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58
362화. 굴절(3)
열 번째 날.
이 행성의 존속 여부가 결정될지 모르는 중요한 날이다.
그럼에도 지구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문구를 송출했다.
「먼저, 제가 통보받은 사안에 대해서 전달드리겠습니다.」
|지구에 대한 진입 제한이 한 단계 낮아졌습니다.
|지구의 정수 총량이 8% 감소했습니다.
|행성 폐쇄까지 32일 남았습니다.
‘……8퍼센트.’
지구의 안내를 훑던 정우가 미간을 찌푸린다.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정산 내용을 완벽히 외우고 있었다.
정수 총량이 언제 얼마나 감소했으며 공통 특혜는 언제 무엇이 선택됐는지까지 말이다.
오늘 안내된 정수 손실량 8퍼센트는 어제, 그러니까 녹스가 침입해 왔던 9일 차에 잃어버린 정수를 의미했다.
그리고 이 8%라는 수치는 지난 7일 차의 9%를 제외한다면 사상 최고치.
그만큼 녹스의 전투력이 대단했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지구에 남은 정수의 양은 큰 차이가 없을 터였다.
일찍이 이런 문제를 예상하고 여신 거래 등을 통해 외부의 정수를 끌어왔으니까.
이제 남은 건 10일 차에 도래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뿐이었다.
-곧 선두 특혜가 발동됩니다. 구원자 ‘인간’님께서는 현재 소속 지역 내 1위 구원자이므로 특혜 내용을 직접 선택할 수 있습니다.
여느 때처럼 정우에게 선두 특혜 선택권이 있음을 알려 오는 평가관 다467.
다만 이전과 다르게 이젠 녀석조차 정우를 구원자 ‘인간’이라 칭하고 있었다.
‘더는 아무도 날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군.’
단 한 존재를 제외하고 말이다.
“……아버지.”
정우는 가장 가까이 있는 기척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냐? 말해라. 바로 옆에 있으니까.”
기다렸다는 듯 정우의 부름에 응한 민구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정우 역시 이때만큼은 가슴이 저릿해질 정도의 긴장감을 느꼈다.
“아버지에게 간파가 없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뭐?”
“실은 그때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거짓말이라니?”
급격히 커진 민구의 동공.
그러나 정우는 민구의 눈을 볼 수 없었다.
그 대신 아까보다 훨씬 거칠어진 민구의 호흡을 통해 그의 감정을 감지했다.
“그 자리에서 제 계획을 말했다면 초월자들도 알게 됐을 겁니다. 그랬다면 아마 이곳으로 돌아오기 전에 일이 벌어졌겠죠.”
“그럼 네 계획이라는 건…….”
“아버지가 제 정수를 가져간다고 해도 행성 폐쇄를 막아 낼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요. 제가 죽은 뒤 초월자들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선 확인된 바가 없고, 만약 놈들이 저와 함께 소멸한다 하더라도 10일 차 침입자가 남죠. 모든 게 불확실합니다.”
“네 말대로 내가 갑자기 수백억 개나 되는 정수를 가진다고 해서 널 대체할 순 없겠지.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라는 거냐?”
“확실한 구원 방법을 만들어야죠. 하지만 제가 해가 질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절 죽이세요.”
그러나 정작 정우의 음성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직 확신이 없는 것이다.
스르릅.
그는 저 말을 끝으로 불투명한 차단막에 감싸였다.
마지막 투표를 위한 격리였다.
“정우야!”
흥분한 민구가 차단막을 몸으로 들이받는 와중에도 지구의 안내문은 계속해서 출력됐다.
「각 지역의 최상위 구원자가 특혜 권한을 선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정우는 이미 투표 시스템 안에 들어가 있었다.
팟……!
|특혜 선택을 위해서 인간님에 대한 보호 조치가 개시됐습니다.
|특혜 선택에는 10분의 시간이 주어집니다.
|제한 시간 내에 특혜를 선택하지 않을 경우 무작위 특혜가 발동됩니다.
그러더니 지구와의 밀회로 인한 페널티 안내 문구가 나타났다.
|귀하가 소속된 행성에 징계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이에 따라 공통 특혜의 일부 항목이 변질되었습니다.
|본 특혜는 행성 전체에 적용되며 다수결로 결정됩니다.
지난 투표에서 선택한 항목이 또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을 거란 이야기다.
앞서 이 투표에 참여했던 ‘미래의 정우’는 새 항목 대신 ‘정수 흡수 불가’를 선택했다.
하지만 ‘현재의 정우’는 그럴 수 없었다.
후임자를 위해 정수를 남길 필요가 있었으니까.
‘변수를 최대한 막아야 해.’
이윽고 10일 차의 공통 특혜 목록이 나타났다.
파앗!
역시나 기존 2번인 ‘해방된 지역의 불가침 상태 해제’가 사라지고 새로운 항목이 편입된 상태였다.
[1] 지구에 대한 진입 제한 1단계 하락. [2] 모든 유형의 항상성 하락이 20% 가속. [3] 패스파인더 삭제. [4] 더 이상 정수가 흡수되지 않음. [5] 특혜 선택자 중 무작위 세 명 희생.‘…….’
정우는 새 항목을 보자마자 당혹감을 느꼈다.
항상성 하락이 가속된다는 건, 정우 자신뿐만 아니라 후임자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4번과 5번은 안 된다.’
4번은 후임자를 위해서, 5번은 정우 자신이 투표가 끝난 이후에도 한동안 살아 있을 필요가 있기에 고를 수 없었다.
‘……3번도 마찬가지.’
아직 진입로가 두 개나 남았으므로 패스파인더도 포기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진입 제한 1단계 하락과 항상성 하락 가속뿐.
정우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끝내 2번, 항상성 하락 가속을 선택했다.
후임자의 정신력을 좀 더 믿기로 한 것이다.
틱.
그가 공통 특혜 선택을 마치자 바코드를 찍는 듯한 소리가 났고, 이어선 새 안내 문구가 나타났다.
|개별 특혜를 선택합니다.
|변경된 공통 특혜에 대응하여 개별 특혜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본 특혜는 선택자에게만 적용됩니다.
다만 개별 특혜엔 새 항목이 추가되지 않았을 터였다.
서면 계약과 우비를 제외한 나머지는 재선택이 가능한 항목이었기 때문이다.
팟.
마침내 나타난 10일 차 개별 특혜.
1. 서면 계약
-우주적 구속력이 있는 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습니다.
2. 우비
-더는 이계의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3. 강림
-지정한 대상과 함께 소속 지역 내 원하는 지점으로 즉시 이동합니다.
4. 대장간
-정수를 이용해 무구를 만듭니다.
5. 성역
-지정한 구역 내에서 외부인의 정수 사용을 금지합니다. 진입로를 직접 폐쇄한 구역만 지정할 수 있습니다.
선임자라고도 할 수 있을 ‘미래의 정우’는 이 구간에서 우비를 골랐으나 현재의 정우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결정을 내렸다.
‘1번, 서면 계약을 선택하겠다.’
유일한 투표권자가 선택을 마치자 곧 모든 문구가 사라지며 특혜 선택이 접수됐음을 알렸다.
스슷.
다음엔 정우의 몸뚱어리를 감싸고 있던 차단막이 서서히 걷혔다.
잠시 사라져 있던 감각들이 하나둘씩 돌아온 것도 이때.
가장 먼저 청각이 돌아왔고, 이어선 촉각이 다시 생겨나면서 여전히 팔다리가 없음을 상기시켰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다음에 벌어졌다.
「각 지역의 최상위 구원자가 특혜 권한 선택을 마쳤습니다.」
…….
「투표 결과에 따라, 현 시간부로 모든 유형의 항상성 하락이 20% 가속됩니다.」
특혜 투표 종료를 알리는 문구가 나타나기 무섭게 ‘채권자’들이 그에게 달려든 것이다.
첫째와 둘째 말이다.
「서면 계약? 그게 널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나?」
「‘백지 수표’를 잊지 마라. 네겐 우리에게 유희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에 정우는 이를 갈며 항변했다.
‘내게 유희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면 너희에게도 그만한 값을 내줘야 할 의무가 있어. 그건 어디까지나 ‘거래’였으니까. 그리고 나는 아직 모든 값을 받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치 있게 행동해라. 힘은 얼마든지 줄 테니.」
둘째가 특유의 싸늘한 기운을 내뿜으며 정우의 의식을 압박했고, 이에 정우 역시 날카롭게 응수했다.
‘그럼 나도 가치가 있는 힘을 받아야겠지.’
그러곤 곧바로 서면 계약을 발동했다.
‘계약 발동.’
스아아앗……!
정우가 계약을 발동하자 그의 신체 위쪽으로 시커먼 공간이 열렸다.
우주가 효력을 보장하는 서면 계약서였다.
“……!”
이에 정우의 곁을 지키던 민구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고, 멀찍이서 현장을 바라보던 켄들도 뒷걸음을 쳤다.
물론 이들에겐 그저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무의 영역이 새로 등장한 것처럼 보였으나, 정우와 두 초월자에겐 그렇지 않았다.
분명히 계약서 안엔 ‘갑’과 ‘을’의 이름을 적는 부분이 있었고, 언제든지 계약 내용이 기입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곧 초월적인 문자가 계약서 위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을’은 지구의 존속이 보장되지 않는 현신을 실행하지 않는다.」
「이 계약의 효력은 ‘갑’의 존재 유무와 관계없이 발생한다.」
이다음 ‘갑’의 위치에 새겨진 이름은 다름 아닌 정우의 것이었다.
즉, 정우는 두 초월자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 현신하는 대신 지구에 대한 행성 폐쇄를 막도록 도와 달라고.
그러나 결코 받아들여질 리 없는, 형편없는 제안이었고 대번에 첫째가 소름 끼칠 정도의 존재감을 풍겨 왔다.
「네가 경험해 온 대로, 그 안엔 무엇이든 적을 수 있다.」
그러더니 얼마간의 여유를 두고서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러나 계약이라는 것은 쌍방의 동의가 없다면 완성되지 않지.」
「기대한 것보다도 미련하군.」
뒷말은 둘째의 것이다.
그러면서도 놈은 계약서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여러 행성을 다니면서 서면 계약의 대상이 된 건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그럼 조건을 조금 바꾸도록 하지.’
정우는 두 존재의 시선이 여전히 계약서에 가 있는 것을 확인한 뒤 계약 내용을 바꿨다.
쉬리릿…….
「‘을’은 어느 경우에도 ‘갑’을 소멸시키지 않는다.」
단 한 줄.
그러자 정우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찌익……!
그의 머릿속에서 종이가 찢기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엄청난 고통이 찾아온 것이다.
관자놀이가 깨지는 것만 같은 이 통증은 극한의 한기, 둘째의 짓이었다.
「우리는 네 안에 있다. 잊었나?」
놈이 흘려보내는 의미의 유속이 그야말로 엄청나서, 정우는 의식이 찌그러지는 느낌마저 받았다.
반면 첫째는 여전히 ‘점잖음’을 연기하고 있었으나 녀석의 의미에서도 진노가 여실히 풍겨 나왔다.
「감히 우릴 상대로 장난을 치고 있었군.」
‘흐아아아악……!’
충신으로 인한 고통은 이것에 비하면 애들의 장난이었다.
정우는 의식 속에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 대다가, 간신히 한 올의 사고를 해냈다.
‘여…… 역시 성역 안에선 현신하지 못하는 건가?’
성역. 구원자들의 고유 권한이자 우주가 내려 준 ‘특혜’의 산물.
정우는 자신이 본 미래에서 성역과 마찬가지로 특혜의 일종인 무구가 두 초월자에게 파괴되지 않는 것을 보고서 깨달았던 것이다.
이들이 우주의 특혜만큼은 어쩌지 못한다는 걸.
무구, 성역, 그리고 서면 계약.
「…….」
‘이 안에서 너희가 벌일 수 있는 최악은 이게 전부인 거야. 기껏해야 고통을 주는 거지. 그것도 나 하나에게만.’
「하지만 충분한 고통이지 않은가?」
실로 그랬다.
그 어떤 인간도 이 고통을 단 한 순간조차 참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우는 단순히 ‘인간’이라고 정의하기엔 복잡한 존재였다.
생존 본능, 아니 자신의 존재보다도 목적의식이 위에 있었으니까.
어떤 의미에선 정우 또한 초월자인 셈일 터.
‘충분하지. 그런데 너희의 즐거움도 충분한가? 어차피 이 고통은 언젠가 끝나. 충신 덕분에 몸이 부식되고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오늘이 다 지나기 전에 아버지가 날 죽일 거다.’
이 사실은 초월자들 역시 잘 안다.
‘너희도 알다시피 난 구원을 절대 포기하지 못해. 하지만 구원을 이어 갈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은 포기할 수 있지. 너희가 계약에 응하지 않으면 난 이대로 소멸하는 걸 택하겠다.’
「네 아비에게 구원을 맡길 셈인가? 결코 해내지 못할 것이다.」
‘어차피 너희가 현신하면 행성은 반드시 소멸해. 최악을 불러들이느니 차악을 택하겠다.’
「…….」
이쯤 오니 초월자들도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러자 이때 정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계약 내용을 또 한 번 수정했다.
스르릇.
「‘을’은 구원자 삼검불을 어떤 형태로도 훼손하지 않는다.」
「이 계약의 효력은 ‘갑’의 존재 유무와 관계없이 발생한다.」
초월적인 문자로 적힌 계약 조건.
정우가 기입한 ‘훼손하지 않는다.’라는 조건엔 정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민구의 정수 사용을 보장하란 뜻이다.
‘그럼 공평하게 서로 도박을 하자. 내 아버지가 정말 구원을 해낼 수 없는지 직접 확인하자고.’
이에 정우의 의식을 쑤셔 대던 통증이 점차 잦아들었다.
그러더니 첫째가 아주 격렬한 의미를 뿜어냈다.
「좋다, 대신 넌 우리가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