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49
353화. 단독 입찰(4)
* * *
오전 1시 2분.
행성 폐쇄 10일 차까지 약 7시간 남은 시점.
진입로 표식을 따라 질주하던 정우의 머릿속에 일련의 문구가 차례대로 나타났다.
「구원자 인간님의 순위 평가가 완료되었습니다.」
| 현재 인간님이 체류 중인 지역은 ‘에티오피아’입니다.
| 평가 결과: 1
‘…….’
예상했던 결과였기에 정우로선 별 감흥이 없었다.
다만 그다음에 벌어진 일만큼은 그의 주의를 확 끌어당겼다.
파앗!
이윽고 시야 구석의 구원자 채널 화면에 메시지들이 다시 송출되기 시작했는데, 아주 익숙한 단어가 보인 것이다.
[2] 삼검불: 정우야……!정우가 이 메시지에 주목한 건 그저 생전 처음 와 보는 파견지에서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삼검불……?’
다소 생소한 느낌의 이 단어가 아버지란 존재의 닉네임이란 건 그다음에나 기억해 냈다.
게다가 무려 2위.
온갖 파견자가 몰려와 있을 게 뻔한 이곳에서 2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건, 상당한 양의 정수를 가졌단 의미였다.
여러 의미에서 정신이 바짝 든다.
‘시베리아의 문제를 해결한 게 박민구였군.’
정우는 자신이 미국에 체류할 적에 민구를 러시아로 보냈던 일까지를 기억해 냈다.
성공하리란 확신까진 없었지만 더 나은 방법이 떠오르지도 않았기에 강행한 일이었다.
그런데 박민구가 정말 임무를 해낸 것이다.
‘놀랍군.’
여전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진 않았으나 첫째와 둘째의 놀이에 휘말린 탓에 인간성이라고 할 만한 몇 가지가 되돌아온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정우는 ‘대견하다.’라는 감정을 느낄 수가 있었다. 민구에게 말이다.
[1] 인간: 잘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다시 진입로를 닫아야 합니다.잘했다…….
대륙 하나를 구한 것치곤 허름한 공치사이긴 했지만 박정우에게 칭찬을 듣는 것 또한 결코 보통 일은 아니었다.
이에 채널 저편의 민구가 곧장 답을 보내왔다.
[2] 삼검불: 이미 대부분의 구원자가 가까운 진입로로 모여들고 있다. 조만간 이곳도 해방될 거야.그러더니 뒷말을 덧붙였다.
[2] 삼검불: 파견 준비를 또 해야 한다고. 지금 어디에 있는 거냐?저변에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대사였다.
에티오피아가 해방되고 나면 남는 파견지는 한 곳뿐이었으니까.
「오스트레일리아」
| 해체되었습니다! 침식자들의 영향으로 대지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한 개의 성역이 존재하지만 위태롭습니다. 그 누구도 성역 바깥에서 생존하지 못했습니다.
| 이 지역을 파견지로 선택한 구원자는 단일 종으로 이루어진 집합과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파견 지점이 성역으로 고정됩니다.
오스트레일리아.
파견 지점이 성역으로 고정되는 최악의 파견지.
제아무리 박정우라 하더라도 다른 구원자의 성역에 떨어지면 일개 인간일 뿐이다.
민구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는 거였다.
곧 다가올 마지막 파견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어서 만나야 한다고 말이다.
‘…….’
물론 정우도 이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에겐 자신만의 방식이 있었다.
슥.
발치의 패스파인더가 일러 주고 있는 에티오피아의 진입로 개수는 총 네 개.
정말로 그새 진입로가 많이 줄어 있었다.
[1] 인간: 지금도 진입로 근처에 계십니까? [2] 삼검불: 그래, 여기가 아마도…….민구가 자신의 위치를 대략적으로나마 알려 주려 하자 정우가 그의 말을 끊었다.
[1] 인간: 지금 보이는 녀석들을 다 죽이세요. [2] 삼검불: 뭐……?갑작스러운 학살 지시에 놀란 건 민구뿐만이 아니었다.
둘의 대화를 주시 중이던 채널의 다른 구원자들도 일제히 들고일어났다.
[12] 감람석: 뭐라고? [43] 입실론: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30] 흑수정: 제정신이야? 남은 진입로가 안 보여? [22] 철강: ……결국 뒤통수네.그러자 정우가 채널에 입을 열었다.
[1] 인간: 남은 진입로가 모두 닫히고 나면 순위권자들에게 전이 선택권이 주어질 거다. 하지만 너희도 알다시피 남은 파견지는 오스트레일리아뿐이야. 남의 성역 한가운데에 떨어지게 되겠지. 그런데도 과연 순위권자 녀석들이 잔류 대신 파견을 선택할까?반박하기 어려운 말이다.
정우의 주장은 계속 이어졌다.
[1] 인간: 절대다수가 잔류를 선택해서 하루라도 시간을 더 벌려고 할 거다. 그리고 잔류 기간 동안 에티오피아에 남은 정수들을 끌어모으겠지. 지금 내게 반문하는 너희를 죽일 거라는 이야기다.그러고 보니 ‘학살 명령’ 직후 채널에 이름을 띄워 올리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 10위권 바깥의 중하위권 각성자들이었다.
눈치 빠른 상위권자들은 새 1위의 의도를 즉각 알아채고서 이미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이다.
[43] 입실론: ……. [30] 흑수정: 그,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이에 정우가 말도 안 되지만 저들로선 받아들여야만 하는 제안을 내놨다.
[1] 인간: 아니, 곱게 죽지 마. 너희도 눈에 보이는 모든 걸 죽여라. 운이 좋다면 한두 녀석 정도는 삼검불과 싸워 볼 만한 정수를 모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30] 흑수정: 뭣……? [43] 입실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1] 인간: 남은 진입로 네 개 중 하나엔 이미 삼검불이 있고, 다른 하나는 내가 닫으러 가는 중이니 저 두 곳엔 희망이 없다. 하지만 나머지 두 곳에선 비교적 공정한 데스 매치를 치를 수 있겠지.그러자 마침내 한 자릿수의 괴물들이 입을 열었다.
[5] 탄자니아: ……미친 새끼. [3] 팔월: 그 ‘데스 매치’엔 우리도 낄 수 있다는 생각까지는 안 했나? 너, 그런 오만을 부리다간 정말 뒈진다고. [8] 큰그림자: 좋아. 다. 먹는다.물론 정우로선 저 데스 매치에 순위권자들이 끼든 말든 상관없었다.
대부분의 강자가 네 개의 진입로 근처에 몰려 있는 지금, 그는 수 시간 안에 모든 순위권자를 찾아내 죽일 자신이 있었다.
변수가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삼검불, 박민구였다.
정우는 민구의 정수량이 얼마나 되는지 몰랐고, 따라서 모든 구원자가 서로를 노리는 혼란 속에서 민구가 살아남을 확률이 어느 정도일지도 알지 못했다.
따라서.
[1] 인간: 누가 됐든 살아남는 자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진입로 근처에서 가장 큰 정수 덩어리를 찾아라. 그럼 날 만날 수 있을 테니까.이 대사에서 이른 ‘살아남는 자’엔 민구도 포함된 셈이었다.
쉬아아아…….
드디어 전방에서 진입로 특유의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우는 레이더를 통해 진입로 근처에 일곱이나 되는 정수 덩어리가 모여 있는 걸 확인했다.
아마도 방금 언급된 ‘데스 매치’ 때문에 진입로를 닫을 엄두가 안 난 걸 거다.
진입로를 닫기 위해 대량의 정수를 쏟아 냈다간 그 즉시 모두의 공격 대상이 될 테니 말이다.
‘……끝까지 본분을 다하지 않는군.’
정우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저들의 입장이 이해는 됐다.
하지만 수긍할 순 없었다.
파아아앗!
그가 진입로를 향해 고속으로 질주하자 근처에 모여 있던 구원자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봤다.
“아……!”
“맙소사.”
일부는 박정우와 무구의 모습을 보자마자 직감했다.
자신들의 앞에 있는 진입로가 ‘희망 없는’ 두 곳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반면 이 와중에도 불가능에 도전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모두가 불길한 방문자를 쳐다보는 사이 선제공격을 시도한다든가.
쐐애애애액!
푸아악!
어딘가에서 뿜어져 나온 정수 창이 근처에 있던 구원자 일부를 꿰뚫었고, 이것을 신호탄으로 해서 희망 없는 데스 매치가 시작됐다.
“…….”
그리고 정우는 그 아비규환을 정수를 통해 바라보면서 손을 뻗었다.
홧.
곧이어 전방으로 뿜어져 나간 정수 파동.
파아아앗!
무구의 도움조차 필요 없었다.
그가 뿜어낸 파동은 진입로를 포함한 일대 수백 미터 공간을 한꺼번에 집어삼켰다.
에티오피아에 남은 진입로 네 개 중 하나가 정리된 거다.
스릇.
이윽고 발치의 진입로 표식이 세 개로 줄었다.
게다가 저 중 하나는 그리 멀리 있지도 않았다.
표식의 크기를 보면 알 수가 있었다.
-움직여.
정우가 패스파인더를 확인하고 있자 무구가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길 재촉했다.
이에 정우는 곧장 발을 떼려다 말고 무구를 바라봤다.
조만간 박민구를 다시 만나게 될 테니 그의 모습을 머릿속에 익혀 두기 위해서였다.
이 무적 병기는 음성뿐만 아니라 외형도 아버지의 것을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지 않던가.
-움직여라. 네 아비의 모습은 다음 진입로를 닫고 나서도 충분히 볼 수 있으니까.
“……!”
마치 상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한 무구의 대사.
“네 말과 행동의 주체는 뭐지? 아무리 도구라고 해도 그 정도로 사고할 수 있다면 최소한의 자의식은 있을 거 아닌가?”
그러자 무구가 정우를 빤히 바라보더니 시퍼런 입술을 움직였다.
-나는 너다. 지금의 너보다 한참 더 진보됐던 너지. 날 만들기 전의 네가, 나약해질 것을 두려워해서 나를 만들었다.
그러더니 다시 진입로 방향을 가리켰다.
슥.
-그러니 이제 입 다물고 움직여.
* * *
오전 2시 11분.
행성 폐쇄 10일 차까지 약 6시간 남은 시점.
정우는 벌써 다음 진입로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무구와의 정수량 합이 500억 개가 넘어 버린 탓에 일대의 모든 정수 표식이 이쪽을 가리키고 있을 터였지만 이미 ‘데스 매치’가 한창인 저쪽에선 그 누구도 패스파인더를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정우는 어떤 견제도 없이 전투 현장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적어도 대략 20미터 거리까지는 말이다.
척.
우연일까.
20미터는 이전에 구원자가 정수를 판독할 수 있는 한계 거리였고, 정우가 이 거리의 안쪽으로 들어서자마자 진입로 주변에서 각개 전투 중이던 구원자들이 하나둘씩 뒤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몇몇이.
“우, 우웨에엑!”
“우우욱!”
흡사 침입자를 만난 일반인처럼 입에서 토사물을 뿜어냈다.
나머지도 구토까진 하지 않았다 뿐이지 크든 작든 심신에 변화가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뒷걸음을 치는 자,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더니 눈물을 흘리는 자, 또 누구는 갑자기 눈을 뒤집으며 몸을 떨어 대기도 했다.
이건 항상성 하락의 전형적인 증상이었다.
“…….”
정우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의 존재가 다른 이의 항상성을 떨어뜨리게 됐다는 사실을 말이다.
무구 때문일까? 아니면 어느 시점부터 이쪽이 행성 주민으로서 지켜야 하는 ‘선’을 넘었기 때문에?
또는 의식 속에 들어와 있는 첫째와 둘째의 지분이 점점 늘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이전의 정우였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그는 이 상황이 유쾌하지 않았다.
이젠 이쪽의 의도와 상관없이 상대를 해치게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구워어억……!”
또 한 사내가 거하게 무언가를 쏟아 내며 바닥에 엎어진다.
정우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향해서 정수를 뿜었다.
파앗.
푸아아악!
그러곤 곧장 진입로와 주변의 산 것들을 향해 어마어마한 양의 정수를 쏘아 보냈다.
아니, 실은 토해 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의 심정이 그랬다.
‘제길, 내가 아직 이 행성의 주민이긴 한가? 어떻게 같은 주민의 항상성을 떨어뜨릴 수가 있지?’
쿠드드득!
이어서 여느 때처럼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다 허공 속으로 쪼개져 사라지는 진입로.
그러자 그의 뒤편에 서 있던 무구가 음성을 흘렸다.
-이제 남은 진입로가 두 개뿐이다. 늦기 전에 행성 기록을 봐야 해.
“그건 동감이군.”
정우는 곧장 의식 구석에 박혀 있던 평가관을 호출했다.
‘평가관, 사학자를 발동해라. 10일 차의 행성 기록을 볼 거니까.’
이에 담당 평가관 다467이 기척을 냈다.
스스슷…….
그러곤 정우가 예상치 못한 대사를 읊었다.
-구원자 인간님께서는 10일 차의 행성 기록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뭐? 왜지?’
-간섭이 있는 기록을 열어 보려면 간섭이 예정된 영역의 공간이 충분해야만 합니다.
기시감이 든다.
간섭이 예정된 영역.
언젠가 미국의 구원자들이 9일 차 행성 기록에 접근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난 뒤 알게 된 개념이었다.
이전까지의 기록은 열람자가 과거의 일을 일방적으로 들여다보는, 문자 그대로 옛 기록을 보는 것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행성 기록을 열람하는 데에 있어서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그러나 9일 차의 침입자는 시간 변주 능력을 가진 녹스.
놈은 행성 기록 속에 머무는 와중에도 ‘미래’에서 접속한 기록 열람자를 인지해 버릴 정도로 고차원적인 존재였다.
즉, 9일 차 기록 열람이란 건 단순히 과거를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두 개 이상의 시간대가 교차하는 사건 속에 뛰어드는 행위였던 것이다.
당시 평가관은 이 현상을 가리켜 시간 간섭이라고 했다. 여러 종류의 간섭 중에서도 이번 것은 시간과 관련된 간섭이라고.
이 때문에 간섭이 벌어진, 정확히는 열람하는 순간 시간이 교차할 게 분명한 기록을 열어 보려면 열람자의 시간 여유도 충분해야만 했다.
9일 차의 기록을 보려면 열람자 역시 9일 차까진 존재할 거라는 보증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무수한 ‘예정된 미래’ 중 단 한 가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8일 차까지만 해도 생존 중이던 대다수의 미국 구원자들은 9일 차 행성 기록에 접속할 수 없었고, 결국 기록을 통해 녹스를 본 것은 정우뿐이었다.
정우만은 9일 차까지도 생존해 있을 확률이 존재했으니까.
그런데 그때로부터 수십 시간이 지난 지금, 9일 차를 무사히 버틴 정우가 10일 차 기록 열람을 하려 하자 평가관이 안 된다고 한다.
10일 차 기록도 마찬가지로 간섭 현상이 벌어질 건데, 너에겐 그만한 여유가 없다면서.
‘…….’
정우는 설마, 또 설마 하는 마음으로 평가관에게 물었다.
‘……10일 차 기록의 간섭 영역이 뭐지?’
그러자 평가관이 지체 없이 답을 줬다.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