 살려 둘 수 있었다.
하지만 결코 그럴 수 없기도 했다.
무구를 포기하고 세 사람을 살린다면 행성 구원에 실패할 테니까.
결국 행성 구원이라는 목적의식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모든 상황에서의 선택권은 무구에게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를 거꾸로 뒤집어 보면 무구야말로 오리지널 박정우였기에 현시점에 행성 구원의 방해물은 정우 자신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오리지널의 전원을 끌 수 있는 건 그뿐이었으니까.
아이러니.
그것도 전례 없이 뒤틀려 있는 아이러니다.
“…….”
정우가 기묘한 표정으로 멍하니 있자 맥이 석고상처럼 굳어 있는 무구와 그를 번갈아 보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래서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데?”
순위권 구원자답게 맥 테일러가 미래에 대한 질문부터 던진다.
이에 정우는 맥과 헬기를 차례로 바라봤다.
“내 무기가 너희를 죽이고, 난 그걸 지켜볼 거다.”
“……?”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그런지 맥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왜?’라는 눈빛으로 정우를 바라봤다.
“내 계약서는? 하다못해 헬기와 의사는 필요하지 않나?”
이 역시 한때 행성 구원자가 되고자 했던 존재다운 태도.
그는 이미 자신의 생존 따위엔 큰 미련을 두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제 내 의식이 꺼져도 전투는 계속된다. 굳이 약이 필요 없게 됐어.”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넌 충신을 가지고 있잖아.”
[충신]정수 칼날이 절대 부러지지 않습니다.
* 가격: 신체가 천천히 부식되며 극도의 고통을 수반합니다.
* 비고: 자살하지 않는다면 행성 폐쇄가 중단되는 순간을 충분히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맥 역시 충신 보유자였기에 약을 끊을 경우 박정우가 겪게 될 고통이 어떤 수준인지 잘 알았다.
그러자 정우가 어금니를 살며시 포개며 발음을 비틀었다.
“그 고통조차 내 힘으로 치환될 거야.”
첫째와 둘째의 보상을 의미하는 거다.
그리고 때맞춰.
덜컹.
헬기 문이 한 차례 더 삐걱대더니 기체 안쪽에서부터 마취 전문의 토드 파커가 걸어 내려왔다.
주변에 침입자가 보이지도 않고, 먼저 나간 맥 테일러가 정우와 대화만 하고 있으니 상황이 종료됐다고 판단한 거다.
“엇.”
주춤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오는 토드를 발견한 맥이 의미불명의 외마디를 뱉었다.
그러다 아차 싶어 잽싸게 정우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가 상대의 손끝이 메마른 나뭇가지처럼 괴상하게 길어지는 걸 보게 됐다.
취리릭.
순식간에 무구의 등 언저리에 닿은 정우의 손끝.
그러자 전신에 피가 새로 도는 것처럼 무구의 몸 안쪽에서 푸른 기운이 휘몰아쳤다.
“억……?”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기가 전혀 없던 무구가 갑자기 산 것의 기척을 내자 위화감을 느낀 맥이 뒷걸음을 쳤다.
그사이 정우는 무구가 다시 전투태세에 돌입하려는 걸 감지하고서 짤막한 지시를 내렸다.
“헬기부터 시작해서 약한 순으로 죽인다.”
-흥미롭군.
박민구의 얼굴을 한 무구가 정우 특유의 미묘한 웃음을 그대로 따라 한다.
그리고 이걸 본 맥은 정신이 무너져 내리는 듯해서 겁을 먹었다.
“대,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야……? 정말 이 방법으로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맥이 말한 ‘세계’엔 지구뿐만 아니라 인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정우는 자신이 아는 사실만을 이야기했다.
“적어도 성역은 보존될 거다. 이 녀석도 그 안에선 힘을 쓰지 못할 테니까. 만약 성역의 룰조차 무시할 수 있다 해도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
이 말에 맥은 잠시 말을 멈추고서 정우를 바라봤다.
“그럼 확실히 약속해. 적어도 인간은 살려 놓겠다고. 이렇게 발악해서 행성만 덩그러니 남겨 봐야 우리에겐 의미가 없는 거잖아.”
“……약속한다.”
물론 이 약속조차 별 효력이 없을 거라는 걸, 정우는 잘 알았다.
그런데 이 점은 맥도 잘 알고 있던 것 같았다.
정우의 대답이 나옴과 동시에 그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내민 것이다.
“계약 발동.”
맥의 짤막한 발음과 함께 그와 정우 사이에 새까만, 아니 단순히 까맣다고 표현하기엔 부족한 느낌의 공간이 펼쳐졌다.
“아…….”
정우의 탄식.
그것은 서면 계약서였다.
이례적으로 ‘갑’엔 맥이, ‘을’의 위치엔 정우가 적혀 있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이 다음과 같았기 때문이다.
「‘을’은 인류 보존이 보장되지 않는 행성 구원을 실행하지 않는다.」
「이 계약의 효력은 ‘갑’의 존재 유무와 관계없이 발생한다.」
다시 말해 이 계약을 받아들이면 정우는 맥이 사망하더라도 그의 유지를 이어야만 했다.
인류를 존속시킬 수 없다면 행성 구원 자체를 포기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제아무리 정우가 인간으로서의 몇 가지를 되돌려 받은 상태라지만 이런 ‘생떼’를 받아 줄 정도로 감정적이진 않았다.
“인류가 소멸하는 건 차악이고, 행성 자체가 사라져 버리는 건 최악이야. 그러니…….”
여느 때처럼 자신의 방식을 이야기하던 정우가 갑자기 입을 다문다.
「……계약.」
그의 의식 속에서 끔찍한 밀도의 의미들이 소용돌이 치고 있어서였다.
첫째와 둘째가 동시에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계약을 받아들이라고 말이다.
「계약을 해라.」
「주제넘지만 독특한 거래다.」
‘거래? 저게 어떻게 거래가 되지? 나는 받는 게 없잖아.’
정우가 반문하자 둘째가 특유의 차가운 느낌으로 답을 내놨다.
「우리가 즐거움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