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51
355화. 편도(2)
* * *
「누가 먼저 거래를 하겠나?」
정우와 민구 앞에 나타난 녹스는 허공에 초월적인 문자를 띄워 올리며 거래 대상부터 찾았다.
그러자 미리 손을 내밀고 있던 정우가 곧장 대답했다.
“나뿐이다. 어서 거래를 생성해라.”
「…….」
순간 녹스가 당황한 듯 느껴졌다면 착각일까.
본래라면 ‘가진 것을 보여라.’ 따위의 대사가 나왔어야 하지만 녹스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고, 이에 정우가 질문 하나를 던졌다.
“내가 누군지 모르나?”
그가 알기로 녹스들은 고유의 통신 채널이 있어서 어느 정도는 정보를 공유한다.
최소한 어느 지역의 누가 얼마나 강하니 조심하라는 정도는 말이다.
그런데 새로 진입해온 이 녀석은 정우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내가 알아야 하나?」
마침내 흘러나온 녹스의 대답.
“……그렇군.”
정우는 얼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그새 생성된 거래 표식에 손을 갖다 댔다.
팟.
「간이 거래」
|판매자 : 인간
|구매자 : 녹스
* 본 거래는 우주가 보증합니다.
가장 먼저 나타난 건 계약 설명문이었다.
그리고 본래라면 이 다음에 바로 정우가 판매할 상품들이 나타났어야 하지만…….
스릇.
설명문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 채운 건 ‘질문’이었다.
|거래 포인트가 남아 있습니다. 사용하시겠습니까?
이에 정우가 사용을 승인하자 그의 잔여 포인트가 표시됐다.
|잔여 포인트 : 75,760
이 밑으론 녹스의 판매 상품 목록이 나열됐지만 정우가 원하는 건 하나뿐이었다.
|현재 예정된 미래 열람 – 40,740
2번 법칙에 의해 예정된 최우선 미래를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예정된 미래를 열람하겠다.’
그러자 녹스가 재고하라는 듯이 확인 질문을 던졌다.
「확실한가? 이 거래가 끝나면 네 힘이 시험에 들 것이다.」
‘그건 알아서 해. 난 저것만 살 테니까.’
「알겠다. 거래가 승인되었다.」
무려 미래를 내다보기 위한 거래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의 간략한 수락.
하지만 그 결과물은 심상치 않았다.
파아아앗!
거래가 승인되자마자 정우의 전신이 마치 블러 처리가 된 것처럼 흐려졌기 때문이다.
“어……!”
녹스와 정우의 거래 현장을 주의 깊게 보고 있던 민구는 자신도 모르게 온몸의 털을 쭈뼛 세우며 이빨을 드러냈다.
그러나 정작 정우의 의식은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민구가 탄성을 내지르기도 전에 육체를 떠난 상태였다.
* * *
미래의 어느 시각, 아마도 오스트레일리아.
정우는 상공 높은 곳에 떠 있었다.
정확히는 실체가 없이 시야만 가진 채 하늘의 어딘가에서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특정 대상의 시야를 빌려오는 형태였던 행성 기록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
3인칭 관찰자 시점이라고 해야 할까.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을 넓게 둘러볼 수만 있을 뿐, 원하는 대상의 생각을 읽거나 그의 시야만을 따로 볼 수는 없었다.
어떻게 보면 행성 기록보다 훨씬 제한적인 셈.
‘저기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성역인가.’
정우는 까마득히 먼 저 아래쪽에 금빛을 내는 무언가가 있는 걸 봤다.
직경이 1킬로미터나 되는 성역이 저렇게 작게 보인다는 건, 지금 이쪽의 고도가 못해도 수십 미터에 이른다는 뜻일 거다.
그리고 그 ‘금빛’의 주변은 더없이 까만 이공간에 완벽하게 둘러싸여 있었다.
아니, 저 자그마한 성역을 제외하면 이 주변에 대지라곤 단 한 조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잖아.’
정우의 생각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쯤, 마침내 그가 머물고 있던 허공에서부터 어마어마한 밀도의 에너지가 감지됐다.
‘……!’
빠른 속도로 파랗게 젖어드는 일대의 공기.
정우는 이걸 보고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건지 직감했다.
‘이건…….’
지금 이건 미래의 박정우가 오스트레일리아로 파견 오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정우는 얼른 시선을 옮겨 주변을 살폈다.
이미 사위가 시퍼렇게 변해 있었지만, 저 멀리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어둑했다.
그러니까 여긴 아직 새벽인 것이다.
‘마지막 진입로를 닫고 곧장 파견을 결정했구나.’
10일 차가 오기 전에 오스트레일리아로 가는 게 최선이라고 여긴 것 같다.
그러나 파견 지점에 도착해서 어떻게 할 생각으로 이 결정을 내린 건지는 정우도 알 수 없었다.
미래에 해당하는 이곳에서, 그는 어디까지나 과거의 존재일 뿐이었으니까.
드드득.
이윽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 어딘가에서 철골이 구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러곤.
콰아아아아앗!
일순 주변이 번쩍이더니 새하얀 빛줄기가 성역을 향해 수직으로 낙하했다. 두 차례 말이다.
‘파견을 같이 왔군.’
거의 같은 순간에 낙하를 시작한 두 개의 빛줄기.
하나는 박정우고, 하나는 박민구일 터였다.
그리고 관전자 신분인 정우 역시 두 개의 빛줄기에 빨려 들어가듯 함께 낙하했다.
이건 정우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현재 위치에서 시선을 옮겨 다른 방향을 보는 정도의 자율은 있었지만, 그 이상의 행동은 완벽히 제한됐다.
파아아앗!
빛줄기를 따라 그야말로 광속으로 곤두박질한 정우는 눈 깜짝할 사이에 땅바닥에 닿았다.
‘……!’
그와 함께 성역으로 내리꽂힌 두 개의 빛줄기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일대는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을 정도의 밝은 이채에 휩싸인 상태였고, 곧 그사이로 인간의 음성이 들려왔다.
“파, 파견자다!”
“2번 지점!”
“2번 지점이다……!”
예상대로 오스트레일리아는 파견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들을 대신해 바깥으로 나갈 구원자를 기다리는 건지, 아니면 성역의 주인에게 떠먹일 양분을 기다리는 건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말이다.
‘……2번 지점이라는 건.’
정우 역시 시야가 확보되지 않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으나, 사람들이 착지 지점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는 것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놈들은 일찍이 성역 내 파견 지점을 익혀두고서 파견자가 올 때마다 빠른 대응을 해왔다는 거다. 불길한 조짐이었다.
철컥, 철커덕!
이어선 너무나도 익숙한 소총 장전음이 들려왔고, 잠시 뒤엔 사방을 가득 채웠던 불빛이 점차 사그라졌다.
‘2번 지점’에 떨어진 빛줄기 속의 두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 것도 이때.
‘……이런.’
정우는 비로소 등장한 ‘미래의 자신’을 보고서 미간을 찌푸렸다.
예상한 것보다도 훨씬 무력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성역의 흙바닥 위에 떨어진 박정우는 우선 사지가 없었다.
직전까지 정수로 빚어낸 팔다리를 쓰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이 모습을 직접 볼 때의 충격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여기에 더해 여전히 장님인 건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무구는?’
그의 히든카드인 무구가 없었다.
설마 파견과 동시에 연결이 끊긴 탓에 에티오피아에 남아 있는 걸까?
아니다. 무구는 선두 특혜를 통해 얻어낸 병기다.
겨우 그만한 이유로 잃어버릴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럼 아직 생성이 되지 않았다는 뜻인데.’
정우는 이제 막 정신을 차린 듯한 미래의 자신을 봤다.
정수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기에 그는 누가 봐도 나약했고,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뭉툭한 몸뚱어리를 애써 꿈틀거리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바로 옆에 네발로 선 민구는.
……크릉.
완전히 패닉에 빠진 눈빛으로 아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이 파견 계획의 첫 번째 선택지는 도착과 동시에 민구가 정우를 물고서 성역 바깥으로 달려가는 거였을 거다.
그러나 실제 파견지는 성역의 중앙부에 가까워서, 정우를 바깥으로 데려가려면 수백 미터 거리를 주파해야만 했다.
그것도 총을 든 인간 십여 명을 뚫고서 말이다.
‘불가능에 가까워. 아버지뿐만 아니라 나도 죽게 될 거다.’
민구의 생각도 지금 정우의 것과 같아 보였다.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에 놓인 아들을 물지도, 그렇다고 떠나지도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고만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정우 쪽의 차선책은 무엇이었을까.
‘이제 그런 건 없어.’
이 자리의 두 정우는 같은 인물이다.
따라서 그는 미래의 자신이 어떤 생각으로 여기에 왔을지 잘 알았다.
무구를 히든카드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파견 직후 놈이 기동하지 못할 수 있으리라는 것도 염두에 두고는 있었다.
성역에 떨어지자마자 팔다리가 사라질 텐데, 이러면 무구와의 거리가 조금이라도 멀어질 경우 연결이 끊겨 버리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예상하지 못한 건 무구가 아예 생성조차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
정우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미래의 정우 역시 본래대로라면 무구의 존재를 가지고 자신의 가치 증명을 할 생각이었을 거다.
정수를 운용할 수 없는 성역에 정수로 빚어진 거인을 끌고 왔다는 것 자체가 이쪽이 보통 구원자와는 다르다는 방증이지 않겠는가.
그런데 막상 와 보니 무구가 정지하긴커녕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
어차피 관전자인 정우로선 할 수 있는 게 없었기에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자 바닥에 누워 있던 미래의 자신이 입을 여는 게 보였다.
“왜 바로 쏘지 않지? 책임자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뭐, 뭣……?”
몇몇 인간이 총구를 위협적으로 움직이며 소리의 발원지를 찾아 고개를 내민다.
그러다 민구의 그림자 안쪽에 들어 있던 ‘몸뚱어리’를 발견하고서 흠칫 놀랐다.
성역에 도착한 자가 둘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안 것이다.
“파견자 외에도 하나 더 있습니다……!”
박정우를 발견한 인간들이 뒤편을 돌아보며 보고한다.
사지조차 없는 저 생물이 또 하나의 파견자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자 잠시 뒤, 포위망 바깥쪽에서부터 제법 묵직한 느낌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파견자 외에가 아니라, 그 사람도 파견자일 겁니다.”
이에 정우는 미래의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어낸 뒤 포위망 저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스윽.
마침 포위망을 이루고 있던 인간들이 누군가를 위해 길을 터주고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른 체격의 중년 사내가 유유히 걸어 나왔다.
“……오.”
짤막한 탄성.
그가 가장 먼저 발견한 건 호랑이의 육신을 한 민구였다.
“저 밑에 하나가 더 있습니다.”
사내가 민구를 유심히 살피자 옆자리의 주민이 손가락으로 땅바닥의 정우를 가리켰고, 이때가 돼서야 사내의 시선이 그리로 움직였다.
“맙소사.”
너무 놀랐다는 듯이 손으로 입을 가리는 건 분명한 연출이었다.
‘과거의’ 정우는 저 손에 가려진 사내의 입이 묘하게 뒤틀려 있으리란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저 녀석은 이 순간 우월감을 느끼고 있는 거다.
“어떻게…… 그 몸으로 파견자일 수가 있지?”
사내가 이 말을 하며 두 파견자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가자, 민구가 대번에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크릉!
“조심해. 이 행성을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니까.”
“오……?”
민구가 대사를 읊자마자 사내는 물론 좌중의 모든 인간이 술렁였다.
분명 짐승인데 사람과 똑같은 느낌의 음성을 내니 놀랄 수밖에 없던 것이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반응은 상당히 냉소적이었다.
“제대로 된 발음을 하는 호랑이는 꽤나 신기하지만…… 행성을 지켜낼 유일한 존재? 이건 잘 모르겠군. 도착하는 놈마다 비슷한 소리를 해댔거든.”
그러면서 사내는 주변을 둘러봤다.
“내겐 이 성역을 지켜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이 성역을 지키려면 결국엔 저 밖으로 나가서 진입로를 닫아야 해. 하지만 너희도 지금 보고 있다시피 바깥엔 조금의 땅도 남아 있지 않지.”
그러더니 조용히 검지를 들었다.
“내가 생각한 해법은 하나야. ‘우비’를 얻는 거다.”
우비.
변질된 개별 특혜의 2번 항목.
이계의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 힘이다.
다시 말해서 저 녀석은 10일 차까지 기다렸다가 선두 특혜 선택 때 우비를 사서 밖으로 나갈 생각인 거다.
물론 그러려면 10일 차가 도래하는 시점에 1위를 차지하고 있어야만 한다.
이에 미래의 정우가 땅바닥에서 몸을 슬쩍 비틀어 사내를 바라봤다.
“그럼 9일 차 개별 특혜로는 뭘 골랐던 거지?”
“당시 1위는 내가 아니었다.”
“……뭐?”
“이미 너희와 비슷한 주장을 하던 녀석들이 있었다. 하지만 밖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지. 다른 곳의 1위라고 해서 그렇게 특별하지도 않더군.”
“…….”
미래의 정우는 사내의 말을 듣고서 ‘난 다르다.’따위의 쓸데없는 소린 하지 않았다.
대신 잠시 생각하다가 갑자기 생뚱맞은 질문을 던졌다.
“이름이 뭐지?”
“……?”
“네 이름말이야.”
“그게 왜 궁금한 거냐.”
“알려주지 못할 이유는 없잖아? 어차피 날 죽일 생각 아닌가? 정말 내일 우비를 사서 나갈 생각이라면 날 죽여야만 할 테고.”
정우의 말에 사내는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곤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켄들. 마이어드 켄들이다.”
“아, 켄들. 그러면 한 가지만 더 묻지. 대답해줄 수 있겠나?”
“……말해라.”
맥락이 없는 아주 기묘한 대화.
좌중에서 이 대화의 진의를 알아차린 건 과거에서 온 정우뿐이었다.
‘이 녀석 설마.’
허공 속, 어딘가에 머물고 있는 정우가 존재하지도 않는 입을 쩍 벌린다.
이 대화는 정우 자신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래에서 왔다는 증거를 만들어 주고 있구나.’
정확히는 이 미래를 보고서 오스트레일리아에 ‘두 번째’ 방문하게 될 박정우를 위한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