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35
339화. 지구식 거래(2)
* * *
20초.
즉결 처형.
두 가지 키워드가 녹스들의 뇌리에 새긴 메시지는 아주 명확했다.
이제 수명이 20초밖에 남지 않았다.
주어진 시간 안에 뭐가 됐든 ‘값’을 만들어 내지 못하면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문제는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자보다도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해야 한다는 점.
삑, 삑.
하필 정우가 매초 알람이 울리도록 시계를 조작해 둔 탓에 장내의 분위기는 한층 긴박해져 있었다.
삑, 삑.
삑.
시간이 계속 흐른다.
네 마리의 녹스는 마치 일생일대의 시험을 맞이한 수험생처럼 눈앞의 과제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물론 실제로 목숨이 달려 있기도 했다.
「…….」
우주적인 존재로서 처음,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으로 느껴 보는 걸지도 모르는 시간의 소중함.
놈들이 그 어떠한 반항도 없이 각자의 살길을 모색하는 동안, 정우는 기묘한 기분에 휩싸인 채 이 말도 안 되는 현장을 양껏 만끽했다.
그는 여전히 ‘오리지널’이 아니었고, 따라서 이전의 박정우만큼 평정심을 유지하진 못했다.
실은 녹스들에게 환영 인사를 건넨 직후부터 그의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전처럼 겁이 나서는 아니었다.
‘……우주의 존재도, 통제할 수 있어. 본질적으로 크게 다른 존재가 아닌 거다.’
오히려 흥분한 쪽에 가까웠다. 사고의 영역이 한 단계 높아졌다고 해야 할까.
비로소 시야가 탁 트인 느낌이었다.
삑, 삑, 삑.
시간이 계속해서, 빠르게 흐른다.
그러다 마침내 마지막 알람이 대기를 타고 사방에 전해졌다.
삑.
20번의 소리가 모두 난 것이다.
“동작 그만. 즉시 리스트를 제출해라.”
정우는 최후의 알람이 울리자마자 정수를 끌어모으며 녹스들의 기색을 살폈고, 아니나 다를까 네 마리 중 하나가 엄청난 속도로 몸을 회전시켰다.
「네게 바칠 상품 따위는 없다!」
휘아아악!
정우를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해 오고 있는 거였다.
“……!”
그러자 아까처럼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 같더니 재규어의 존재감이 커지면서 녀석의 특질이 온 감각에 스며들었다.
포유류의 한계치에 다다른 동체 시력, 고양잇과 특유의 기민함.
‘날 노린 게 아니네.’
상대의 공격 동선을 거의 완벽하게 예측한 정우는 녹스가 노린 게 자신이 아니라 무구와 연결되어 있는 이쪽의 손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것과 별개로 지금 녀석의 반응은 예상 시나리오 범주 안에 든 경우였다.
팟!
정우가 몸을 뒤로 슬쩍 물리며 정수를 뿜자 녹스가 대번에 시간을 지연시켰고, 이때 측면에서부터 뛰어든 무구가 맹수처럼 놈을 낚아챘다.
정수 칼날을 이용해 기습한 것도 아닌, 순전히 몸으로 들이받은 거였다.
퍼억!
맥없이 바닥에 떨어진 녹스의 몸통 위로 곧 무구의 큼지막한 주먹이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퍼버벅, 퍼벅!
녹스는 주먹이 몸에 들이박힐 때마다 새까만 유리 파편 같은 걸 내뿜었고, 그러다 점점 몸의 중앙부가 찌그러져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종래엔 길고 날카로운 두 다리를 부르르 떨었다.
문자 그대로 맞아 죽은 것이다.
-…….
무구는 놈의 존재감이 사라진 걸 확인한 뒤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젠 사체가 된 녹스의 몸뚱어리 위에 올라앉은 그대로 나머지 세 침입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언의 위력 과시였다.
“대충 정리된 것 같군.”
정우 또한 본질적으론 ‘박정우’다.
그는 무구가 조성한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받아 남은 녹스들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방금 그 탈주자를 처리하는 데 들인 시간은 약 7초.
번개처럼 움직이는 녹스들에겐 제법 긴 시간이었을 것임에도 이 녀석들은 쿠데타에 협력하지 않았다.
자의든 타의든 이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했으며 그 결과를 받아들이겠단 뜻이리라.
어쩌면 각자 준비한 상품에 대단한 자신이 있어서 굳이 도박 수를 낼 필요성을 못 느낀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중에서 살아 나갈 수 있는 건 단 하나.
그리고 정우로선 그게 누가 되든 전혀 상관없었다.
이 행성에 도움이 되는 결과만 얻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슷, 스슷.
정우가 일자로 도열한 녹스들 앞에 서자 놈들이 미리 만들어 둔 표식이 저마다 반짝거렸다.
이것 또한 초월적인 문자로 만들어진 표식으로, 각 녹스가 제시한 자신의 목숨값이 담겨 있었다.
이제 정우는 이 표식들을 하나씩 훑어보기만 하면 됐다.
세 마리 중 누구를 살려 줄지 결정하기 위해서 말이다.
과연 이 녀석들이 생각한 자신의 목숨값은 무엇일까.
“…….”
정우는 말없이 세 개의 표식과 차례대로 접촉했다.
팟, 파팟.
그러자 그의 시야에 예의 계약서 서문이 나타났다.
「간이 거래」
|판매자: 녹스
|구매자: 인간
* 본 거래는 우주가 보증합니다.
그런데 이전과 달리 판매자와 구매자가 바뀌어 있었다.
여기에 더해 처음 느껴 보는 존재가 정우의 의식을 통해 말을 걸어오기까지 했다.
「거래 계약이 생성되었습니다. 거래에 사용할 상품을 등록하십시오.」
아마도 ‘간이 거래’ 시스템일 것이다.
‘상품 등록?’
정우가 되묻자마자 그의 눈앞에 ‘공백’이 나타났다.
지금도 허공을 보고 있긴 했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었다.
눈이 아닌 의식으로만 감지할 수 있는 이 공백은 정우를 위해 일시적으로 허락된,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 영역이었다.
‘……설마.’
정우의 의식이 곤두선다.
그는 직감했다.
자신이 지금 초월적 문자를 직접 쓸 수 있게 됐다는 걸.
물론 거래 계약을 위한 절차에 불과하겠지만 어쨌든 지구 소속의 존재로선 최초일 터였다.
‘다른 존재들도 다 이런 식으로 문자를 쓰나? 아니면 이런 공백 따위가 필요 없는 놈들도 있나?’
정우가 공백을 남겨 둔 채로 이렇게 묻자 시스템 대신 첫째가 그를 다그쳤다.
「상품을 만들어라.」
녹스에게 역으로 거래를 강제하는 이 상황이 첫째와 둘째에게도 제법 흥미로운 일이었던 것 같다. 녀석의 대사에서 조급함이 느껴졌다.
‘그럼 네가 대신 대답해. 공백 없이도 마음대로 문자를 만드는 존재가 있나? 너희는 어떻지?’
정우가 ‘공백’에서 완전히 주의를 떨어뜨리자 평소에도 성격이 급하던 둘째가 기척을 드러냈다.
「우리에겐 그런 게 필요 없다. 그러니 닥치고 상품을 만들어.」
‘그렇다면 너희는 제법 신분이 높은 존재라고 생각해도 되는 건가? 어쨌든 저 문자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수준인 거잖아?’
뭔가를 느낀 정우가 두 존재를 떠본다.
그러자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
두 초월자가 입을 꾹 다문 것이다.
놈들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망치듯 기척을 죽인 걸로 봐선 결코 겸손의 표시는 아닌 것 같았다.
감히 말을 얹을 수 없는 화제라는 의미일까?
어째서? 만약 우주에서의 신분이 그리 높지 않아서라면 그냥 그렇다고 이야기하면 될 일 아닌가.
‘…….’
정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모든 일이 ‘녹화’가 된다는 건 정우도 잘 알았다.
행성 기록의 존재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첫째와 둘째가 이 정도로 몸을 사린다는 건 그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암시했다.
‘대체 우주는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생각보다 복잡한가 본데.’
두 초월자가 입을 닫은 이상, 더 파고들어 봐야 소득은 없을 것이다.
그는 다시 공백 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그러곤 세 녹스에게 내놓을 상품을 생성했다.
팟.
|자비- 제시
이쪽의 자비를 판다니…… 상당히 오만방자한 상품이지만 거래 상대로선 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특급 한정판이니까.
정우의 상품 생성이 끝나자 첫째와 둘째의 존재감이 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놈들도 정우만큼이나 녹스들이 내놓을 상품에 관심이 많았던 거다.
「판매자들의 제안 목록입니다. 한 개체와만 거래할 수 있습니다.」
유사 경매 방식의 거래여서인지 간이 거래 시스템이 계속해서 중개자 역할을 했다.
파팟.
이윽고 나타난 녹스들의 상품 리스트.
「녹스1」
|이주
소속 행성을 변경하며 새 소속지로 즉시 이동합니다.
더는 현재 진행 중인 행성 폐쇄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염원
녹스에게 판매한 상품을 전부 되돌려 받습니다.
상품에 가격표가 붙어 있지 않다는 건, 내놓은 모든 상품으로 ‘자비’를 구매하겠다는 뜻일 거다.
따라서 ‘녹스1’의 공략 포인트는 아주 명확한 셈이었다.
그건 바로 자유.
구매자를 현재 처한 상황에서 해방시켜 주겠다는 거다.
지난 거래를 통해 생긴 손실을 모두 만회시키고 행성에서 떠나게 해 주겠다는 제안이었으니까.
하지만 S급 목적의식을 가진 정우에게 행성 이주권 따위는 하등 쓸모없는 상품이었다.
게다가.
‘너희의 권한이 첫째와 둘째보다 못하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1번 녹스가 제시한 ‘염원’이 되돌려 주는 건 같은 종족인 녹스와의 거래 내용뿐이었다.
첫째와 둘째에게 구매했던 ‘충신’ 같은 건 녹스조차도 건드릴 수가 없는 것이다.
[충신]정수 칼날이 절대 부러지지 않습니다.
* 가격: 신체가 천천히 부식되며 극도의 고통을 수반합니다.
* 비고: 자살하지 않는다면 행성 폐쇄가 중단되는 순간을 충분히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이 제안을 받아들여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더라도 언젠간 몸이 바스러져 죽는다.
정우는 미련 없이 다음 제안으로 넘어갔다.
슥.
그러자 첫 줄부터 인상적인 상품이 나타났다.
‘이쪽이 훨씬 낫군.’
「녹스2」
|균형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성을 50% 이상으로 유지합니다.
|무생물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이번 녀석의 상품도 두 가지뿐이었지만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정우가 뭘 원하는지 잘 아는 게 분명했다.
‘무생물을 얻게 되면 충신의 고통에서도 해방되나?’
만약 그렇다면 더는 약을 쓸 이유가 없을뿐더러 새 주치의를 찾을 필요도 없게 될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젠 잠을 자더라도 무구가 항상 곁을 지킬 테니 24시간 안전이 보장되는 셈.
정우가 ‘무생물’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충신을 판매했던 당사자들이 상품의 효력을 보증해 줬다.
「그렇다.」
「충신으로 인한 고통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정우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녀석들이 원한 건 그가 어서 다음 상품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슥.
「녹스3」
|태엽 시계
자신을 대상으로 벌어진 한 가지 사건을 지연시킬 수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가 소멸하는 순간, 지연시킨 사건이 본래 흐름을 되찾습니다.
|섭식 개조
신체를 유지하는 데 더는 영양분이 필요하지 않으며 절대 굶주리지 않습니다.
세 번째 녹스 역시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제안을 준비해 놨기 때문이었다.
녹스의 능력 중 가장 독보적인 것을 가져옴과 동시에 지구 생물의 태생적 제약으로부터 해방.
그러나 아무리 좋은 제안이라고 하더라도 두 존재와 모두 거래를 진행할 순 없었다.
애초에 셋 중 하나만을 살린다는 조건으로 꾸려진 거래이기에 나머지 둘은 버려야만 했다.
지금 가진 능력을 더욱 견고히 쌓을 것이냐, 아니면 전혀 새로운 능력을 얻을 것이냐.
‘제길.’
정우가 고민에 빠지자 둘째 특유의 낮은 웃음이 그의 의식을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