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43
347화. 이종(3)
* * *
무구가 녹스들과 엉겨 붙기 시작한 지도 약 20초.
그사이 성역의 북서부 경계면엔 수십, 아니 이젠 수백에 가까운 인간이 모여들고 있었다.
“어어!”
“아악……!”
이들이 무구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기겁을 하면서도 전투 현장을 계속 지켜보고 있는 이유는 순전히 성역이 좁기 때문이었다.
일대를 덮은 금빛 보호막의 직경은 고작 1킬로.
성역 바깥으로 나갈 것이 아닌 이상 아무리 도망가 봐야 의미 없다는 걸 모두가 아는 것이다.
따라서 현시점 뉴욕의 성역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다.
저 푸른 괴물이 녹스만 격퇴하고 물러나 주는 것.
일단 눈앞의 상황만 보자면 괴물의 최우선 목표는 녹스인 게 맞는 듯했다.
물론 이 와중에도 몇몇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알았다.
“……미친.”
새까맣게 몰린 인파 속에서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이 여자의 이름은 소피아 무어.
34세, 미합중국 수호자 연합의 수석 서기.
미 대륙 소속의 구원자이기도 하며 닉네임은 ‘엘로이’. 현재 순위는 19였다.
본래 연합 사무실이었던 워싱턴DC에 체류 중이었으나 ‘시애틀 학살자’의 출현으로 각 주의 치안국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업무를 계속하기 위해 뉴욕으로 건너온 차다.
그녀의 대외적인 업무는 치안국에 하달할 공문을 작성하고 조직도 등을 기획, 개편하는 것이었으나 메인 업무는 따로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기록.
미국은 예나 지금이나 자부심이 강한 나라였고, 따라서 이 나라의 구원자들이 외세에 맞서 싸운 과정을 모두 기록해 두고 싶어 했다.
만약 이 행성이 폐쇄 절차를 버텨 낸다면 그간 벌어진 모든 일이 위대한 역사가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 ‘외세’엔 진입로를 통해 건너온 침입자뿐만 아니라 한때 수호자 연합이 ‘사냥감’이라고 표현하던 파견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국을 정리하고 난 뒤 다음 파견지로 감히 미국을 선택한 도전자들.
미 연합의 입장에선 저 파견자들 역시 치안국의 요원들만큼이나 상세히 기록되어야 했다.
당연히 어디까지나 미국의 영광을 위해서였다.
당시 침입해 온 파견자들이 얼마나 강력하고 교활했는지 모두가 알아야 그들을 쓰러뜨린 구원자들의 업적이 더욱 빛날 게 아니던가.
최초 등장한 지점, 이동 경로, 학살한 인명의 수, 여기에 더해 각 파견자의 인종과 보유하고 있던 정수량, 성격, 마지막 대사까지 모두 기록됐다.
아니, 실은 박제됐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기록된 이는 대부분 죽었으니까.
딱 하나만 제외하고 말이다.
‘……시애틀 학살자.’
파견 지점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각 주의 정예 요원 수십 명을 혼자서 궤멸해 버린, 전례 없는 파견자.
시애틀에서의 사건 이후로 소피아는 녀석에 대해 기록할 때 감히 ‘사냥감’이란 단어를 쓰지 못했다.
굳이 말하자면 사냥당한 쪽은 오히려 미 연합이었기 때문이다.
이름, 박정우.
30대로 추정되는 동양인 남성, 왜소한 체구, 무표정한 얼굴.
시애틀에서 학살을 벌인 뒤 당시 1위 구원자였던 ‘정의’ 맥 테일러와 대면했으나 그마저 굴복.
이후 잠시 소재지 파악이 되지 않다가 갑자기 대륙 동부에 출현.
브라질에서 넘어온 것으로 추정되는 새 파견자를 제압한 뒤 시카고에 성역 건설.
이때쯤 대륙 서부에 ‘용’이 나타났으나 어느 시점부터 녀석에 대한 추적 보고가 완전히 끊긴 걸로 봐선 박정우가 해치웠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리고 비슷한 시점에 ‘정의’ 맥 테일러 사망.
“…….”
기록만 보면 박정우의 행보는 혼돈 그 자체였다.
선과 악이 일관성 없이 뒤섞여 있고, 동선엔 패턴도 없다.
문제는 그런 존재가 아직도 살아서 이 대륙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있다는 점이었고, 더 큰 문제는…….
‘내 생각엔 저게 박정우야.’
소피아는 아까부터 계속 보고 있었다.
녹스와 접전 중인 푸른 거인에게서 뻗어 나온 가느다란 실 말이다.
비각성자들은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구원자인 그녀에겐 확실히 보였고, 그 실이 성역을 가로질러 보호막 바깥의 또 다른 존재에게 닿아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또 다른 존재’의 외관은 그간 구원자 채널과 치안국 통신을 통해 보고 들은 시애틀 학살자의 그것과 완전히 같았다.
아주 높은 확률로 박정우가 코앞에 와 있을 수도 있는 거다.
‘녹스를 저렇게 상대할 수 있는 자가 녀석 말고 누가 있겠어. 난 확실하다고 봐.’
다만 박정우가 웬 거인을 끌고 다닌다는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사이에 또 무슨 짓을 한 거지?’
소피아가 눈을 가늘게 뜨자 그녀의 뒤편에서 중년의 남성이 천천히 걸어왔다.
“보고 계시군요.”
마크 영.
인간, 53세 남성.
미 대륙 소속의 7위 구원자이자 뉴욕에 건설된 성역의 주인.
기존 순위권자들이 전부 사망한 이 시점에 7위라는 위치는 성역의 주인치곤 몹시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크는 한참 전에 구원자 경쟁에서 밀려난 자였기 때문이다.
각 주의 유력한 구원자들이 너무 빠르게 성장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마크 자신이 성역을 직접 관리해 온 것이 가장 컸다.
사실상 강자가 되기를 그만둔 사람인 것이다.
“이런 날이 올 줄은 알고 있었습니다.”
마크가 묵묵히 말을 잇는다.
“하지만 예상한 것과는 많이 다르군요.”
콰곽!
지금도 성역 바깥에선 푸른 거인이 녹스 두 마리와 엉긴 채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거인의 몸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으나 녹스 쪽도 만만치 않았다.
시간을 지연시키는 능력을 이용해 거인의 양팔을 거의 봉쇄하다시피 한 상태였으니까.
그러다 마침내.
쐐애애애액!
전혀 다른 방향에서부터 발생한 파공음이 판도를 바꿨다.
멀리서부터 그 형태가 또렷이 보일 정도로 밀도가 높은 정수 창.
연달아 두 발이 허공을 가로지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녹스 두 마리의 몸통을 꿰뚫었다.
푸콱!
아주 짤막한 파열음과 함께 성역의 민간인들조차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전황이 크게 기울었다.
녹스들이 창을 맞은 순간, 푸른 거인의 속박이 풀리면서 놈들의 머리를 성역 바깥면에 짓이긴 것이다.
퀴지짓……!
끔찍한 소리와 더불어 녹스의 머리 잔해가 성역의 보호막을 따라 줄줄 흘러내렸다.
그리고 이 장면을 본 주민들은 저 거인이 성역을 지키기 위해 나타난 구원자이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이곳의 주인이 누구지? 대리자가 있다면 함께 나와라. 지금부터 1분을 주겠다.」
정수에 실려 날아든 음성을 듣고선 기대한 바와 많이 다르게 전개될 것임을 직감했다.
“이, 일 분……?”
“역시 치안국 사람은 아니었어…….”
“대리자는 왜 찾는 거지?”
웅성거리는 사람들.
그러면서 자연스레 성역의 주인인 마크에게 시선이 쏠렸다.
그의 대리자인 로빈 콜린스에게도 말이다.
남성, 59세, 전직 판사.
이전에도, 지금도 명망 높은 자였지만 초현실적인 사건에 맞설 때 필요한 기개는 다소 부족했다.
지금 로빈의 시선은 금빛 보호막에 몸을 반쯤 걸친 푸른 거인에게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몰랐고, 안색은 이미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다.
“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다 죽을 겁니다.”
마크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이렇게 말하자 로빈이 그의 무력한 대응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이대로 성역을 내주자는 말씀이십니까? 저 밖으로 나가면 우리는 무조건 죽을 겁니다.”
이에 마크는 긴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판단력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겁에 질려 이성이 마비된 상태에선 미련해지는 법인 것 같았다.
“우릴 다 죽일 생각이었다면 이미 저 괴물이 학살을 시작했겠죠. 그리고 성역은 다른 구원자에게 양도할 수가 없어요. 주인을 바꾸는 유일한 방법은 대리자에게 권한을 넘기는 것뿐이니…….”
마크는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우리 둘 중 하나만 죽으면 되는 겁니다. 저쪽이 우릴 불러낸 이유도 이 때문일 거고요.”
“…….”
“어찌 되든 적어도 성역은 남길 수 있을 겁니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마크가 이렇게 말했으나 로빈은 완전히 동의하진 않는 듯했다.
“가죠.”
이윽고 마크가 로빈의 팔을 슬쩍 잡아끌었고, 곁에서 이를 보고 있던 소피아가 얼른 입을 열었다.
“저도 참관할 수 있을까요?”
이에 마크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상대는 시애틀 학살자입니다. 자기가 부르지 않은 자는 그 자리에서 죽일지도 몰라요.”
“글쎄요,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아무나 다 죽일 생각이었다면 이미 그렇게 했을 인물이에요. 만에 하나 저길 나갔다가 죽게 되더라도 제 선택의 결과니 억울할 것도 없고요.”
그간 수많은 강자를 기록해 온 서기인 만큼 이번 대상은 직접 보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
마크로선 그녀를 막을 이유도, 명분도 없었기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절대로 저자를 도발하지 마십시오.”
마크의 이 대사를 신호로 해서 마침내 세 사람이 걸음을 뗐다.
스윽.
그러자 일대를 에워싸고 있던 300여 명의 주민이 일사불란하게 길을 터 줬다.
저 바깥의 누군가가 제시한 1분이 다 지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정도는 알았으니까.
쿠궁, 쿵…….
세 사람이 인파 사이로 걸어 나오자 성역 외곽에 서 있던 무구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정우도 세 사람을 맞이해 성역 방향으로 걸었다.
점점 좁혀지는 양측의 거리.
그러다 갑자기 마크가 달리기를 시작했다. 정우 쪽으로 말이다.
그새 주어진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는 탓이었다.
파팟!
그러면서도 정수는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무력 충돌을 원치 않는다는 표현일 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직접 건져 올린 성역의 주민들 앞에서 허겁지겁 뛰는 모습을 보이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저건 상대가 많은 걸 내려놨다는 방증이었다.
“…….”
정우는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는 마크를 보면서 이 사내 또한 보통내기가 아님을 직감했다.
하기야 보통 인물이었다면 성역을 세울 수 있는 위치까지 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헉, 허억.”
곧이어 마크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정우의 앞에 멈춰 섰고, 그의 뒤를 이어 고지식한 인상의 로빈 콜린스와 뛰어오는 내내 정우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소피아 무어가 차례로 도착했다.
“저건 누구지?”
대번에 소피아를 가리키며 묻는 정우.
이에 마크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수호자 연합의 서기요. 괜찮다면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든 걸 기록하게끔 하고 싶소.”
“안 될 건 없지.”
정우는 잠잠한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봤다.
남양주로 치면 기자 출신인 명일과 같은 포지션인 것이다.
“지금까지 뭘 기록했지?”
정우가 이렇게 묻자 소피아 옆에 서 있던 로빈이 몸을 움찔했다.
연합 서기의 기록이란 게 뻔했으니까. 여태 죽어 간 ‘사냥감’들의 신상과 그들을 사냥한 요원들의 일대기 아니던가.
그러나 소피아는 전혀 위축된 기색 없이 정우의 시선을 받아쳤다.
“죽은 자들, 그리고 그들을 죽인 사람들에 대해 기록했죠. 그래서 당신을 꼭 한번 보고 싶었어요.”
“……날? 왜지?”
“내 기록에서 유일하게 죽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파견자니까.”
소피아의 말에 로빈이 또 흠칫한다.
반면 정우는 어떤 동요도 없는 모습으로 세 사람을 찬찬히 훑어봤다.
“내가 어떤 식으로 기록되든 그건 상관없어. 중요한 건 행성 폐쇄다.”
그러더니 성역의 주인인 마크를 쳐다봤다.
“하지만 행성 폐쇄에 성공할 거라면 성역 보존 역시 중요해지지. 쓸 만한 자들을 그곳에 남겨 두는 것도.”
“……무슨 의미요? 우릴 살려 주겠다는 건가?”
마지막 대사는 대리자인 로빈이 읊은 거였다.
그러자 정우가 그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러곤 정말 무미건조한 투로 제안, 아니 지시했다.
“지금 당장 네 구원자가 가진 정수 전량을 청구해. 그런 다음 내게 죽어라. 그러면 네 구원자와 이 성역을 살려 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