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44
348화. 이종(4)
* * *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정수가 필요한 거라면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로빈이 정우와 마크를 정신없이 번갈아 보며 식은땀을 흘린다.
그러자 소피아가 그를 향해 날카로운 말을 쐈다.
“쓸 만한 자들을 남겨야 한다잖아요. 적어도 저 사람 판단엔 당신보단 마크를…….”
“뭣?”
대번에 소피아의 말을 끊는 로빈.
그러더니 정우를 쳐다보면서 손가락을 들어 마크를 가리켰다.
“이 사람! 이 사람이 이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압니까? 철물점 주인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하는 일이란 게 전구나 삽 따위를 파는 거였단 말이오. 반면에 나는?”
정도 이상으로 흥분한 게 틀림없었다.
로빈은 지금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무려 14년 동안 판사로 일해 왔소. 복잡한 사건들을 검토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단 말이오!”
주변에 침을 튀겨 낼 정도로 열성적인 변호.
“…….”
그러나 정우가 보기엔 툭 치면 곧장 부러질 것처럼 허술하고 볼품없는 변호이기도 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정의를 구현하고 가. 저 사람들을 살려라.”
슥.
그가 손으로 저 멀리 보이는 성역을 가리키자 로빈도 그쪽을 흘깃 보더니 이내 표정을 굳혔다.
“그러니까 내 말은…….”
“전직 판사라는 네 이력이 대체 성역에서 무슨 쓸모가 있지? 당장 어디서 물을 새로 끌어와야 한다면 철물점 주인보다 더 큰 기여를 할 자신이 있나?”
“그, 그건 잘못된 예시요. 앞으로 올 세상에도 법이 필요할 테고…….”
“당연히 규칙이야 생겨나겠지만 이전의 법과는 같지 않겠지. 새로운 세상인 만큼 새 법이 필요할 테지만 그 법을 제정하는 데 전직 판사까진 필요 없을 거다. 물론 있어서 나쁘진 않겠지만 철물점 주인을 대신 죽여 가면서 남겨 둘 정도는 아니지.”
정우가 결론을 내버리자 로빈은 꽉 닫혀 버린 입을 도로 열지 못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여전히 반항적이었다. 당장 반박할 말은 찾지 못하겠지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다.
“이건 미친 짓이야. 내가 대리자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죽는 건 말도 안 돼. 그런 논리로 치자면 나보다 더 쓸모없는 자가 저 안에 널렸다고……!”
로빈이 이렇게 중얼거리며 주민들이 잔뜩 몰려나와 있는 성역 경계면을 다시 돌아보자 마크가 굳은 목소리로 조언했다.
“나라면 자꾸 뒤를 돌아보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비겁자였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될 테니까.”
“이……!”
로빈의 눈이 확 돈다.
그러곤 끝내 마크의 멱살을 붙잡고야 말았다.
홰액!
소피아의 기록뿐만 아니라 성역 주민들의 기억에까지 초라한 겁쟁이로 새겨지게 된 거다.
팍!
이윽고 마크가 로빈의 손을 내치며 날이 선 목소리를 냈다.
“만약 저자가 날 지목했다면 기꺼이 죽었을 거야. 그게 구원자의 의무고 가치니까. 그러니 대리자인 당신도 마찬가지여야 하는 거 아닌가? 대리자잖아. 구원자 대리라고. 더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지 마. 다른 방법이 없잖아. 사람들을 살려.”
하지만 로빈은 끝까지 발악했다.
“만약 네가 더 강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이건 네 책임이라고!”
이에 결국 시간이 아쉬운 쪽인 정우가 손을 썼다.
홧.
로빈의 오른쪽 발등을 향해 손가락을 슬쩍 휘두른 것이다.
그러자 아주 자그마한 정수 가시가 쏘아져 나가더니 상대의 발등을 꿰뚫었다.
푸악.
“끄아아악!”
성역의 천장까지 닿을 기세로 울려 퍼지는 비명.
“내 시간은 네 생각보다 훨씬 귀하니까 닥치고 들어. 지금 당장 네 구원자의 정수 전량을 청구해. 그렇지 않으면 다음엔 한쪽 눈알만 도려낼 테니까.”
정우의 이 대사는 그가 실제로 눈이 먼 상태이기에 더욱 무섭게 들렸다.
“아, 아…… 알았으니까 제발!”
단 한 번의 고문으로 의지가 꺾이고 만 로빈은 피가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한 발등을 양손으로 부여잡으며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 이 장면은 모두 소피아에 의해 기록되었다.
* * *
오후 8시 1분.
에티오피아 중부의 고원 지대.
민구는 숨을 헐떡이며 네발로 달리는 중이었다.
학, 하악……!
숨소리가 워낙 거칠어 온 사방에 울려 퍼졌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 시간에 돌아다니는 짐승들은 귀가 안 들려도 사냥감을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
해가 떨어지기 시작한 터라 주변이 제법 어둑했지만 햇볕이 있을 때보다 오히려 사물의 윤곽이 더 뚜렷하게 보이는 듯했다.
야행성 동물의 눈.
이 정도 능력이라면 태초의 인간은 결코 밤에 맹수들을 이길 수 없었으리라. 불을 발견해 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번 건 너무 멀리 있는데.’
이곳에 와서 벌써 두 개나 되는 진입로를 폐쇄했고, 이제 세 번째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의지할 수 있는 거라곤 패스파인더의 진입로 표식 하나뿐이었으나 이거면 충분했다.
이곳에 파견 온 다른 존재들도 전부 진입로를 향해 달리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파견지들과 달리 에티오피아에는 토착 세력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아프리카계 사람은커녕 두 발로 걷는 생물 자체를 아직 만나 본 일이 없었으니까.
물론 민구가 에티오피아의 인구가 무려 1억이 넘는다는 사실을 아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수 시간이 지나도록 사람 하나 조우하지 못한다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다 죽었다고 봐야겠지.’
여태 마주친 적은 전부 짐승이었다.
처음 만난 건 파견 지점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던 하이에나 떼였고, 그다음엔 커다란 멧돼지, 그리고 정수 창을 시간 차를 두고 쏘아 보내던 원숭이들도 만나 봤다.
애초에 인간적 사고를 하는 호랑이도 보통 존재가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민구는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수록 현실 감각이 점점 사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킁, 킁.
민구의 커다란 코가 저절로 실룩인다.
전방에서 피 냄새가 나고 있었다.
발치의 패스파인더는 항상 그랬듯 정수 표식과 진입로 표식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수를 운용하는 거의 모든 존재가 진입로로 향하는 중이라 가능한 현상.
그러니 이 냄새도 이미 결말이 난 전투 현장의 흔적일 확률이 높았다.
모르긴 몰라도 신체 일부만 남은 짐승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으리라.
이 때문에 민구는 별 기대 없이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러다가.
“……!”
소리를 통해 먼저 날아온 전방의 상황을 접하고서 귀를 쫑긋 세웠다.
어렴풋하나마 사람의 음성이 들렸기 때문이다.
‘파견자인가?’
파견자라면 죽여서 양분으로 삼고, 토착민이라면 일단은 살려서 이곳의 상황을 들어 볼 생각이었다.
캬릉!
한층 기세를 높여 뛰쳐나가자 오래 지나지 않아 그의 시야에 무언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피 냄새를 풍기던 건 다름 아닌 사자 무리와 그사이 홀로 서 있는 웬 사내였다. 머리가 적갈색인 것으로 봐선 토착민은 아닌 듯.
사내를 둘러싼 건 여섯 마리의 암사자였고, 저마다 눈과 신체를 시퍼렇게 빛내고 있었다.
이런 경우는 파견자가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의 타 지역에서 직접 넘어온 거였다.
자기들이 살던 지역이 해방되자 지역 경계선을 넘어 상당히 오랜 시간 여행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길을 가다 만나게 되는 사자나 하이에나들은 대부분 수일 전부터 이곳에 와 있던 녀석들이라는 거다.
파파팟!
민구가 현장에 한층 더 가까이 가자 사자들도 불청객의 기척을 느끼고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민구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온몸에서 수십 갈래의 정수 실을 뿜어내면서 말이다.
쏴아아앗!
일반적인 짐승 각성자는 사용하지 않는, 기이한 형태의 정수 방출.
사자들이 동공을 키우는 사이 현장을 둥글게 감싸듯 쏘아져 나간 정수 실들이 일제히 땅바닥에 꽂혔다.
콰콱, 콱, 콰악!
일부는 견제조로 맨땅에 쑤셔 넣은 것이었고, 또 일부는 목표물을 명확히 한 공격이었다.
캬릉!
* ……!
* 아!
사자들의 침음이 끝나기 무섭게 세 마리가 제자리에 힘없이 엎어졌다.
각자 이마나 가슴 따위가 꿰뚫린 녀석들이었다. 일부는 쓰러진 뒤 경련을 일으키는 중이었는데, 늦어도 십여 초 이내에 사망할 터였다.
“다른 녀석들은 더 없나?”
민구는 어느 정도 정리된 현장에 천천히 진입하면서 사자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답을 듣기도 전에 우측에서부터 커다란 기척이 느껴졌다.
쿠구구구구……!
웬 코뿔소 한 마리가 앞발로 대지를 으깨며 달려오고 있었다.
아프리카 대륙의 마지막 미해방지 에티오피아는 이런 곳이었다.
한창 전투가 진행 중인 현장에 느닷없이 또 다른 참가자가 난입하고, 싸움이 길어지면 세 번째, 네 번째 난입이 벌어지기도 하는 곳.
정수 모으는 기계인 박정우가 온다면 신나지 않을 수가 없을 지역이었다.
‘맙소사.’
민구는 육중한 몸집의 코뿔소가 믿기지 않는 속도로 달려와 사자의 몸통을 박살 내는 걸 잠시 멍하니 지켜봤다.
한때는 나름대로 종을 보존한답시고 마주친 무리 안에서 가장 약한 녀석 둘쯤은 놔주기도 했지만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애써 일부 개체를 살려 보내 봐야 다른 녀석들의 먹잇감이 될 뿐이라는 사실을.
이 땅에선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마주치는 모든 걸 죽이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그우웅……!
암사자 한 마리를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운 코뿔소는 십여 미터를 더 나아갔다가 도로 머리를 돌렸다.
아직 현장에 남아 있는 사자 두 마리와 호랑이 하나, 인간 하나를 혼자 다 먹어 치우려는 거다.
이건 놈이 여태 패배해 본 적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쿠궁, 쿵!
놈이 또다시 굉음을 내며 대지를 박찬다.
그러자 민구의 눈에 적갈색 머리를 한 파견자가 이를 악무는 게 보였다.
겁을 먹은 것이다.
쉬아앗.
애써 정수 칼날을 뽑아 들긴 했지만 코뿔소의 기세를 받아칠 자신까지는 없는 듯.
반면 사자들은 잽싸게 도망을 치는 중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호랑이와 코뿔소 양쪽 모두에게서.
어찌 보면 저 녀석들이 가장 현명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추월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군.’
크아앙……!
민구는 볼품없는 울음을 흘리는 사자들의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그새 지척까지 다가온 코뿔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앞발로 땅바닥을 꽉 붙든 채 돔형의 보호막을 몸의 외곽면에서부터 바깥 방향으로 빠르게 전개했다.
화앗!
한때 냄새가 ‘단단한 가죽’이라고 명명했던 전개식 보호막이었다.
특별한 공격 능력까진 없지만 정수 밀도가 허락하는 한 뚫고 들어오려는 모든 물체를 막는다.
이를테면 지금 막 보호막을 들이받은 코뿔소 같은 물체 말이다.
콰아아악!
코뿔소는 민구의 보호막과 맞닿자마자 무지막지한 충돌음을 내며 고개를 비스듬히 젖혔다.
아니, 정확히는 고개가 사선으로 꺾여 올라간 거였다.
보호막을 조금도 뚫지 못해 목이 부러진 것이다.
파팟, 팟!
이어서 코뿔소의 사체에서부터 정수 구체가 솟아올랐고, 민구는 아직도 제자리에 뻣뻣이 굳어 있는 파견자를 바라보며 구체를 하나씩 흡수했다.
티틱, 틱, 스아아…….
기세 좋던 코뿔소가 그에게 넘겨준 정수량은 약 1억 개.
이 정도면 군소 지역의 순위권 정도는 차지하고 있었을 거다.
“넌 뭐냐.”
민구가 홀로 남은 상대에게 이렇게 묻자 녀석이 몸을 바르르 떨더니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어……?”
민구의 음성이 다른 짐승과 많이 다르다는 걸 느낀 거다.
“넌 뭐냐고 물었다. 파견자면서 파견자답지가 못하잖아. 겨우 저딴 놈들에게 쩔쩔매고나 있고. 인간 구원자로선 실격 아닌가. 그것보다도 어떻게 여태 살아 있지?”
“저, 저는…….”
사내가 벌벌 떤다.
그리고 민구는 이쯤 와서야 이상함을 느꼈다.
상대의 정수가 팔팔 끓고 있을 게 분명함에도 존재감이 전혀 크게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이건 마치…….
“너, 혹시 미끼인가? 근처에 또 누가 와 있는 거지?”
민구가 추론의 결과를 발음한 순간.
쐐애애애애액!
쐐애애애액!
아주 멀리서부터 심상치 않은 파공음이 들려왔고, 곧 사내가 얄팍한 보호막을 두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에 민구는 직감했다.
이 녀석은 파견자도, 심지어 구원자도 아니다. 그럴 만한 재목이 못됐다.
아마 근처 어느 지역에 체류하던 하급 각성자일 터.
그럼 이 야생지에서 심히 인간다운 짓을 하고 있는 자들은 대체 누구인가.
어찌 됐든 간만에 만나 보는 ‘동족’.
츠릅.
민구는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