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5
35화. 생방송 (3)
짜릿하다, 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이 모든 일이 벌어지기 전에, 정우는 일개 중소기업 직원에 지나지 않았다.
외모가 특출 나거나 주목받을 만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눈앞의 ‘단발’ 같은 여자와는 평생 연이 닿을 수 없는 신분이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온몸을 이용해 구명을 요청해 오고 있다.
얇은 미니스커트 위로 자신의 하반신 윤곽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는 건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이다.
그럼에도 양 무릎을 조금씩 앞뒤로 움직여 가면서 스커트를 더욱 팽팽해지도록 만들고 있다는 건…….
‘죽음이라는 게 그리도 무서운 건가. 다 내려놓을 정도로?’
참담하면서도 우쭐해지고, 흥분되면서도 우울해진다.
죽음.
그렇다. 무서운 존재다.
정우는 자신이 청소부를 처음 조우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갑자기 온몸이 얼음물에 잠겨 버린 듯하던 섬뜩함, 모든 사고 회로를 태워 버리고 ‘살아야 한다!’라는 생각만이 남게 되던 그 순간.
생존 본능이란 건 생물이 스스로에게 내리는 거부 불가의 명령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여자는 그 명령을 따르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걸 이용하고 있다.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습니까? 이걸로 죽으면 고통은 없어요.”
정우가 자신의 오른손을 슬쩍 보여 주며 이야기했다.
이 말엔 ‘아마도’라는 뒷말이 생략됐지만, 여자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죽는 게 왜 나아요……?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하라면 전 당신들 곁에 붙어 있는 걸 고르겠어요. 게다가 1위 구원자라면서요. 그게 정말이라면 결심할 가치가 있죠.”
결심.
이 단어와 함께 여자가 눈을 빛낸 순간, 정우의 머릿속에 역겨운 망상이 차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오른팔이 들어 올려졌다.
만년필을 쥔 채였다.
“억!”
예상치 못한 전개에 선웅이 짧게 비명을 질렀고, 곧 푸른 파동이 데스크를 집어삼켰다.
푸아아아악!
정수가 살점을 분해하는 특유의 소리.
“…….”
데스크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선웅은 자신까지 빨려 들어가는 줄 알고 몸을 잔뜩 웅크린 상태였다.
슥.
이윽고 선웅이 얼굴을 감싸고 있던 양팔을 내렸을 땐 데스크가 있던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나 있었다.
당황한 정우가 힘 조절을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 데스크 뒤편의 유리 벽면까지 모조리 날려 버린 것이다.
“후…….”
힘겹게 숨을 내뱉는 정우의 얼굴이 창백하다.
실제로 그는 메스꺼움을 느끼고 있었다.
방금 살인 역시 여태 그래 왔듯 온전히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
단, 이번엔 정수를 획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내가…… 이 정도로 망종이었던가.’
그리고 그 대가로 살기 위해 모든 걸 내건 여자가 죽었다.
이런 결말을 뻔히 알고 있지 않았는가. 대화가 시작되기 전에 바로 죽였어야 한다.
이 역겨운 상황은 정우 자신이 초래한 것이었다.
「죽는 게 왜 나아요……?」
불과 수 초 전까지만 해도 눈앞에 서 있던 여자의 음성이 머릿속에 어른거린다.
진심이었을까?
* * *
오후 10시 32분.
단발과 그녀의 파트너가 죽은 지 사십 분이 훌쩍 지나가는 시점이다.
정우와 선웅은 아직도 1층 로비에 머물러 있었다.
수백의 시신의 일부와 함께.
“얼추 정리된 것 같네요.”
무덤덤하게 말하는 정우의 모습에 선웅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우가 1층에 멈춰 있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그의 운동화 밑창에 사람 손가락 마디 수십 개가 치여 굴러갔다.
이 사내가 뿌려 대던 정수의 파동에 휩쓸리지 않고 이 세계에 남게 된 누군가의 흔적이었다.
약 사십 분 전, 데스크를 날려 버린 정우는 곧장 로비에 비치된 긴급 경보기를 작동시켰다.
43층이나 되는 건물을 일일이 훑을 수 없으니, 사람들이 스스로 내려오길 기다리겠다는 거다.
아니나 다를까, 경보기가 작동되자마자 로비 중앙 그리고 좌우 측면에 위치한 엘리베이터 세 대가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였다.
다음은…… 예상대로 일방적인 살육전이었다.
수십 명의 남녀가 한꺼번에 몰려나왔지만, 단 한 사람을 어쩌지 못하고 전부 소멸했다.
알다시피 정수의 파동을 맞더라도 전신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파동 끄트머리에 걸친 손가락이나 신체의 아랫부분, 특히 발목 밑쪽이 높은 확률로 남는다.
재수가 없다면 얼굴의 일부가 남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로비의 풍경이 지옥도에 가깝게 변했지만, 1층의 상황을 알 리 없는 위층의 인간들은 계속해서 내려왔다.
직접 싸울 일이 없던 선웅이 주시하게 된 건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엘리베이터의 문이 좌우로 쩍 갈라지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발목밭’을 보고서 말이다.
죽음을 예감한 자들의 얼굴.
그들이 붉고 누런 풍경의 일부가 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제 정수가 12,441개네요. 작은 진입로 정도는 닫을 수 있겠죠.”
더 내려오는 사람이 없자 정우가 중앙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을 눌렀다.
잽싸게 그의 뒤에 자리를 잡은 선웅은 속으로 경악했다.
이 많은 사람을 죽이는 와중에도 정수의 양을 확인하고 있었다는 건가.
“그럼 내일부터는 진입로를 찾아다니시는 겁니까?”
선웅이 애써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고, 정우는 대답하기 전에 발치를 먼저 쳐다봤다.
패스파인더의 정수 화살표는 아직 북쪽, 그러니까 한강 너머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일 아침 상황을 봐야죠. 일단 진입로 하나를 닫아 보긴 해야겠습니다.”
사람을 구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 방주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식인지 알기 위해서였다.
띡.
정우가 27층으로 가는 버튼을 누르자 곧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우우웅…….
낮은 진동음과 함께 공간감이 일렁인다.
“어…… 27층에 뭐가 있죠?”
어색한 침묵이 오기 전에 선웅이 말을 꺼냈다.
보나마나 무작위로 선택한 층일 테지만, 뭐라도 화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의 답변이 나왔다.
“사장실이요.”
정우는 이 말을 하면서 피로 얼룩진 엘리베이터 문을 물끄러미 봤다.
대성전자 사장이 여태 이 건물에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저 기억나는 층이 여기뿐이었다.
언젠가 읽었던 기사 덕분이다.
검찰이 서초 사옥 27층에 마련된 사장실을 압수 수색 했다던가.
‘별실 같은 곳에 침대와 욕실 정돈 갖춰져 있지 않을까.’
띵.
마침내 청명한 알람이 울리며 문이 다시 열렸고, 두 사람의 눈앞에 대리석으로 지어진 데스크가 나타났다.
역시나 이곳에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정우는 천장 우측 구석에 박힌 CCTV를 눈으로 흘기며 천천히 나아갔다.
데스크 좌측으로 쭉 뻗은 널찍한 통로를 따라가자 또 하나의 자그마한 로비가 나타나더니 정면에 우람해 보이는 문 두 짝이 나타났다.
목재 프레임에 가죽을 덧대 만든, 누가 봐도 사장실 입구였다.
입구 좌우로는 비서실이라고 적힌 방이 하나씩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여긴 문이 없었다.
“깨끗하네요. 일찍이 다 정리해서 떠난 것 같습니다.”
비서실 안을 들여다본 선웅이 보고를 해 왔고, 그사이 정우는 양손으로 사장실 문을 밀어냈다.
팔뚝에 묵직한 무게감이 전해지는 것과 달리, 이 문에선 경첩이 비틀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역시 고급이라 이건가.’
단, 문이 열리며 드러난 사장실의 내부는 의외로 간소했다.
벽 한 면에 책장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그 앞에 사장석으로 보이는 큼지막한 가죽 의자와 책상이 자리를 잡은 채였다.
그로부터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소파 두 개가 놓였는데, 사장석을 정면으로 바라보도록 배치되어 있었다.
마치 면접실처럼 말이다.
‘보통은 소파를 서로 마주 보게 두고, 그 사이에 테이블을 따로 놓지 않나.’
정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사장이 쓰던 책상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책상 밑에 감춰져 있던 짙은 남색의 소형 냉장고가 눈에 들어왔다.
덜컥.
냉장고를 열자 온갖 유형의 음료와 약병 몇 개가 나타났다.
주기적으로 복용하는 약이 있는 듯.
“방이 하나 더 있네요.”
벽면을 따라 실내를 슥 둘러보던 선웅이, 벽지와 똑같은 색의 문을 발견하고서 정우 쪽을 돌아봤다.
“예. 그런 걸 찾고 있었어요.”
정우가 대답하는 사이 선웅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나더니,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던 문이 젖혀지기 시작했다.
문 너머로 나타난 건 호텔식으로 꾸며진 방이었다.
아마도 사장의 개인 수면실일 것이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입구 정면에 가림막처럼 세워진 대리석 벽이었다.
벽 중앙에 커다란 전신 거울이 걸렸고, 그 옆엔 비서실과 연결될 것으로 추정되는 호출기가 있었다.
벽을 지나서 안으로 들어가자 드디어 침실과 욕실 그리고 옷방으로 보이는 공간이 나왔다.
침대 머리맡엔 자그마한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 모니터가 보여 주고 있는 건 이곳 27층 엘리베이터의 입구였다.
‘어지간히 경계심이 많은 양반이었군.’
정우는 주름 하나 없이 잘 정돈된 침대 시트를 훑어본 뒤, 옷방으로 가서 갈아입을 옷들을 챙겼다.
다음엔 침실 한편에 놓여 있던 소파에 누우며 날숨을 내뱉었다.
“후우…….”
드디어 고된 하루가 끝난 것이다.
|박정우 님의 소속 지역 내 순위는 ‘1’입니다.
|폐쇄 권능 보유자
구원자 서열은 아직 1위.
단, 기존 1위가 어디까지 추격해 왔을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쪽을 뒤쫓아 금세 튜토리얼을 통과했을지도 모르는 일.
오히려 2위일 때보다 더 조급함이 들었다.
“선웅 씨 먼저 씻으세요. 제가 씻기 시작하면 아마 욕실이 엉망진창이 될 겁니다.”
정우가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나지막하게 이야기하자 선웅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정우의 말대로 지금 그의 옷은 완전히 피투성이라 저 소파 역시 다시는 쓰지 못하게 될 터였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피비린내가 스멀스멀 넘어올 정도였으니.
“예…… 알겠습니다.”
선웅은 이 상황이 매우 어색했지만, 턱 근육에 힘을 잔뜩 주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오늘이 지나면 또 언제 목욕이란 걸 해 볼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내일도 모레도 수도 시스템이 멀쩡히 작동하리란 보장이 없으니까.
또한 제대로 씻지 않아서 감기라도 걸리는 날엔…….
‘중요한 건, 살아남는 거다.’
그새 상의를 전부 벗은 선웅은 바지 양쪽을 손으로 쥐다 말고 정우를 흘깃 봤다.
지구가 낳은 희대의 살인마이자 현 시점 가장 유력한 행성 구원자.
그는 그저 일에 지친 여느 사내처럼 소파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 * *
다음 날 오전 5시 21분.
조명이 완전히 꺼진 방 안에선 두 가지만이 빛을 발했다.
하나는 침대의 모니터.
또 하나는 선웅의 휴대폰이었다.
그는 벽면의 전기 콘센트에 충전기를 꽂아 놓은 채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지금이 그의 불침번 시간이기도 했고, 어차피 잠이 오질 않았다.
누가 와도 쉽게 잠들 수 없었을 것이다.
국내 1위 구원자. 그의 목숨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정수는 보유자의 의식이 잠겨 있으면 활성화되지 않는다.
즉, 아무리 많은 정수를 가지고 있어도 자는 동안엔 완벽한 무방비 상태라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정우가 자신을 살려 둔 이유라는 걸 선웅도 잘 알았다.
그래서 안심이 되면서도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걸 다 해 주겠다는 미모의 여자마저 죽여 버리던 박정우다.
만약 그와의 연고가 전혀 없었다면 자신 또한 이 시간까지 살아 있지도 못했을 터.
‘어떻게 보면 정말 대단한 인간이야. 이런 일은…… 단순히 힘을 쥐어 준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선웅의 시선이 침대 위에서 가는 숨을 내뱉고 있는 정우에게로 향한다.
어찌 됐든 그는 살아 있고, 먹이사슬의 최상부에 있다.
어쩌면 지구상 마지막 인간이 될지도 모르는 존재다.
그렇다고 해서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오히려 불행한 쪽에 가깝지 않을까.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습니까?」
1층 로비에서 정우가 단발에게 건넨 말이다.
선웅은 저 대사를 정우에게도 한 번쯤 던져 보고 싶었다.
우우웅……!
갑작스레 떨리기 시작한 휴대폰.
“헉.”
선웅은 어디서 전화가 온 줄로만 알고 화들짝 놀랐다.
그런데 전화가 아니라 문자였다.
그것도 정부에게서 온.
“어……?”
문자를 확인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다가 입을 막았다.
그건 예고 문자였다.
오늘 오전 7시, 정부가 직접 진입로를 막아 보이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고…….
‘그 과정을 생방송으로 중계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