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32
336화. 자해(3)
* * *
‘존재를 열라니…….’
고개를 갸웃한 정우의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곧이어 생전 느껴 보지 못한 유형의 통증이 그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
물론 이것이 통증이라는 진단조차도 아주 추상적이고 확신이 없는, 순간적인 느낌에 가까웠다.
정우로선 이 감각을 무어라 정의할 수가 없어서 통증이라고 여겼을 뿐이다. 일단 매우 불쾌한 느낌이었으니까.
단순히 아픈 것과는 많이 달랐다.
이 느낌은 아프다기보다는 역겹다, 소름이 돋는다, 끔찍하다, 라는 수식에 더 가까웠다.
우연히 귓가에 벌레가 붙었는데, 놈이 곧장 귓구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음을 깨달았을 때의 기분.
잽싸게 고개를 틀었지만 벌레는 이미 귓속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고, 곧 귀 안쪽 어딘가에서 놈의 자그마한 기척이 느껴질 때의 심정.
그리고 잠시 뒤 찾아오는 심상치 않은 통증.
놈이 지금 어디까지 들어간 거지?
설마 계속 안쪽으로 파고드는 중인 걸까?
언제까지?
찌잉.
이번엔 아까보다 훨씬 더 커다란 통증이 찾아오고, 대번에 패닉.
정우가 지금 느끼고 있는 ‘통증’이란 건 저런 복합적인 느낌이 수백 배 증폭된 형태였다.
그러니까 이건 한마디로.
“으읍.”
두려움.
정우가 통증이라고 생각했던 것의 정체는 두려움이었다.
두려움의 차원이 높아지고 그 부피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불어나면 통증처럼 느껴질 수가 있던 것이다.
정우가 이를 악문 채 근원 불명의 두려움을 버텨 내고 있자 첫째와 둘째가 동시에 거대한 울림을 만들어 냈다.
「열어라.」
상당히 위압적인 태도였다.
이들이 쏟아 낸 의미의 유속도 정우를 송두리째 휩쓸 기세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옥죄던 두려움의 크기가 인지조차 불가능한 규모로 바뀌었다.
화아아앗!
“……학!”
정우는 자신도 모르게 가냘픈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결국 두려움에 굴복을 한 것이다.
“아, 아아…….”
두 눈에선 눈물이 쉬지 않고 흘렀고, 바지는 일찍이 질펀해져 있었다.
정우는 제자리에 선 채로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다가.
팟.
눈물로 인해 일그러진 시야의 한 지점에 까만 점이 생기더니 그것을 중심으로 어둠이 빠르게 번지는 걸 보게 됐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모든 기척과 흐름이 소멸했다.
두 다리를 지탱하고 있던 땅의 존재감, 코를 통해 들어와 폐포를 채우던 공기를 비롯한 세계 전부 말이다.
심지어 정우 자신의 존재마저 확신할 수 없게 됐고, 이때에 이르러서야 그는 존재가 열린다는 게 어떤 뜻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문자 그대로 열려 있었다.
그럴 능력이 있고 의지가 있는 존재라면 누구나 박정우를 들여다볼 수 있고, 들어올 수도 있었다.
존재에 대한 주권을 일시적으로 포기한 거다.
‘하……!’
팟!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인 느낌이 든다.
마치 우주의 어느 지점에 놓인 것만 같았다.
정우가 자신을 주시 중인 무수한 존재들을 감지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어느새 사위를 완전히 채운 어둠 너머에서 우주의 온갖 존재가 이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만 그 누구도 감히 박정우에게 ‘들어올’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지급을 집행한다.」
적법한 절차를 통해 박정우 안에 자리 잡은 첫째와 둘째 때문이었다.
두 존재가 으름장을 놓듯 의미를 뿌리자 그 어떤 존재도 일정 거리 안쪽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먹이를 확보한 사자 무리가 하이에나 떼를 뚫고 가려는 것만 같은 상황.
물론 이 와중에도 사위를 포위한 존재 중 일부는 맹렬한 기세로 의미를 쏘아 내고 있었다.
유속이 너무 빨라 정우가 해석할 수는 없었지만 그 의도는 분명히 느껴졌다.
이 사태 자체에 불만을 표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 걸까.
정우가 의아함을 가진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자 곧 까마득하게 먼 어딘가에서 뭔가가 서서히 밀려들어 왔다.
‘아.’
그건 바로 정수 덩어리였다.
푸른빛을 띠는 지구의 것과 달리 무색에 가까운 에너지였지만 정수와 같은 유형, 적어도 정수로 변환될 수 있는 물질이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첫째와 둘째가 즐거움에 대한 보상으로 지급하려던 게 대량의 정수였던 것이다.
슈아아아앗…….
두 초월자가 호출한 대량의 에너지가 제법 가까이 왔을 때쯤, 지속적으로 불만을 표하던 존재 중 하나가 자신의 모습을 일순 드러냈다.
정우가 읽어 낼 수 있을 정도로 단순명료한 의미를 쏘아 보내는 것으로 말이다.
「적절하지 않다!」
문장 자체는 저것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보다 복합적이었다.
‘네놈들이 바로 그 업체구나.’
정우는 상대의 대사에 함축된 감정과 생각, 입장을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정체를 가늠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첫째와 둘째의 포상에 노골적으로 반대 의견을 내고 있는 건 ‘업체’였다.
지구 폐쇄 진행을 위해 평가관들을 파견했다던 모종의 연합체.
모르긴 몰라도 저들에겐 지구의 폐쇄 절차가 타 행성의 경우와 크게 엇나가지 않도록 해야 할 의무 같은 게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첫째와 둘째가 적정선을 넘고 있는 건가? 임의로 정수를 급여하고 있기 때문에?’
알 듯 모를 듯, 일개 행성 주민인 정우로선 우주적 존재들의 서열이나 권한이 어떻게 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어찌 됐든 정우의 판단에도 이번 포상은 룰을 제법 많이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정수는 행성에 대한 폐쇄 판정을 가름하는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그가 아는 한, 행성 폐쇄 조건은 두 가지였다.
첫째, 지정된 기한 내에 모든 진입로가 닫히지 않았을 경우.
둘째, 행성이 보유한 정수가 바닥났을 경우.
그러나 행성이 보유한 정수 총량이란 건 주민들의 전투력 총합과 다를 바 없기에 사실상 정수는 첫째와 둘째 조건 모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번 사태는 폐쇄 절차를 관장하는 자들 입장에서 대형 사고일 수밖에 없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지? 이런 사고를 치는 것도 그저 재미를 위해서인가?’
쉬아아아…….
그사이 정수 덩어리가 지척까지 다가왔고, ‘업체’ 소속의 존재들이 더욱 극렬한 의미를 토해 냈다.
그럼에도 끝끝내 첫째와 둘째의 행동을 제지하진 못했다.
두 존재의 존엄이 업체보다 위에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아무리 대형 사고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녹스를 통한 거래의 결과라서 두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인가?
이것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
이 순간 정우는 온전한 관객의 입장에서 우주적 대사고가 터지는 광경을 지켜봤다.
후우우우욱.
이윽고 첫째가 정우의 곁을 떠나 크기와 성질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공간 언저리를 유유히 헤엄치기 시작했다.
여전히 놈의 모습을 인지할 순 없었지만 첫째 특유의 거대한 몸집은 여실히 느껴졌고, 사위를 둘러싼 다른 존재들이 놈과 부딪치는 걸 두려워한다는 것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첫째는 호위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설마.’
설마 일대의 존재들이 갑자기 덤벼들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정우가 다시금 두려움을 느끼려는 찰나, 그의 곁에 남아 있던 둘째가 손이라고 여겨지는 무언가를 뻗어서 정수 덩어리와 접촉했다.
팟.
이 순간 정우는 첫째가 몸소 호위에 나섰던 이유를 깨닫게 됐다.
둘째가 정수를 만지는 순간 정우에게도 정수 덩어리의 실체가 인지됐는데, 그 양이 무려 289억 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거의 정확히.
‘무구가 가져간 것과 똑같잖아.’
정우의 구원 타자임과 동시에 골칫덩어리이기도 한 무구.
그런 무구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정수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게다가 이건 행성 차원으로 봐도 어마어마한 양.
파견 업체가 그토록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하던 이유가 이것이었던 거다.
‘이걸 내게 전부 주는 건가?’
정우가 이렇게 묻자 둘째가 낮게 웃더니 마치 셔터를 내리듯 팔을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홰액!
그러자 사위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면서 그 너머로 익숙한 풍경이 나타났다.
‘엇?’
그것은 바로 지구였고, 정우의 시야도 때를 같이해 까맣게 변했다.
그의 존재가 다른 차원에서 지구로 돌아오게 되면서 이 행성의 기본 법칙에 다시 종속된 것이다.
육체 말이다.
“…….”
눈 깜짝할 사이에 고향으로 돌아온 정우는 정수 레이더를 전개해 주변을 둘러봤다.
가장 먼저 보게 된 건 무구였다.
녀석은 여전히 전원이 들어간 상태였지만 더는 죽일 대상이 없어서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그리고 그 옆엔.
“……?”
웬 구슬 같은 게 홀연히 떠 있었다.
받침대도, 날개도, 그렇다고 동력원으로 보이는 것도 달려 있지 않은 채 혼자서 말이다.
스앗.
이에 정우가 레이더의 밀도를 더욱 끌어 올리자 비로소 구슬의 정체가 드러났다.
“크악!”
몹시 매운 음식을 입에 넣은 것처럼 정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뒷걸음을 친다.
강화한 레이더가 구슬 안에 들어 있던 초고밀도의 정수를 감지해 낸 탓이었다.
“미, 미친.”
298억 개의 정수가 이 자그마한 구슬 안에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를 열어 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아주 강력하게 봉인되어 있기도 했다.
보나마나 첫째와 둘째가 실력 행사를 한 걸 거다.
“이게 뭐지?”
정우가 의식 속에 들어와 있을 두 존재에게 물음을 던지자 구슬 표면에 아주 익숙한 문자가 나타났다.
스륵.
0/29,893,272,335
“아.”
이 시점까지 달려오는 동안 지겨울 정도로 많이 보아 온 인터페이스였다.
정우는 이를 보자마자 두 초월자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알아차렸다.
「목표가 있어야 더 열심히 일을 하지 않겠나.」
둘째가 특유의 싸늘한 기운을 내뿜는다.
다음엔 첫째가 묵직한 존재감을 뽐내며 어딘가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젠 정우도 놈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두 존재와 한층 더 가까워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놈들의 대화도 어느 정도 엿들을 수 있게 됐다.
「개방 때문일 거다. 위치가 완전히 노출됐군.」
이건 둘째가 첫째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어선 첫째가 둘째에게 대답했다.
「꽤 많은데.」
「그럼 더 좋지.」
「장난감이 부서질 수도 있다.」
「내 생각은 달라.」
“…….”
정황상 녹스 무리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 걸 거다.
“녹스가 오고 있는 건가?”
정우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려고 하자 둘째가 구슬을 조작하는 게 느껴졌다.
「일을 해라. 이건 첫 번째 보상이다. 네게 주어지는 정수의 양은 우리의 즐거움에 비례할 것이다.」
그러더니 구슬에 적혀 있던 숫자에 변화가 생겼다.
슷.
2,145,410,633/29,893,272,335
21억 개 즉시 지급.
마치 월급이 막 입금된 통장처럼 정우의 정수 총량이 빠르게 치솟는다.
수십 분 전까지만 해도 59억 개에 불과하던 정우의 정수량은 어느새 176억 개가 되어 있었다.
용과 재규어, 전임 최강자인 맥 테일러의 정수까지 모두 흡수한 결과였다.
그리고 여기에 첫 번째 보상으로 인한 추가 급여가 실행되자 정우의 정수 총량은…….
「19,750,557,096」
‘197억……!’
이전의 위용만큼은 못되지만 자기 앞가림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양이었다.
물론 전신이 ‘충신’으로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무구를 제압하려면 이보단 훨씬 강해져야 할 테지만 말이다.
「준비해라.」
급여를 마친 둘째가 정우에게 주의를 준다.
첫째는 여전히 아까 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고, 곧 그쪽에서부터 아주 날카로운 기척이 일어났다.
-손님이다.
죽은 듯이 서 있던 무구가 서서히 존재감을 되살리는 걸 보면 확실히 때가 온 듯했다.
그리고 정말로 얼마 지나지 않아.
콰콰콰콱!
북서쪽의 대지가 박살이 난 채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열 마리 가까이 되는 녹스가 정우와 무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