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33
337화. 자해(4)
* * *
오전 8시 31분.
시베리아 횡단로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7번 초소.
이곳에서, 민구는 아직도 숨을 쉬고 있었다.
물론 아주 간신히 말이다.
“……흡, 흐웁.”
너무나도 긴장한 탓에 심장 박동이 귓불까지 올라왔고, 호흡 역시 가빠졌지만 그는 최대한 기척을 죽이려 애썼다.
왜냐하면…….
스르르릅, 스르릅.
불과 30여 미터 앞에 9일 차 침입자인 녹스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붉은 모래 파도의 형상을 한 녹스는 마치 유영 중인 가오리처럼 전신을 아주 유연하게 꿈틀댔다.
“마, 맙소사.”
“저게 새 침입자야……?”
민구의 뒤편에서 러시아인들이 억센 억양으로 수군거린다.
이들은 1번 초소 근무자들의 급보를 받고 부리나케 횡단로로 들어온 크렘린 소속의 각성자들이었다.
웬 동양인이 초소를 다 깨부수며 시베리아의 진입로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에 깜짝 놀라서 총출동한 것이다.
그러다 오전 8시 10분쯤, 7번 초소에 막 도착한 박민구를 따라잡는 데 성공했고, 그와 약간의 무력 충돌과 설전을 주고받던 와중에 녹스가 도착해 버린 상황이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리가 먼저 공격해야 하나?”
러시아 측의 누군가가 혼잣말을 내뱉는다.
인류, 아니 행성 주민 공통의 적인 침입자가 눈앞에 나타난 지금, 이들에게 동양에서 온 불청객은 이제 두 번째 문제에 불과하게 됐다.
“…….”
당장이라도 민구에게 덤벼들 것 같던 기세가 사그라지고 새 목표물에 대한 경계심이 사위를 감싼다.
그러자 민구가 러시아인들을 향해 손을 슬쩍 내저었다.
시선은 여전히 녹스에게 붙여 둔 채였다.
“기다려. 지금 놈이 주시 중인 건 나니까.”
“뭐……?”
민구의 말에 러시아인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봤다가 다시 녹스를 바라봤다.
그러나 이들은 그 어떤 시선도 감지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녹스에겐 눈이랄 것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민구만큼은 분명히 느끼는 중이었다.
녹스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릉.
자신의 등허리에 올라탄 민구가 경직됐음을 알아챈 냄새가 이를 드러냈다.
이에 민구는 냄새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기다려. 아직이다.”
혀가 바짝 말라서 발음이 뚝뚝 끊긴다.
그리고 이때쯤, 녹스에게 변화가 생겼다.
쉬리리릿.
“……!”
동시에 움찔하는 좌중의 모두.
모래 파도 형태를 띠고 있던 녹스가 갑자기 몸을 한 데로 모으더니 그 안에서부터 시커먼 구체를 뱉어 낸 것이다.
직경 20미터 크기의 완벽한 구형체.
그러더니 곧 몸체 표면에 흰색 표식을 띄워 올렸다.
다름 아닌 초월적인 문자였다.
「가진 것을 보여라. 내 배를 채워야만 오늘을 지날 수 있을 것이다.」
‘배를 채워야 한다고……?’
비단 민구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대체로 비슷한 생각을 갖게끔 하는 문구였다.
호랑이나 괴물 따위가 인간을 상대로 음식 같은 걸 요구하는 민담은 세계 어디에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이 침입자는 장내의 인간들에게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뭐, 뭘 보여 달라는 거지?”
러시아 측의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녹스에게 반문했으나 놈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민구에게 붙여 둔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날 원하는 건가.’
투욱.
뭔가를 직감한 민구가 냄새의 등에서 천천히 내려오자 그제야 녹스도 움직였다.
스르릇.
민구를 향해 아주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한 거다.
“어, 어어?”
“저, 전투 준비!”
녹스와의 거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한 건 러시아 측의 각성자도 마찬가지였기에 장내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반대로 민구는 녹스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놈에게 당장은 교전 의사가 없음을 확신했다.
놈과 자신의 사이에 또 다른 표식이 생겨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앗.
「존재를 분해하여 상품을 생성.」
아까와 같이 초월적인 문자로 적혀 있었으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보다 복합적이었다.
민구는 이 의미를 받아들이자마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완벽히 이해할 수가 있었다.
‘거래구나. 내가 날 포기한 만큼의 대가로 생존율을…….’
여기까지 생각한 민구는 불현듯 정우를 떠올렸다.
현재 시각, 오전 8시 33분.
박정우라면 분명 일찌감치 진입로 근처에서 침입자를 기다렸을 테고, 따라서 이 기묘한 거래를 이미 마친 상태일 테니까 말이다.
녀석은 무엇을 팔았을까.
아니, 어디까지 포기했을까.
분명한 건 녀석은 여전히 살아 있을 거란 점이었다.
반드시 살아서, 여느 때처럼 구원자로서 기능하고 있을 것이다.
파아아앗……!
그사이 등 뒤에선 러시아의 각성자들이 정수를 한껏 끌어 올리고 있었다.
아마도 이쪽과 녹스를 한꺼번에 처리해 버리려는 생각일 거다.
그러나 녹스가 내민 표식엔 그 어떤 힘도 이미 개시된 거래를 방해할 수 없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민구는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었다.
캬릉!
우려 가득한 냄새의 짤막한 울음과 함께 민구의 손끝이 표식에 닿는다.
그리고 곧바로.
쏴아아악!
뒤편에서부터 쏘아져 나온 온갖 정수 공격이 녹스와 민구, 냄새를 향해 날아들었고, 이 순간 ‘바깥’의 시간이 완전 멈췄다.
정확히는 녹스와 민구를 제외한 모든 사물이 정지한 거였다.
겉보기엔 같은 자리에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론 시공간이 분리됐다고 해야 할까.
민구로선 상상도 못한 현상이었기에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고, 그사이 또 다른 문구들이 허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파팟, 팟, 팟.
「간이 거래」
|판매자: 박민구
|구매자: 녹스
* 본 거래는 우주가 보증합니다.
이번 거래 계약의 서두였다.
이건 분명 우주 차원에서 벌어지는 사건일진대, 이쪽의 이름 석 자가 떡하니 적혀 있으니 기분이 묘해진다.
“…….”
민구는 정수 창과 파동 따위가 허공에 멈춰 있는 뒤편을 흘깃 돌아본 뒤 다시 녹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조금 전보다 문자가 훨씬 많아져 있는 게 보였다.
|부성애- 59,000
|시간 개념- 17,420
|팔 하나- 8,300
|다리 하나- 12,500
|모든 눈- 51,000
|용맹함[A]- 25,700
|잔혹성[B]- 3,600
|목적의식[B]- 8,700
|판단력[A]- 32,070
|정수 감응력[A]- 25,000
|즉시 사망- 160,000
‘이건…….’
민구 자신을 분해해 만든 상품의 목록이었다.
‘부성애가 있네.’
민구는 상품 목록 최상단에 놓인 부성애를 보고서 침음했다.
자신에게 부성애가 있다는 것도 제법 놀랍긴 했지만 그보다 이건 정우에겐 있을 수 없는 요소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상품 목록이란 건 판매자의 특징에 따라 구성이 판이할 수 있다는 거다.
따라서 민구로선 정우의 상품 목록이 무엇이었을지 쉽게 유추할 수가 없게 됐다.
물론 녀석도 본질적으론 여전히 인간일 테니 팔, 다리, 눈 같은 상품은 그대로 진열됐을 거란 생각까진 들었다.
그리고 이 생각을 하자 정말 오랜만에 마음이 미어졌다.
녀석이라면 수족과 눈 따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팔아 버렸을 것 같아서였다.
‘…….’
정말로, 정말 그랬을까?
팔과 다리가 없고, 눈마저 멀어 버린 아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러자 눈가의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이걸 팔아서 내가 뭘 살 수 있지?’
이윽고 마음을 다잡은 민구의 질문.
이에 녹스가 새 문구들을 띄워 올렸다.
파앗.
|융합- 32,500
종의 경계가 없는 존재로 거듭납니다.
조건에 부합하는 대상과 융합할 수 있게 됩니다.
|녹스의 위력 50% 감소- 21,045
현시점 거래 상대로 지정된 녹스의 위력을 감소시킵니다.
|현재 예정된 미래 열람- 40,740
2번 법칙에 의해 예정된 최우선 미래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구매자 교체- 80,000
판매자가 마주한 구매자를 다른 존재로 교체합니다.
거래 의사가 있는 구매자 중 가장 깊은 존재가 방문합니다.
|완전 봉쇄- 170,000
9일 차 행성 폐쇄 절차를 무효로 합니다.
10일 차가 개시되는 시점까지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으음.’
민구는 만만치 않은 가격에 침음했다.
그러면서도 굳이 살 필요가 없는 항목을 빠르게 골라냈다.
그의 목적의식은 ‘B’에 불과했지만 적어도 본인이 희망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들이 주문한 시베리아에서의 임무를 완수하고, 녀석에게 다시 돌아갈 의무 아닌 의무가 있었다.
일이 잘 끝났노라고, 빌어먹을 구원자로서의 그 귀한 시간은 보다 중요한 일에 써도 된다고 알려 주고 싶었다.
이 애비가 시베리아의 문제 정도는 해결해 줄 수 있는 존재였노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러려면.
‘이 괴물부터 박살 내야 해.’
별 고민 없이 제외할 수 있는 항목은 일단 세 가지였다.
|현재 예정된 미래 열람- 40,740
|구매자 교체- 80,000
|완전 봉쇄- 170,000
하지만 완전 봉쇄를 제외한 이유는 온전히 정우 때문이었다.
현시점에 녹스가 이쪽에 나타났다는 건, 앞서 거래를 마친 정우가 완전 봉쇄를 구매하지 않았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민구는 아들로서만이 아니라 구원자로서 기능하는 박정우도 완벽히 신뢰했다.
정확히는 구원자 박정우의 판단력을 신뢰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게 정말 필요했다면 놈은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샀을 거야. 그러니 값이 비싼 건 큰 문제가 안 돼. 놈은 그저 이게 필요 없다고 생각한 거다.’
그렇다면 남게 되는 건 두 가지다.
|융합- 32,500
|녹스의 위력 50% 감소- 21,045
이 중에서 ‘융합’을 남겨 둔 건 민구가 정말이지 진보적인 사고를 한 결과였다.
민구가 융합의 대상으로 고려한 건 다름 아닌 냄새였으니까.
일단 신체 중에서 눈은 팔 생각이 없었다. 정우를 적어도 온전한 눈으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팔이나 다리는 판매 후보에 올라 있었고, 이 결정이 정말 실행될 경우 그에 따른 리스크를 상쇄할 대책이 필요했다.
이를테면.
‘만약 내가 짐승과 융합을 하면 융합 대상의 신체와 엉겨 붙는 것도 가능한가?’
엉겨 붙다…… 워낙 긴장한 탓에 되는대로 뱉은 표현이었지만 크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러자 녹스 대신 담당 평가관 ‘파319’가 답을 해 왔다.
-융합 이후의 신체는 융합 주체의 의식 상태에 따라 변화합니다.
‘의식 상태에 따라 변화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모습을 정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민구가 되물었으나 평가관의 부연은 이어지지 않았다.
필요한 설명은 충분히 했다는 뜻이리라.
‘이 개…….’
감정이 마구 꼬이기 시작한다.
꽈득.
민구를 이를 악물면서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부당하다, 라는 생각에 매몰될 여유조차 없어서였다.
이 거래에도 제한 시간이 있다는 것을 녹스가 넌지시 느끼게 해 주고 있었으니까.
주어진 것 안에서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유일한 길.
민구는 빠르게 계산했다.
융합과 위력 감소를 모두 사는 데 필요한 포인트는 53,545.
적지 않은 피해를 감수해야겠지만 우선 시베리아의 진입로만 닫으면 어떻게든 활로가 뚫릴 터였다.
왜냐하면 오늘 오후 3시쯤이면 잔류 기한이 만료되면서 파견 지역을 재선택할 수 있게 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다리 둘을 다 팔아 봐야 2만 5천……. 양팔까지 다 팔아도 1만 점이 넘게 모자라.’
결국 무언가를 더 팔아야만 한다.
‘…….’
민구는 한동안 고민하다가 마지막 판매품을 골라냈다.
그건 바로.
‘양팔과 두 다리, 그리고 시간 개념을 팔겠다. 넌 융합과 위력 감소를 내놔.’
|시간 개념 – 17,420
시간 개념.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는 능력이 약 1만 7천 포인트에 팔렸고, 이를 받아들인 녹스가 최종 확인 문구를 띄웠다.
「거래 확정인가? 승인된 거래는 되돌릴 수 없고, 구매한 상품은 어떤 형태로든 보전된다.」
“확정이다.”
「거래가 승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