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53
357화. 편도(4)
* * *
방법.
10일 차에 살아남을 방법.
정우는 저 명제 자체에 화가 났다.
탑과의 거래 5종, 외부 정수 유치, 여기에 더해 무구까지.
여태 할 수 있는 건 다 해 오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여전히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 헤매야 한단 말인가?
‘…….’
물론 ‘아직’ 당사자가 아닌 관전자 입장이기에 화가 나는 걸지도 몰랐다.
정작 미래의 정우는 죽음이 목전에 다가온 상황임에도 더없이 침착했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감정을 느낄 여유조차 없어서일 거다.
어쨌든 지금 미래의 정우가 보이고 있는 침착함은 정말 저게 자신이 맞는가 싶을 정도였다.
‘……무서울 정도로 미친놈 같군.’
하지만 맡은 임무는 어떻게든 해낼 것만 같다.
그리고 아마도 이게 지금껏 남들이 보아 온 박정우란 인물의 느낌일 터였다.
파아앗!
미래의 정우가 말없이 달리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30분.
사방 어디를 봐도 시커먼 이공간이 망망대해처럼 펼쳐져 있을 뿐이었고, 움직이는 것이라곤 무구를 제외하면 이따금씩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녹스밖에 없었다.
정신병 걸리기에 딱 좋은 환경이다.
“…….”
‘…….’
두 정우는 그렇게 고독한 질주를 계속해 나갔다.
그러다 마침내.
쉬아아아…….
저 멀리서 진입로 특유의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나타났군. 이제 몇 개나 남은 거지?’
과거의 정우로선 패스파인더를 확인할 수가 없었기에 미래의 정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살피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자 마치 상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미래의 정우가 답을 내줬다.
“이걸 닫고 나면 세 개가 남는다. 운이 좋다면 10일 차가 시작되기 전에 두어 개 정도만 남길 순 있겠지.”
그사이 진입로와의 거리는 200여 미터까지 줄어 있었다.
“아무도 마중을 나오지 않는군.”
미래의 정우가 혼잣말을 한다.
저 진입로에서 기어 나왔던 녹스는 이미 죽은 걸로 보였다.
이곳까지 오면서 쓰러뜨린 녹스만 해도 예닐곱은 됐으니까.
꾸드득.
이윽고 미래의 정우가 기다란 정수 창을 손바닥으로 말아 쥐었고, 곧장 진입로를 향해 쏘아 보냈다.
쐐애애액!
콰앗……!
수비병 하나 없이 공격에 노출된 진입로는 정수 창을 맞자마자 볼품없이 찌그러졌다.
이에 미래의 정우는 자신이 진입로를 제대로 격추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잠시 제자리에 섰다.
어차피 ‘육안’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으니 아무 방향으로나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게 동작의 전부.
‘…….’
과거의 정우는 이 모습을 보고서 처음으로 자기 자신에게 안쓰럽다는 감정을 가졌다.
“세 개 남았다.”
진입로가 찌그러지고 있음을 확인한 미래의 정우는 스스로에게 고지하듯 중얼거리고선 다음 진입로를 향해 내달렸다.
그러자 그를 따라 잠시 멈춰 섰던 무구도 다시 거대한 몸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젠 죽고 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한 괴물 말이다.
후욱, 훅……!
날쌘 기척을 내는 정우와 달리 무구는 다리와 팔을 움직일 때마다 상당히 묵직한 기척을 뿜어냈다.
웬만한 구원자는 생채기조차 낼 수 없던 녹스를 간단히 박살 내던 팔과 다리.
‘대체 다음에 뭐가 오기에 무구도 힘을 쓰지 못한 거지?’
과거의 정우는 새삼 무시무시해 보이는 무구를 천천히 훑어봤다.
이미 날이 완전히 밝아서 무구의 전신은 마치 보석처럼 반짝였고, 사방에 깔린 이공간 때문에 푸른 몸체가 더 선명하게 보였다.
‘무구는 내가 의식을 잃어도 알아서 움직여. 그런데도 10일 차 침입자에게 패배했다는 건…….’
두 가지 정도의 가능성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 새 침입자의 힘이 무구를 압도한다.
둘, 어떤 이유에서인지 박정우의 정수 자체가 비활성화되어 무구도 작동하지 않게 된다.
‘뭐가 됐든 좋진 않겠군.’
다만 정말로 저런 경우라면 미래를 보고서 돌아간다 한들 10일 차 침입자를 쓰러뜨리는 게 가능할까?
‘……아니야, 13일 차까지 버틴 행성도 있어. 불가능은 아니라는 거다.’
일전에 행성 기록을 통해 본 바에 따르면 존속에 성공한 행성 중 사9005는 무려 13일 동안 침입자와 맞서 싸웠다.
지구를 절체절명의 위기까지 몰아넣은 10일 차를 무사히 넘기고서도 3일이나 더 버텼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 행성은 주민들이 의식을 공유할 수가 있어 장기 항거에 매우 유리한 케이스였다.
타 행성에 비해 일차별 정수 유출이 적었고, 무엇보다 유력한 행성 구원자가 죽더라도 그와 견줄 만한 또 다른 존재가 재출현할 확률이 훨씬 높았다.
그간의 모든 역사를 주민들이 공유하기 때문에 선대 구원자의 유지를 후임자가 이어 가기 쉽다는 거다.
그러나 지구는 사9005와 달리 각 존재의 고유성이 극도로 높다.
박정우라는 존재 하나를 만들기 위해 행성의 수많은 것이 소모됐고, 그가 죽는 순간 여태 투입된 모든 자원이 매몰될 터였다.
‘그래서 난 죽으면 안 돼. 행성 존속이 확실해질 때까지는.’
미래의 정우도 과거의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새 저 멀리 나타난 진입로를 감지하고서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저걸 닫으면 이제 두 개.’
과거의 정우는 미래의 자신이 일러 준 진입로 개수를 되새기면서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이 더 누렇게 변해 있었다.
해가 높게 뜨기 시작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홰액!
이윽고 진입로를 사정권 안에 넣은 정우가 팔을 휘둘러 정수 창을 던졌다.
쐐애애애액!
여느 때처럼 날카로운 파공음이 허공을 갈랐으나 이공간 위로는 정수의 푸른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았다.
콰작!
여지없이 진입로를 꿰뚫은 정수 창.
그리고 이때쯤 과거의 정우는 무언가를 느꼈다.
스드드드…….
‘아.’
이건 아마 의식체 상태로 존재하는 자신만이 인지할 수 있는 현상일 터였다.
일대 공간이 아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끝내 행성 폐쇄 10일 차가 도래한 것이다.
‘……두 개.’
정우는 저편 허공에서 수축과 팽창을 반복 중인 진입로를 바라봤다.
저게 닫히고 나면 두 개의 진입로가 남는다.
“이제 시작됐다.”
곧이어 미래의 정우가 허공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며 나지막하게 이야기했다.
그러곤 이내 불투명한 막에 감싸였다.
선두 특혜 투표에 돌입한 거다.
다만 현재 남은 미해방지는 오스트레일리아 한 곳뿐이므로 사실상 정우의 선택이 투표권자들의 선택인 거나 다름없었다.
‘이 시점에 고를 만한 거라면…….’
지난 9일 차의 공통 특혜는 다음과 같았다.
[1] 지구에 대한 진입 제한 1단계 하락. [2] 해방된 지역의 불가침 상태 해제. [3] 패스파인더 삭제. [4] 더 이상 정수가 흡수되지 않음. [5] 특혜 선택자 중 무작위 세 명 희생.아마 2번 항목은 더 악랄한 것으로 대체되었을 거다.
하지만 어찌 됐든 현재 정우에겐 더 흡수할 정수도,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기에 4번을 선택하는 게 가장 효율적일 터였다.
쿠드드드…….
아니나 다를까, 또 한 번 주변 공간이 가늘게 떨렸다.
아마 이 행성에 우주적 힘 따위가 적용되는 순간일 거다.
투표에 참여한 박정우가 공통 특혜 선택을 마친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은 개별 특혜.
1. 서면계약
-우주적 구속력이 있는 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습니다.
2. 우비
-더는 이계의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3. 강림
-지정한 대상과 함께 소속 지역 내 원하는 지점으로 즉시 이동합니다.
4. 대장간
-정수를 이용해 무구를 만듭니다.
5. 성역
-지정한 구역 내에서 외부인의 정수 사용을 금지합니다. 진입로를 직접 폐쇄한 구역만 지정할 수 있습니다.
‘나라면 만일을 대비해 우비를 선택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대장간을 또 선택해서 두 번째 무구 제작.
과거의 정우는 나름의 계산을 하며 미래의 자신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보호조치가 바로 해제되지 않는 걸로 봐선 투표 중인 정우도 이번 선택지에선 제법 고민이 되는 듯했다.
그러다 마침내.
스아앗……!
수분이 지난 뒤에야 미래의 정우가 선두 특혜 선택을 마치고 돌아왔다.
“정수 흡수 불가, 우비.”
그는 의식을 되찾자마자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했다.
자신이 선택한 특혜들을 알리는 것이다.
‘상식적인 결정이네.’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의 정우는 미래의 자신이 내린 결정을 보고서 그의 죽음을 납득했다.
10일 차, 그것도 행성 기록이 간접적으로 ‘패배’를 암시한 최후의 날.
전례 없는 큰 문제다. 이런 문제에 상식적인 돌파구가 통할 리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상식적인 해법이 통하지 않았으니 패배가 예정된 것 아니겠는가.
“지금쯤 진입로에서 새 침입자가 들어오고 있겠군. 잘 봐 둬라.”
미래의 정우는 이렇게 말하고서 습관적으로 발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런 다음엔.
스윽.
여태 해 온 것처럼 전방으로 쏘아져 나가려 했다.
갑자기 몸이 새우처럼 확 꺾이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홰액!
“어억……?”
미래의 정우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놀람과 더불어 모종의 두려움이 깔린, 그런 소리였다.
왜냐하면 지금은 행성 폐쇄 10일 차가 개시되려는 찰나였기 때문이다.
10일 차 침입자가 이 행성에 방문하려는 순간 말이다.
‘설마.’
의식체인 과거의 정우도 이때만큼은 온몸에서 소름이 돋아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우워어어억!”
육신을 가진 미래의 정우는 다시 허리를 뒤편으로 크게 젖히며 허공으로 토사물을 뿜었고, 곧 변화를 일으켰다.
‘아아…….’
이 변화는 제삼자 시점을 가진 과거의 정우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닫혀 있던 박정우의 눈꺼풀이 강제로 열리더니 그 안에서 어마어마한 밀도의 어둠이 흘러나왔다.
스르르륵.
마치 눈물 대신 눅진한 검은 기름을 흘리는 것만 같다.
이 순간 박정우의 존재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고, 오로지 어둠만이 그 자리에 있었다.
슈아아아아……!
어디선가 바람 소리가 난다.
다름 아닌 정우의 눈에서 흘러내린 ‘어둠’ 속에서 나는 거였다.
이 어둠은 정우의 온 얼굴을 적시고 나선 목을 따라 흘러 내려가 상반신을 덮기 시작했다.
‘세, 세상에.’
이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인 과거의 정우는 압도적인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어둠 안에서 ‘그놈들’의 존재가 느껴지고 있어서였다.
순수한 악의,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존재감.
스스슷…….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체이자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는 과거의 정우에게까지 그 영향력이 미쳤다.
그가 추위를 느끼게 된 것이다.
가지고 있지도 않은 피부가 얼어붙는 듯해서, 정우는 자신의 의식을 있는 힘껏 움츠렸다.
그러자 어느새 미래의 정우를 완전히 뒤덮은 어둠 안에서 아주 익숙한 목소리, 아니 범람하는 의미가 밀려 나왔다.
「아……! 드디어 너희를 직접 찢어 볼 수 있게 됐구나!」
이 격렬한 느낌의 의미들은 둘째가 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보아라, 우리가 육신을 얻었다.」
첫째 특유의 광대한 존재감과 함께 정우를 삼킨 어둠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물병이 깨지며 물을 쏟아 내듯 말이다.
화아아악……!
‘…….’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일대를 잠식하고 난 어둠은 볼일을 다 봤다는 듯이 정우의 육신을 놓아줬다.
스르릇.
이제 미래의 정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고, 그 대신 어둠 안쪽에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형태의 존재감이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