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38
342화. 청구서(2)
* * *
성역은 좁다.
비유적으로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도 말이다.
남양주의 성역을 감싼 보호막의 크기는 직경 1킬로.
이 때문에 선웅은 성역 중앙부에서부터 김중성이 달려오는 모습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그새 보고가 들어간 것이다.
성역의 수호자가 9일 차 침입자와 한번 붙어 보려고 한다는 보고가.
“정수 청구를 했다고 하던데, 어떻게 됐습니까?”
아직 수십 미터 밖에서 달음질 중인 중성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어 온다.
이에 선웅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1차 청구는 반려됐습니다. 그래서 조건을 바꿔 재청구를 했더니 이번엔 반응이 없습니다. 어쩌면 고민 중이신 걸지도 모르죠.”
“고민요? 이런 문제로 길게 고민하실 분이 아닌데. 아마 그쪽도 전투 중이어서 그럴 겁니다.”
이윽고 선웅의 앞에 도착한 중성은 가쁜 호흡을 가다듬으며 손목시계를 바라봤다.
현재 시각, 오전 11시 44분.
박정우가 미국에서 어떤 식으로 진입로와 침입자들을 처리 중인지는 감히 상상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방주 좌석 개수가 계속 늘었다고 하니 쉬지 않고 전투일 것은 자명했다.
“자신은 있으십니까? 보호막 밖으로 나가면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중성은 이 말을 하면서 성역 바깥으로 시선을 옮겼다.
일대를 감싼 금빛 보호막의 바로 맞은편엔 9일 차 침입자인 녹스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놈은 조금 전 신호탄이 발사된 방향으로 달려가다가 도로 걸음을 멈춘 상태였다.
녀석의 주의를 잡아끌기 위해 선웅을 비롯한 성역의 각성자 전원이 이곳에 모여 견제 사격을 했기 때문이다.
보다 큰 정수 덩어리에 관심을 보이는 침입자들의 습성을 이용한 일종의 ‘탱킹’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임시방편일 뿐.
신호탄을 쐈던 자들이 곧 녹스의 사정권 안에 들게 되면 놈도 더 이상 이곳에 묶여 있진 않을 터였다.
그러니 외부자들을 살리려거든 너무 늦기 전에 녹스와 싸우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글쎄요, 자신이 있다고 하면 그건 오만이겠죠. 제가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는 정우 씨가 판단해 줄 겁니다.”
선웅이 단호한 어조로 중성의 날카로운 눈빛을 맞받아친다.
박정우의 대리자.
존재만으로도 대부분의 폭력 사건을 예방할 수 있는 인물.
현시점 이 성역 안에서 유일하게 수백억 개의 정수를 사용할 수 있는 만큼, 그에 따른 의무도 잊지 않고 있었다.
정수를 차용한 상태에선 절대 죽어선 안 된다는 의무 말이다.
대리자도 다른 주민과 마찬가지로 사망과 동시에 보유한 모든 정수를 떨어뜨린다.
이때 구원자에게서 정수를 차용한 상태라면 그것도 마찬가지.
즉, 선웅이 대량의 정수를 빌려서 나갔다가 녹스에게 패배하면 그 손실이 정우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정우의 손실은 곧 행성의 손실이기도 하다.
“300억 개를 청구했습니다. 정우 씨가 이걸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다시 반려를 할 테고, 그럼 조건을 또 바꿔 봐야겠죠.”
“끝까지 승인이 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예, 그땐 저 사람들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죠. 저희로선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다 한 셈이니까.”
선웅의 음성에서 제법 묵직한 맛이 묻어난다.
지난 수일 동안 성역을 지켜 오면서 그 나름대로 성장을 한 탓이었다.
물론 구원자 전형을 거치며 악랄하게 성장해 온 박정우와 비교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성역 내에선 정우와 가장 닮은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음.”
허공을 빤히 바라보던 선웅은 짤막한 침음을 흘렸다.
“뭡니까?”
“반려됐습니다. 400억 개, 그리고 5분으로 다시 청구해 보겠습니다. 이번에도 안 된다면 마지막으로 시간을 좀 더 늘려 볼 겁니다.”
선웅은 자신이 말한 대로 즉시 재청구를 했다.
그러자 이번엔 거의 곧바로 답신이 왔다.
「귀하의 구원자가 정수 차용을 승인했습니다.」
“엇.”
선웅이 몸을 움찔한다.
이렇게 빨리 결정될 줄은 몰랐던 거다.
게다가 자신이 청구한 정수는 무려 400억 개.
이걸 흔쾌히 내준 정우의 대담함에 놀랐고, 눈앞의 괴물을 상대하려면 정수가 400억 개나 필요했다는 사실에도 놀랐다.
‘대체 생존 허들이 어디까지 올라간 거지……?’
수백억 개의 정수를 들고 있어야 상대 가능한 침입자가 돌아다니는 세상이라니……. 행성 폐쇄의 난이도 증가가 비선형적이라는 건 일찍이 알았지만 이 정도일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행성 폐쇄가 이 수준까지 진행될 때까지도 여전히 구원자로 기능 중인 박정우는 대체.
“…….”
제멋대로 떨리기 시작한 손.
그리고 이때쯤 미국에서부터 날아온 초대량의 정수가 그에게 쏟아부어졌다.
“……!”
끄득.
위, 아랫니가 거칠게 맞물리면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난다.
정수 400억 개.
대리자 인터페이스를 통해 숫자로만 접해 봤던 400억 개라는 정수의 무게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오히려 두려움에 젖은 소리를 낸 건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었다.
“서, 선웅 씨.”
“……세상에.”
그들은 허공의 어딘가를 응시한 채 빳빳이 굳어 있는 성역의 수호자로부터 뒷걸음을 쳤다.
그의 표정에서 읽히는 극도의 공포가 자신들마저 빨아들일까 겁이 나서였다.
그러다가.
피이잉!
제자리에 굳은 선웅의 전신에서 어마어마한 밀도의 정수 광선들이 뿜어져 나오는 걸 보게 됐다.
“어어!”
광선에서 느껴지는 살기가 엄청났기에 좌중의 모두가 기겁하며 몸을 웅크렸다.
그러나 선웅에게서 나온 광선은 ‘공격’이 아니었다.
사방으로 쏘아져 나간 광선들은 성역의 경계선을 따라 주변을 둥글게 돌더니 한 지점에 모여서 어떤 형체를 빚기 시작했다.
그건 다름 아닌.
“……아.”
바닥에 거의 주저앉다시피 했던 중성이 뭔가를 깨닫고 눈을 크게 뜬다.
반면 광선을 토해 낸 선웅은 기진맥진한 상태로 엎드려 있었다.
중성이 그를 부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선웅 씨! 저걸 보십시오!”
“……?”
선웅은 중성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그가 손가락으로 맞은편을 가리킨 걸 보고서 다시 시선을 옮겼다.
다음엔.
“흡, 끕!”
자신도 모르게 들숨을 끊고서 딸꾹질을 했다.
징그러울 정도로 짙은 푸른빛을 띤 인간 형체가 바로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박정우와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신장이 2미터 20센티 정도로 상당히 크다는 것뿐이었다.
“정우…… 씨?”
선웅이 상대를 올려다보며 묻자 그것이 시퍼런 고개를 슬쩍 내리며 시선을 맞댔다.
-나는 ‘인간’의 무구로서 이곳에 왔다. 내가 여기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4분 51초다.
목소리마저 박정우와 완전히 같다.
“…….”
그러나 상대가 발음한 것 중에 체류 시간 말고는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나와의 연결을 끊지 않도록 해라. 녹스가 한동안은 나에게만 집중할 것이다.
상대, 그러니까 ‘무구’는 선웅의 말엔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을 이어 갔다.
-내 시간이 멈출 때 녹스의 육신에 물체화한 정수를 꽂아 넣어라.
“뭣, 뭐라고요……?”
선웅의 입에서 무력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성역 내에선 절대자에 가까웠기에 강자 특유의 위용을 걸칠 수 있었지만 막상 박정우의 앞에 섰다고 생각하자 본래의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대리자로서 충실히 기능하고 있긴 했지만 그의 알맹이는 여전히 조선웅이었다.
-움직여. 더 망설이면 기회를 잃을 거다.
무구가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으며 성역 바깥을 향해 걸음을 내디딘다.
그리고 때맞춰 불과 십여 미터 거리에 있던 녹스가 몸을 틀었다.
마침내 외부자들이 놈의 사정권 안에 든 게 틀림없었다.
“제길.”
선웅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이를 악무는 사이 무구는 이미 금빛 보호막을 지나가는 중이었다.
스륵.
그러자 그와 무구를 연결하고 있던 가느다란 선이 길게 늘어졌다.
무구의 등 중앙부와 선웅의 왼쪽 팔뚝 한 지점을 잇는, 정수로 만들어진 선이었다.
‘아, 연결이라는 게 이걸 말하는 거였나.’
선웅은 황급히 무구의 뒤를 따르며 자신이 보유한 정수량을 확인했다.
‘어?’
그런데 차용한 정수 400억 개 중에서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건 159억 개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아예 선웅의 몸에 내장되어 있지도 않았고, 그는 오래 지나지 않아 그 정수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차렸다.
쿠쿵!
성역을 나서자마자 녹스에게 달려든 저 괴물에게 가 있는 것이다.
“정우 씨!”
선웅은 상대가 박정우가 아님을 직감했음에도 절대자의 이름을 발음했다.
본능에 가까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구는 선웅의 다급한 부름에도 눈조차 돌리지 않고 녹스와 엉겨 붙었다.
그리고 이윽고.
스릇.
선웅의 신체도 성역의 금빛 보호막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그의 양 무릎이 땅바닥을 향해 도로 곤두박질한 것도 이때 벌어진 일이었다.
“흐아아아악!”
성역의 보호막이 막아 주던 게 단순히 물리적 위협만이 아니었던 거다.
성역 바깥을 가득 채우고 있던 녹스의 존재감이 선웅의 항상성을 순식간에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이이익……!”
하관이 기묘하게 뒤틀리며 눈이 뒤집힌다.
제아무리 박정우의 대리자라지만 4일 차 이후로 별다른 위협 없이 살아온 그에게 녹스는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다 뒤편에서부터 튀어나온 손에 인해 성역 안쪽으로 끌어당겨졌다.
“크헙!”
다시 성역의 보호를 받게 된 선웅은 빠르게 항상성을 복구했고, 곧 중성의 성난 목소리를 듣게 됐다.
“방금 죽을 뻔하셨습니다! 그리고 굳이 따라 나갈 필요까진 없어 보이는데요. 아직은 말입니다.”
선웅을 끌어당긴 건 다름 아닌 중성이었다.
그 역시 식은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지만 선웅보단 이 상황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아마도 비교적 온전한 상태였기 때문일 거다.
갑자기 수백억 개의 정수를 급여 받은 선웅과 달리 중성에겐 급격한 변화가 없었으니까.
콰직!
이 와중에도 무구와 녹스는 계속해서 몸싸움 중이었는데, 무구 쪽의 힘이 조금 더 우세한 탓에 녹스의 몸뚱어리가 성역의 보호막에 들이박힌 상태였다.
중성은 이 광경을 손으로 가리키며 선웅에게 말했다.
“저 정도 거리면 여기에서도 공격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정수 운용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요.”
정수를 직접 다뤄 보진 않았지만 그는 박정우가 정수로 사람을 어떻게 죽였는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정수 창이 얼마나 멀리까지 날아가는지도 잘 알았고 말이다.
이에 선웅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여전히 경황이 없었으나 다행히 한 가지는 기억하고 있는 탓이었다.
「내 시간이 멈출 때 녹스의 육신에 물체화한 정수를 꽂아 넣어라.」
무구가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건넸던 주문.
그리고 실제로 녀석의 시간은 멈춘 채였다.
자세히 보니 정수 칼날을 쥔 오른손이 녹스의 몸통을 향한 그대로 굳어 있었던 것이다.
‘물체화한 정수.’
선웅은 잽싸게 정수 창을 빚어내 녹스를 조준했다.
성역의 보호 아래에 있으니 거의 모든 화력을 창에 쏟아부을 수 있었다.
그러곤 곧장 녹스를 향해 내던졌다.
쐐애애애액!
금빛 보호막 안쪽에서부터 그려진 푸른 궤적은 침입자의 몸통을 쏜살같이 뚫고 지나갔고, 성역의 주민들은 허공에 흩뿌려진 까만 파편을 보며 승리를 직감했다.
물론 성역의 승리라기보다는 박정우, 아니 박정우의 분신이 가져다준 승리였다.
그는 만여 킬로 떨어진 곳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성역을 지켜 주고 있는 셈이다.
쿠웅!
창에 몸이 꿰뚫린 녹스는 무게중심을 잃고서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러자 무구가 놈의 뾰족한 머리를 발로 밟아 으깨며 확인 사살을 했다.
감히 성역 밖으로 나가기가 두려워진 선웅으로선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일이었다.
“외부자는? 신호탄을 쐈던 사람들은 아직 무사합니까?”
현장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 가자 중성이 주변을 둘러보며 외쳤다.
“새, 생존 확인됐습니다! 남서쪽에서 접근 중입니다!”
망원경을 쥔 경계조 근무자 하나가 중성의 물음에 답을 해 왔다.
이에 중성은 그에게 망원경을 건네받아 남서쪽을 직접 바라봤다.
약 300미터 거리에서 예닐곱 정도 되는 사람이 도보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
리더로 보이는 선두의 여자가 오른팔을 위쪽으로 쭉 펴고 있지 않은가.
단순히 위치 표시를 하고 있다고 보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항복의 표시라고 하기엔 많이 어색한 자세였다.
“뭘 하는 거지?”
중성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여자의 오른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혹시 뭔가 쥐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자연스레 오른손 밑으로 이어진 손목을 보게 됐는데…….
“저건…….”
여자의 손목에 글씨가 적혀 있었다.
‘인간’이라는 글씨, 그리고 그 밑에 마치 바코드처럼 찍힌 가로 실선.
깜짝 놀란 중성은 황급히 소매를 걷고 자신의 손목을 확인했다.
다음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맙소사.”
지금 성역 바깥에 있는 저 여자 역시 방주 탑승자, 그것도 1세대 탑승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