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31
335화. 자해(2)
* * *
‘이것도 너희의 즐거움이 된다고?’
‘을’은 인류 보존이 보장되지 않는 행성 구원을 실행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두 초월자는 인류와 행성을 두고 고뇌하는 이쪽의 모습을 보고 싶은 걸까?
‘아니야. 일단 계약을 받아들이면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게 돼.’
이 계약은 인류를 포기할 경우 리스크를 안겨 주는 방식이 아니다.
인류를 품고 가지 않으면 그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행성 구원을 실행하지 않으면 이 세계의 모든 존재가 소멸할 테니까.
정우가 여기까지 생각하자 첫째가 특유의 묵직한 존재감을 흘리며 부연을 해 줬다.
「지구가 곤란에 처할 것이다.」
‘아.’
첫째답게 친절한 대답이었다.
두 존재가 이 계약을 진행하라고 종용하는 이유는 단순히 박정우에게 새로운 충격을 주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지구에게 압박감을 주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군.’
행성에서 가장 유력한 구원자인 박정우의 구원 실행 조건이 인류 보존으로 고정되면 지구도 인류를 살리는 데 목을 맬 수밖에 없게 된다.
인류 보존에 실패할 경우 높은 확률로 지구 자신도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인즉슨.
‘현재 지구엔 예비 타자가 없는 거군.’
예비 타자.
박정우가 고꾸라질 경우 그를 대체할 다음 순번의 구원자.
첫째와 둘째가 지구를 압박하기 위해 이 계약을 성사시키려는 것으로 미뤄 보아 지구에게 박정우 외의 다른 카드는 없는 게 분명했다.
‘…….’
새삼스럽지만 지구가 안쓰러워진다.
어찌 됐든 정우로선 의식 속에 자리 잡은 두 손님의 니즈를 충족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좋다, 계약하지.”
정우가 서면 계약에 동의하자 맥이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진심인가? 이 계약은 되돌릴 수 없어.”
“겁이 난 건 오히려 너 같은데.”
“…….”
정우의 말에 맥이 이를 악다물었고, 그사이 서면 계약서에 정우의 서명이 박혀 들어갔다.
사아앗.
“……끝까지 미친 자식이군.”
이에 맥도 불안감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의 서명을 마무리하면서 정우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다 서면 계약서가 허공으로 녹듯이 사라지며 계약이 성사됐음을 알리자 그제야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후우.”
긴 날숨이 뿜어져 나온다.
맥 테일러. 과거 미 대륙의 1위.
결국 행성 구원을 직접 하지는 못했지만 어떻게 보면 태생인 인간으로서의 도리는 다 한 셈이었다. 적어도 인류 존속의 확률은 높이지 않았는가.
대륙 최강자가 되기 위해 죽여 온 숱한 생명의 가치가 비로소 의미를 가지게 된 걸지도 모른다.
일개 인간, 일개 짐승으로선 무슨 짓을 해도 우주적 존재들과 거래를 할 수 없지만 이렇게 수만, 수억 개의 생명이 한데 모이자 행성 차원의 계약마저도 성사시킬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이제 지구도 인류와 한배를 타게 된 건가?”
맥이 마치 유언 같은 느낌으로 대사를 읊는다.
정우는 그런 그를 보면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우주에서 지구의 권한은 그리 대단하지 않아. 방금 계약은 지구에게 큰 부담이 됐을 거다.”
“…….”
정우의 답을 들은 맥은 표정을 굳혔다.
“그럼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뭐지? 얌전히 죽어 주면 되나?”
그러자 정우가 서면 계약 성사와 동시에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무구를 손으로 가리켰다.
“아니, 저놈이 두 사람을 죽이지 못하도록 막아.”
정우가 말한 ‘두 사람’이란 마취 전문의 토드 파커와 헬기 조종사 샬롯 터너였다.
“뭐?”
“서두르는 게 좋을 거다.”
이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 무구는 아직 샬롯이 타고 있을 헬기를 향해 칼날 형태의 팔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
어마어마한 밀도의 정수 반응에 깜짝 놀란 맥이 전신의 정수를 한꺼번에 불태웠고, 정우는 곧 전임 최강자의 무위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됐다.
촤아아아아악!
눈 깜짝할 사이에 맥의 오른팔에서 흉악스러운 칼날이 솟구치더니 무구의 검신을 대번에 밀쳐 낸 것이다.
정수 298억 개짜리 존재의 공격을 방해.
맥 역시 정우처럼 ‘충신’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절대 부러지지 않는 검신 말이다.
콰아앗!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두 개의 검신이 교차하자 무구가 무표정한 얼굴로 맥을 쳐다봤다.
-…….
“뭐.”
맥이 퉁명스레 말을 뱉기가 무섭게 무구의 몸이 아주 가늘게 떨렸다.
“……!”
그간 쌓아 온 경험상 이건 초고속의 신체 운용이 이어질 징조였다.
파아아앗!
맥은 본능적으로 전신에 보호막을 감았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그의 가슴팍에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콰아악!
무구가 그의 가슴과 명치 언저리를 왼손으로 움켜쥔 것이다.
“흐억!”
쿠드드득!
그가 애써 감아 둔 보호막은 찰나도 버티지 못하고 종잇장처럼 구겨졌고, 곧 상체의 피부가 가슴 쪽으로 말려 들어가 괴상한 무늬를 만들어 냈다.
무구가 맥의 피부만 말아서 움켜쥔 거였다.
후두두둑.
가슴 안쪽에서 밀려 나온 핏물이 빗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다.
“이…… 이익.”
그렇다고 가슴이 통째로 뚫린 것도 아니라서 맥은 온전한 정신으로 이 모든 고통을 받아 내야만 했다.
“뒈, 뒈져!”
맥이 발발 떨리는 승모근을 비틀어 칼날이 달린 오른팔을 휘두르려 하자 무구가 마치 ‘빨리 감기’를 한 것처럼 비현실적인 속도로 몸을 휘둘렀다.
휘익, 팍!
맥의 가슴을 붙든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친 것이다.
“케엑!”
삽시간에 바닥에 메다꽂혀진 맥의 입에선 핏물이 튀어 올랐고, 곧 그의 오른팔을 시퍼런 궤적이 훑고 지나갔다.
스아앗!
“어……?”
처음으로 당황한 목소리를 내는 맥.
이어선 축축한 물기가 아주 빠른 속도로 그의 겨드랑이와 등을 적셨다.
대량의 정수가 몸 안쪽으로 돌아와 있음을 깨달은 건 그다음이다.
칼날을 뽑아 올렸던 오른팔이 더는 몸과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이……!”
사태를 파악한 맥이 두 눈에서 어마어마한 독기를 뿜어냈지만 거기까지였다.
홰애애액!
무구가 그의 가슴을 쥔 채 전방으로 질주하기 시작한 탓에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게 됐으니까.
파바바박!
땅을 찍어 누르듯이 하며 달리는 무구.
분명 박정우가 헬기부터 시작해서 약한 순서대로 죽이란 지시를 내렸기에 맥을 살려 두고 있는 거였다.
다시 말해 무구는 본체인 박정우의 지시를 ‘자율적’으로만 따르는 것이다.
“어, 어어?”
이건 조금 전 헬기에서 내렸던 마취 전문의 토드 파커의 음성.
그의 음성이 맥에게까지 닿을 정도로 헬기와 무구의 거리가 가까워져 있었다.
퉁, 퉁, 퉁!
이젠 놈이 땅을 밟을 때마다 착지 상태인 헬기의 동체가 통째로 흔들거렸다.
그러다 마침내.
홰애애액!
무구가 아까 맺음 짓지 못했던 공격을 다시 시도했다.
허공을 깔끔하게 가르는 푸른 궤적.
이 궤적은 헬기에서 약 4미터 떨어져 나온 토드 파커를 가까스로 비껴가도록 사선을 그렸고, 순식간에 헬기를 동강 냈다.
스악!
“……!”
섬뜩한 절삭음과 함께 헬기가 비스듬한 절단면을 보이며 두 조각으로 나뉘었다.
투웅, 퉁!
커다란 쇳덩어리 두 조각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쓰러지면서 굉음이 터져 나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쇳덩어리 중 하나에서부터 땅딸막한 실루엣이 힘겹게 기어 나왔다.
다름 아닌 조종사 샬롯 터너였다.
“뭐, 뭐야……?”
그녀는 무릎으로 땅바닥을 밀어내면서도 치열함보단 의아함을 짙게 풍겼다.
자신의 헬기를 비호하고 있던 존재는 미 대륙의 최강자였던 맥 테일러조차 어떻게 하지 못하던 새 괴물 아니던가.
시애틀 학살자로 불리던 파견자 박정우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박정우는 대체 뭘 하고 있는가?
“엇.”
이윽고 헬기 잔해에서 몸을 완전히 빼낸 샬롯이 뭔가를 발견하고서 입을 쩍 벌렸다.
이쪽을 바라본 채 우두커니 서 있는 무구와 녀석의 손아귀에 가슴이 말려 들어가 있는 맥 테일러.
말도 안 되는 광경에 샬롯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잠시 뒤 무구의 외형이 왜인지 박정우와 닮아 있다는 걸 깨달았을 즈음엔.
“샬롯! 도망쳐!”
오른편 어딘가에서 토드의 음성이 날아들었다.
사실 비명에 가까운 소리였고, 이에 그녀가 토드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을 땐 웬 푸른 벽면 같은 게 그를 휩쓰는 중이었다.
“……?”
정확히는 무구가 휘두른 검신이었지만 샬롯의 눈엔 널찍한 벽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홧.
토드는 정말 아무런 존재감 없이 검신에 잘려 사라졌다.
물론 시체의 일부는 그 자리에 남았고, 덕분에 샬롯은 자신의 연인이 두 갈래로 나뉘어 쓰러지는 걸 생생히 봐야만 했다.
조금 전 동강이 난 헬기처럼 말이다.
쩍.
토드 파커의 입술과 귀가 각자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고, 두 눈과 뒤통수 사이의 간격도 빠르게 벌어졌다.
처음엔 토막 난 땔감처럼 절단면이 깔끔하게 벌어지더니 그 ‘벌어짐’이 목과 가슴 언저리에 다다르자 그때부턴 두 덩어리의 몸이 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두둑, 두두둑.
간간이 나던 둔탁한 소리는 아마도 몸속에 남은 뼈들이 부딪치는 소리였을 거다.
그리고 이 소리들이 가라앉기도 전에 샬롯의 괴성이 끼얹어졌다.
“아아아악!”
비로소 그녀의 눈에 공포가 차오른다.
단순히 연인이 눈앞에서 죽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짐에서 오는 원초적인 공포였다.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발을 디디고 있던 기반 자체가 송두리째 무너져 내린 거다.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바, 박정우! 박정우!”
샬롯이 애타게 박정우의 이름을 울부짖는다.
이 사태를 해명해 줄 누군가를 찾고 있는 거였다.
맥이 넝마가 되어 정체불명의 괴물에게 붙잡혀 있는 지금, 그녀가 어떤 형태로든 의지할 수 있는 건 박정우뿐이었다.
“박정……!”
그녀가 절대자라고 생각했던 존재의 이름을 세 번째 부르려는 찰나.
“……!”
맥을 우악스럽게 잡아챈 푸른 괴물의 뒤편으로 그의 모습이 보였다.
한쪽 손이 고무줄처럼 쭉 늘어진 채로 말이다.
문제는 그 손의 끝이 맥을 제압한 괴물의 등 어딘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었고.
“……아.”
막연하나마 뭔가를 직감한 그녀는 멍해진 눈으로 맥 테일러를 바라봤다.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죠……?”
그러자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맥이 고개를 가까스로 들어 올렸다.
“당신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일 거야. 어쨌든 인류는 살아남게 됐다.”
“개소리 마. 그건 어차피 나랑 상관없…….”
쐐애애액!
샬롯은 대사를 끝까지 마치지도 못하고 혀 가 굳어 버렸다.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무구가 팔을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몸은 이제 상반신과 하반신이 말끔히 나뉘어 있었고, 곧 상체부터 뒤편으로 비스듬히 넘어갔다.
푸욱.
질펀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뒤통수를 처박은 샬롯은 다소 경박한 소리를 냈다.
“트흡!”
죽기 직전, 들숨과 날숨이 거의 동시에 오간 탓이었다.
그러곤.
팟.
미량의 정수가 담긴 푸른 구체 하나를 뿜어냈다.
이에 맥이 메마른 음성으로 정우를 향해 말을 걸었다.
“너와 융합된 녀석들의 정수는…… 네가 그대로 쓰게 되나?”
“그렇더군.”
“그럼 놈들은? 네가 융합한 녀석들은 아직 살아 있고?”
“그렇다고 봐야겠지.”
그렇다고 봐야 한다…… 상당히 모호한 답변이었다.
맥은 정우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어서 몸을 뒤편으로 비틀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무구가 그의 가슴팍을 꽉 쥐고 놔주지 않아 그럴 수가 없었다.
“날 융합해 줄 순 없나? 이 행성이 어떻게 되어 갈지 보고 싶다.”
“그건 안 돼.”
“……왜지?”
“넌 아직 인간이니까. 융합은 다른 종을 대상으로만 사용할 수 있다.”
“그럼 난…….”
“고생 많았다.”
정우의 묵직한 작별 인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맥을 움켜쥐고 있던 무구의 손아귀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으, 으어, 으아아악!”
제아무리 대륙 최강자였던 자라고 해도 고통에 면역이 되어 있진 않다.
어차피 힘으로 맞서 봐야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걸 깨달은 맥은 무구가 어서 죽여주길 바라며 정수 활성화를 극도로 절제했고, 정우는 이 모든 과정을 여실히 느껴야만 했다.
두 눈 대신 정수 레이더를 사용하는 탓에 맥의 정수 흐름을 그대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욱, 케에에엑!”
무구의 손길에 찢기기 시작한 맥이 입술을 하늘로 향한 채 토사물을 뿜어낸다.
허공에 붕 떠 있는 그의 등에서부턴 핏물이 분무기처럼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촤앗!
“…….”
온갖 ‘악’을 보아 온 정우마저 안면 근육에 힘이 잔뜩 들어갈 정도로 소름 돋는 장면이었다.
이건 정우의 의중을 파악한 무구가 일부러 선보이고 있는 ‘퍼포먼스’였다.
맥에 대한 무자비한 처형과 그걸 지켜보고 있는 박정우, 이 모두가 첫째와 둘째를 위한 공연이라는 거다.
“씨발.”
자신의 의식 속에서 두 존재가 이 광경을 관람 중일 거라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는 역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결국.
“우읍!”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가락 사이로 누런 토사물이 새어 나오고 말았고, 이때에 이르러 볼품없이 일그러진 맥의 몸뚱어리에서부터 시퍼런 정수 구체들이 솟구쳤다.
파팟, 팟, 팟!
전임 최강자답게 구체의 수도 엄청났고, 덕분에 푸르스름한 그늘이 정우와 무구 위로 내려앉았다.
“우웨에에엑!”
더는 구토를 참지 못하게 된 정우가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서 입과 목구멍을 벌린다.
그러자 그의 머릿속에서 까마득할 정도로 깊은 의미가 밀려 올라왔다.
「존재를 열어라, 네가 원하던 힘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