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41
345화. 이종(1)
* * *
오후 3시 18분.
러시아 서부의 대도시 카잔.
민구는 이곳에서 자신의 발가락을 혀로 핥고 있었다.
정확히는 오른쪽 발가락에서부터 발등까지 말이다.
이다음엔 이물감이 있는 왼쪽 어깨 털과 겨드랑이, 옆구리도 손을 볼 생각이었다.
츠릅, 츠르릅.
혀에 무수히 박힌 돌기들이 울긋불긋한 털 사이를 가로지를 때마다 이유 모를 안정감이 느껴진다.
가끔은 아주 미묘한 쾌감이 찾아오기도 했다. 딱히 간지럽지 않음에도 괜히 피부를 긁었을 때 느껴지는 시원함이나 만족감 같은 것 말이다.
‘짐승으로 사는 건 정말 희한한 일이군.’
민구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다소 강박적인 행위가 무엇인지 잘 알았다.
인간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건 ‘그루밍’이었다.
따라서 태생이 인간이며 여전히 인간으로서 사고를 하는 자신이 이런 짓을 하는 게 부적절하다는 것도 잘 알았지만…….
‘멈출 수가 없어.’
이건 불가항력이었다.
냄새의 본능 다수가 이미 민구의 의식에도 깊게 뿌리 박혀 있었다.
왜냐하면 민구는 곧 냄새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융합이 초래한 부작용 아닌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츠릅, 츠릅.
최초 설정했던 그루밍의 종착지인 옆구리에 닿고 나자 이번엔 오른쪽 무릎과 엉덩이 근처가 괜히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 거기도 핥아야 해. 지금 하지 않으면 계속 신경 쓰일 거야.
민구의 의식 저변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냄새가 한마디 거든다.
이에 민구는 냄새를 향해 충고했다.
‘이러다간 영원히 몸을 핥아야 할 거다. 적당할 때 그만둬야지.’
* 영원히 핥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
반박할 수 없었다.
츠릅, 츠르릅.
결국 민구는 우스꽝스러운 입 모양을 하며 혀를 내밀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대체 이 짓을 언제까지 하게 될까? 모든 고양잇과 동물이 죽을 때까지 몸 핥기만 하진 않잖은가.
그러자 곧 이에 대한 답이 주어졌다.
바스락.
여태 일정하게 쭉 들려오던 환경음 위로 새로운 소리가 덧입혀지는 게 감지된 거다.
‘……!’
민구는 자신도 모르게 귓바퀴에 힘을 주며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고양잇과 동물이 그루밍의 영원한 굴레에서 해방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 누가 와! 몸을 숨겨! 기습을 준비하자!
냄새가 짐승 특유의 방식으로 사고한 반면 민구는 전후 사정을 조합해서 예상되는 결과를 추론해 냈다.
‘놈들이 먹을 걸 가져오기로 했었잖아. 아마 그걸 거야.’
물론 확실하진 않았다.
녹스와의 거래 대가로 시간 개념을 잃은 탓에 정확히 얼마나 이 자리에 머물러 있었는지 알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현재 이곳은 러시아의 서부 도시 카잔.
구체적으론 카잔의 시민들이 모여 있는 도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사람들이 호랑이의 모습을 한 이쪽을 극도로 두려워해서 일부러 이곳에 자리를 잡은 거다.
시베리아에서 이 나라의 마지막 진입로를 폐쇄한 직후 그는 자신과 함께 있던 러시아 측의 각성자 전원을 흡수했다.
그런 다음엔 전력으로 횡단로를 역주행해 예카테린부르크를 거쳐 이곳 카잔까지 오게 된 것이다.
러시아의 대다수 도시가 그렇듯 카잔 역시 각성자가 다 빠져나가서 가진 건 용맹함뿐인 민간인만이 남은 상태였고, 정우처럼 정신 나간 원칙까진 없는 민구는 이들에게 두 가지만을 요구했다.
하나, 오후 3시 20분이 되면 시간이 다 되었노라고 알려 줄 것.
둘, 산 채로 먹혀 줄 게 아니라면 끼니로 삼을 고기를 대접할 것.
민구는 더 이상 시간의 흐름을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전의 기억까지 잃은 건 아니었다.
그가 알기로 자신의 잔류 기한이 만료되는 시점은 9일 차 오후 3시 25분이었다.
즉, 저 때가 되면 아직 진입로가 남아 있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가 있게 된다는 거다.
하루를 분할한 24시간 중에서 오후 3시 25분이 어느 지점인지는 짚어 내지 못해도 저 순간에 중요한 일이 벌어진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킁.
이윽고 민구의 콧속에 날고기 특유의 냄새와 사람의 피부에서 나는 체취, 그리고 뭔지 모르겠지만 조금은 탁하고 역한 냄새가 스며들었다.
‘뭐지? 마지막 것은.’
민구가 이렇게 생각하자 냄새가 답을 줬다.
* 소야.
소.
포유강 경유제목 솟과의 초식 동물.
정말로 카잔의 시민들이 식사와 ‘알람’을 가져오고 있었다.
저벅, 저벅.
다소 막연한 울림이었던 어떤 소리들이 점차 발소리의 형태로 구체화되어 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의 모습을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400여 명의 카잔 시민 중 단 두 명이 이곳으로 오는 중이었다.
날고기가 실린 손수레와 딱 봐도 강제로 끌려온 소 한 마리를 대동한 채 말이다.
* 안 돼! 안 돼!
소는 호랑이인 민구를 보자마자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그러나 카잔에 몇 없는 하급 각성자가 녀석의 고삐를 붙들고 있는 탓에 질질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제길.’
저 광경을 보고 침이 고이는 건 냄새의 본능, 역한 마음이 든 건 민구의 본능이었다.
“시, 시간이 되었습니다……!”
약 20미터 거리에 멈춰 선 러시아인들이 민구를 향해 외친다.
그러더니 소를 끌던 사내가 앞쪽으로 몇 걸음 더 나왔다.
“식사는 산 것과 날것 모두를 준비했습니다!”
이에 민구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 뒤 두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기다려.”
그러자 막 손수레를 놓고 달아나려던 사내가 당황한 표정으로 멈춰 섰다.
소를 끌고 온 자도 고삐를 땅바닥에 박아 두고 갈 생각이었는지 망치와 나무 고정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민구가 다가오는 걸 보고서 얼른 망치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저것도 소인가?”
민구가 수레에 실린 고기를 앞발로 가리키자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 있는 소와 죽은 소를 각각 데려온 셈인 거다.
“고기를 잘라. 죽은 고기 말이야.”
“……?”
“독이 들었는지 어떻게 아나? 우선 너부터 먹일 거다. 손바닥 크기로 두 점을 잘라 이 자리에서 먹도록.”
“……아.”
두 사내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슥.
수레를 끌던 자가 허리춤에서 자그마한 칼을 꺼내더니 큼지막한 고기 한 점을 잡고 자르기 시작했다.
본래 고기용 칼이 아니었는지 사실상 자른다기보다는 뜯어내는 수준에 가까웠다.
그사이 민구는 다른 사내와 소를 번갈아 봤다.
“저 고기는 방금 도축을 한 건가?”
“아닙니다. 냉동되어 있던 것을 해동해서 가져온 겁니다.”
“그럼 저 소는? 어쨌든 식량이긴 하고?”
“…….”
사내는 대답하지 못했다. 육식, 초식이란 차이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짐승이 다른 짐승의 처지에 대해 묻는 저의가 무엇이겠는가.
민구는 상대의 답을 더 기다리지 않고 소에게 물었다.
“마을에 네 동족이 더 있나? 다른 짐승들은?”
* 여섯. 많아.
동족은 여섯, 다른 짐승도 제법 있다는 뜻일 거다.
답을 들은 민구는 다시 고삐를 잡고 있던 사내에게 지시했다.
“마을에 남은 짐승들을 다 데리고 와. 그런 다음 내가 보는 앞에서 풀어 줘라.”
“아…… 알겠습니다.”
“지금 가. 당장.”
크릉.
민구가 수염이 박힌 주둥이를 위협적으로 실룩이자 사내가 전신을 파랗게 빛내며 달음질했다.
그새 다른 사내는 자기가 먹을 고기를 다 뜯어내고서 이제 막 입에 집어넣는 중이었는데, 그 표정이 아주 가관이었다.
쩝, 쯔업.
인간의 자그맣고 무딘 치아로 저 굵은 날고기를 씹어 넘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민구는 사내의 입가에 묵은 핏물과 침이 섞여 흐르는 걸 바라보다가 앞발로 바닥을 툭 쳤다.
“그만하면 됐다. 지금이 몇 시지?”
“세, 세 시, 이십삼 분입니다.”
사내가 시계를 보면서 조심스레 입안에서 고기를 뱉어 낸다.
잔류 기한인 25분까지 약 2분 남은 시점이었지만 민구는 이게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시간인지 가늠하지 못했다.
막연히 때가 다 되었다는 생각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비켜.”
민구는 수레 앞에 멀거니 선 사내를 이마로 밀어내고선 날고기 하나를 물었다.
그러곤 사내의 안색을 살피며 아주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 맛이 없어. 산 것을 먹자.
아니나 다를까, 냄새가 곧바로 불만을 표했으나 민구는 녀석의 요청을 무시했다.
카잔에서 먹을 것을 내오지 않으면 너희라도 먹겠다며 으름장을 놓긴 했지만 사실 산 사람을 먹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공용어’를 할 수 있게 됐음에도 여전히 가축 신세인 소에도 구미가 당기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물론 놈이 아주 별미일 것이라는 건 잘 알았지만 놈의 가치가 한 끼 식사보단 훨씬 높다는 것 역시 잘 알았다.
향후 러시아에서의 신분이 어떻게 정해질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땅에 존속하게 될 소라는 종의 1세대가 되지 않겠는가.
‘새 지역에 가면 뭐가 됐든 먹을 게 있겠지. 여기서의 식사는 이게 마지막이다.’
민구는 냄새에게 이렇게 말한 뒤 두 번째 고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이때 그의 시야에 일련의 문구가 나타났다.
「인간, 박민구 님의 잔류 기한이 만료되었습니다.」
「새로운 파견 지역을 선택하십시오.」
드디어 잔류 판정이 끝이 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 파견이 가능한, 다시 말해서 진입로가 남아 있는 지역은 어디일까.
파앗.
이윽고 그의 시야에 파견을 위한 가이드라인이 나타났다.
다만 주요 파견지들을 추려 소개하던 이전과는 내용과 구성이 상당히 달라진 상태였다.
「파견 가능 지역: 3」
우선 파견 지역이 3개로 압축되어 있었고, 각 지역의 툴팁 역시 갱신됐을 뿐만 아니라 지구의 경고도 담긴 채였다.
「미국」
| 대부분의 것이 파괴되었으나 두 개의 성역이 존재합니다. 압도적인 구원자가 이 지역의 정수를 한데 모았습니다. 진입로의 개수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으며 지역 내에 남은 정수량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 이 지역을 파견지로 선택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에티오피아」
| 혼합됐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의 유일한 미해방지입니다. 다수의 종이 기후와 지리적 특성을 무시한 채 모여들었습니다.
| 이 지역을 파견지로 선택한 구원자는 마주하는 모든 것과 싸워야 할 것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
| 해체되었습니다! 침식자들의 영향으로 대지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한 개의 성역이 존재하지만 위태롭습니다. 그 누구도 성역 바깥에서 생존하지 못했습니다.
| 이 지역을 파견지로 선택한 구원자는 단일 종으로 이루어진 집합과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파견 지점이 성역으로 고정됩니다.
“맙소사.”
스륵, 툭.
민구는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고기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남은 지역이 하나같이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구가 파견을 만류하는 미국.
온갖 짐승이 ‘개판’을 만들어 둔 것으로 보이는 에티오피아.
그 누구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모든 구원자가 성역까지 밀려난 오스트레일리아.
‘정우가 아직 미국에 있구나.’
민구의 시선이 가장 먼저 닿은 곳은 당연하게도 미국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미 ‘압도적 구원자’인 박정우가 정리를 했다.
전력이 추가 투입될 필요가 전혀 없는 상황이기에 지구도 다른 지역으로의 파견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 이쪽이 들고 있는 정수는 무려 150억 개……. 행성 폐쇄를 포기할 것이 아니라면 당장 미국을 고를 순 없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에티오피아 또는 오스트레일리아.
‘어디가 좋겠느냐?’
민구는 냄새에게 이렇게 물으면서도 이미 답을 내린 상태였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파견 지점은 성역으로 고정된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생명체들은 단일 종으로 구성됐고 말이다.
‘아마도 인간이겠지.’
제아무리 인간과 대화할 수 있고 인간식 사고가 가능하다고 한들, 겁에 질린 사람들이 성역에 갑자기 나타난 호랑이를 살려 둘까?
아주 높은 확률로 도착과 동시에 도륙당하리라.
따라서 민구가 선택할 수 있는 파견지는 한 곳밖에 없었다.
「에티오피아」
| 혼합됐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의 유일한 미해방지입니다. 다수의 종이 기후와 지리적 특성을 무시한 채 모여들었습니다.
| 이 지역을 파견지로 선택한 구원자는 마주하는 모든 것과 싸워야 할 것입니다.
온갖 종이 모여서 다투고 있다는 아프리카 대륙의 어딘가.
일찍이 정수가 한데 모인 미국과 달리 에티오피아는 아직도 분쟁 중이다.
이 말인즉슨 여태 그곳에 우월한 존재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경쟁자들이 지닌 정수를 모두 모아 남은 진입로를 닫을 존재 말이다.
‘파견 선택, 에티오피아.’
|파견- 에티오피아
진입로가 남은 타 지역 ‘에티오피아’로 즉시 이동합니다.
파견된 지역의 진입로가 모두 폐쇄되기 전까지는 전이 재선택이 불가능합니다.
「확실합니까? 이 결정은 번복할 수 없습니다.」
이에 민구가 뭔가를 잊은 듯해서 망설이고 있자 때마침 저 멀리서부터 어떤 소리들이 그의 귀를 자극했다.
조금 전 도심지 쪽으로 보낸 사내가 짐승들을 끌고서 돌아오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