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62
366화. 물보라
“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
갑자기 주변이 밝아진 듯해서, 민구는 뒤를 돌아보려 했다.
그러자 정우가 악을 쓰며 그를 다그쳤다.
“절대 돌아보지 마세요! 절대……!”
행여나 민구의 심경에 변화가 생길까 염려되어서였다.
첫째의 눈꺼풀이 끝내 열려 버렸고, 이제 정우는 놈의 흰자위가 발하는 백색 빛을 온몸으로 받아 내고 있었다.
물론 서면 계약 덕분에 첫째의 눈동자가 민구의 항상성까진 떨어뜨리진 않겠지만 정우는 그가 아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의지를 잃고 말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스으으으…….
정우는 지금 부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뺨, 이마, 턱. 얼굴의 곳곳에서 거뭇한 재 같은 것이 벗겨져 올라가며 정우의 부피를 조금씩 줄여 갔고, 이는 그의 의식도 마찬가지였다.
‘…….’
가까스로 버티고는 있지만 정우의 의식은 엄청난 압력과 함께 까마득한 허공 안쪽으로 당겨지고 있었다.
마치 달의 인력이 바닷물을 끌어당기듯 첫째가 그를 끌어내는 중인 것이다.
‘조금만 더. 진입로 앞까지만 가면 돼.’
그러나 정우는 첫째가 당장이라도 자신을 소멸시킬 수 있다는 걸 잘 알았다.
‘미래’에서 본 바에 따르면 녀석이 붉은 동공을 확장시키자마자 박정우가 소멸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쩌적!
무시무시한 파열음과 함께 어둠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마침내 첫째가 동공을 개방했다는 의미였다.
「부러져라.」
놈의 육중한 음성이 들이닥침과 동시에 사위가 더욱 시뻘겋게 변했다.
정우를 잡아당기던 인력이 극도로 강해진 것도 이때부터였다.
고깃덩이를 억지로 잡아 뜯는 듯한 우악스러운 힘이 정우의 의식…… 아니, 존재 자체에 가해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정우’를 일격에 지워 버렸던 공격.
“흐아아아악!”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정우는 육성으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정우야……?”
결국 뒤를 돌아보고 만 민구는 정우의 모습을 보고서 경악했다.
녀석의 온 얼굴에 거미줄처럼 뻗친 잿빛 균열 안에서부터 시커먼 재가 뿜어져 나왔고, 상체에 걸친 셔츠 안쪽에서도 뭔가가 요동치고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 자신의 아들이 강제로 분해되고 있는 것이다.
“아……!”
믿기지 않는 광경.
민구는 끔찍한 사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시선을 비껴냈다가 아들의 어깨 너머를 봐 버렸다.
시뻘건 허공 한가운데에 떠 있는 첫째의 눈.
저것이 정우를 갈기갈기 찢어지게 한 원흉일 터였다.
“이 씹……!”
대번에 악을 집어먹으며 전신을 파랗게 빛냈지만 우습게도 그의 다리는 여전히 첫째의 반대 방향으로 달음질하는 중이었다.
이것만이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걸 아는 탓이었다.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며 잿더미로 변해 가는 아들을 태운 채 진입로 방향으로 도주하는 일 말이다.
“정우야아아!”
민구는 붉은 공간 속을 질주하며 아들의 이름을 절규했다.
이 절규는 민구의 처참한 비명이자 구원자 박정우에게 전하는 위로이기도 했다.
이 아비가 스러져 가는 널 보고도 제 역할을 계속하고 있노라고.
그러니 행성 구원은 여전히 진행 중인 거라고.
“아아아아……!”
악에 받친 소리를 뿌리며 내달리던 민구의 시야에 마침내 그것이 들어왔다.
쉬아아아…….
빨간 허공에 뚫린 까만 구멍.
지구에 남은 마지막 진입로였다.
“…….”
민구는 발치의 패스파인더를 보며 저것이 정말 자신이 찾던 진입로인지 재차 확인했다.
그러곤 다시금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쉬리릿…….
맥없는 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흩어지고 있는 정우가 눈에 들어왔다.
녀석은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마치 그림자 같았다.
몸에서 벗겨져 나가던 ‘재’조차도 얼마 남지 않아서, 실루엣 자체가 여기저기 비어 있었다.
훅 불면 먼지로 변해서 날아가 버릴 것만 같다.
“정우야, 다 왔다.”
민구는 이미 울고 있었다.
시야가 얼룩져서, 그렇지 않아도 흐릿한 정우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게 돼 버렸다.
그래서 눈물을 닦고 싶었지만 진입로를 향해 계속 달려가야 했기에 그럴 수 없었다.
파팟, 팟…….
네발이 교차하며 붉은 바닥을 거듭 밀어낸다.
민구는 이제 육안으로도 진입로 근처에서 흩날리고 있는 ‘먼지’들을 볼 수 있었다.
10일 차 침입자의 영역에 거의 다다른 것이다.
팟!
이윽고 그의 앞발이 먼지들 사이로 진입한 순간.
「아버지.」
미약하나마 정수가 실린 음성이 흘러내려 왔다.
이에 민구는 튕기듯 고개를 돌려 아들을 향했고, 보게 됐다.
“……아.”
푸른 물보라.
정우가 머금고 있던 모든 정수가 제자리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러더니 곧장 민구의 육신 위로 쏟아져 내렸다.
녀석이 자신을 태우고 달리라 했던 이유가 이것이었던 거다.
쏴아아아앗……!
대량의 정수가 유입되자 어마어마한 압력이 민구의 의식을 조이기 시작했다.
“크하악!”
이 와중에도 진입로에서 뿜어져 나온 먼지가 그의 육신을 수없이 스쳐 갔지만,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고 있는 정수의 존재가 항상성이 하락할 틈을 주지 않았다.
쒸이이익!
의식이 통째로 세척되는 것만 같다.
그러는 동안에도 눈앞, 아니 의식의 한가운데엔 일련의 숫자가 지속적으로 표기됐다.
다름 아닌 정수량이었다.
……15,420,115,352.
……23,631,631,116.
……37,293,021,693.
최초 154억 개에서 372억 개까지.
생전의 정우가 한 말대로였다.
「제 정수가 온전히 들어간다는 가정하에 최소 370억 개를 보유하게 되실 겁니다.」
그러나 민구의 정수량 상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스아앗.
……41,462,611,032.
……48,721,462,005.
……56,062,357,569.
‘어……?’
400억 개를 간단히 넘겨 버린 그의 정수는 기세가 죽지 않고 560억 개를 돌파하더니, 이내 말도 안 되는 수치까지 도달했다.
‘……!’
「67,304,613,429」
무려 673억.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수 총량이 154억 개에 불과했던 민구로선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양이었다.
이만한 양의 정수를 자신이 온전히 담아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고 말이다.
그 역시 수준급의 구원자였기에 대량의 정수를 한꺼번에 흡수할 경우 어떤 후유증이 오는지 정도는 잘 알았다.
정수 총량이 기존 대비 40% 정도만 늘어도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이 의식을 찌르고 들어온다.
그런데 이번의 경우는 40%가 아니라 네 배에 가까운 정수 증가.
본래라면 의식이 아예 깨져 버렸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민구는 답을 오래 찾을 필요가 없었다.
곧 그의 앞에 답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파앗!
민구 자신의 몸에서부터 갑자기 푸른빛이 쏘아져 나가더니 불그스름한 바닥 위에 무언가를 빚어내기 시작했다.
스스스슷…….
‘……설마.’
민구는 자신을 스쳐 가는 먼지들과 진입로, 그리고 그 뒤편에서 이쪽을 노리고 있을 침입자조차 잊은 채 발목부터 조형되고 있는 그것을 바라봤다.
인간의 것임이 분명한 발가락과 복숭아뼈.
바닥과 맞닿은 부위가 완성되자 그다음부턴 눈 깜짝할 사이에 신체가 돋아 올랐다.
스사아앗!
“아……!”
신장 2미터 40센티.
전신이 정수 특유의 푸른 빛깔을 띠고 있는 이 존재는 바로 무구였다.
생전의 정우가 자신의 정수 298억 개를 부어서 만든, 파괴 불가한 병기 말이다.
우주의 보증을 받는 선두 특혜의 산물임과 동시에 정수 그 자체.
다만 손상되지 않는 대신 본래의 성질로 돌아가지 않는 특성이 있어 민구에게 그대로 전이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외형은 민구가 알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거인’은 민구 자신이 아니라 정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치 녀석이 다시 돌아온 것처럼 말이다.
“저, 정…….”
민구가 눈가를 바르르 떨며 무구에게 다가가려 하자 녀석이 갑자기 시퍼런 이채를 내뿜으며 팔을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홰애액!
“……!”
정수 298억 개의 출력.
그러나 민구를 공격하려던 게 아니었다.
민구는 무구에게서 푸른 궤적이 그려지기 무섭게 새하얀 것들이 시야를 꽉 채우는 걸 보고 나서야 사태를 깨달았다.
콰콰콰쾃!
무구의 몸통을 날카롭게 찔렀다가 도로 튕겨 나가는 하얀 촉수들.
10일 차 침입자 ‘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한 거였다.
놈은 제각각 꿈틀대는 무수한 촉수를 산발이 된 머리처럼 사방으로 휘날리며 진입로 위에 엉겨 붙어 있었다.
이윽고 무구가 바늘을 바라보더니 더할 나위 없이 정우다운 목소리를 냈다.
-저건 제가 맡을 테니, 아버지는 진입로를 닫으세요.
아버지.
민구는 저 세 음절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존재가 아들이 아니라는 건 잘 알았다.
저건 정우의 ‘오리지널’에 가까운 존재.
자신의 아들은 아니지만 박정우와는 가장 유사한 존재인 것이다.
-아버지.
무구가 민구를 재촉하기 위해 또 한 차례 그를 부른다.
이에 민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날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내 아들은 죽었으니까.”
그러면서도 진입로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가자.”
팟!
민구가 전방으로 크게 도약하자 무구가 그를 호위하듯 측면으로 바짝 붙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파괴되지 않으며 감정조차 없어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병기.
이 행성의 가장 유력한 구원자였던 박정우의 판단력과 목적의식이 오롯이 담긴 그릇.
지구, 아니 이 우주를 다 뒤져도 이보다 더 뛰어난 전우를 찾기는 어려울 터였다.
촤아아악!
또 한 차례 허공에서부터 흰 촉수들이 빗발친다.
민구의 정수 총량 역시 수백억 개에 달했기에 자력으로도 촉수들을 피해 낼 수 있었지만 무구가 한발 빠르게 움직였다.
콰드득.
오른손을 거대한 칼날로 바꾸더니 그대로 허공을 쓸어버린 거다.
홰애액……!
머리 위를 하얗게 물들이던 촉수 세례가 일시에 걷혔고, 민구는 이 틈을 타서 전방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실은 이미 진입로가 사정권 안에 들어온 상태였기에 이대로 정수를 뿜어내면 이 모든 일을 끝낼 수 있었다.
타탓, 탓!
“…….”
진입로와의 거리가 계속 좁혀진다.
그러자 무구가 민구를 흘깃 보더니 진입로 위에 붙어 있는 바늘에게 달려들었다.
정말이지 두려움이라곤 한 올도 보이지 않는 용맹함.
쫴애애애액!
생명의 위협을 느낀 바늘이 수백 줄기의 촉수를 뻗어 무구를 휘감았으나 잠시뿐이었다.
곧 무구가 전신에서 가시를 뿜어내며 촉수를 갈가리 찢었고, 다시 무서운 기세로 놈에게 달려들었다.
콰악, 콱!
끝내 바늘의 육신에 무구의 정수 칼날이 들이박혔다.
투명한 체액이 온 사방으로 터져 나가며 붉은 어둠을 일렁이게 만든다.
민구는 이 모든 광경을 눈에 담으면서 진입로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슈아아아아…….
온전히 혼자가 된 진입로는 특유의 기묘한 기척을 내면서 허공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진입로를 닫으세요. 이제 마지막입니다.
바늘을 잘게 조각낸 무구가 바닥으로 빠르게 떨어져 내리며 민구에게 요청했다.
놈은 여전히 정우의 음성을 냈으나 더는 민구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에 민구는 진입로 안쪽에 붙어 있던 시선을 떼어 내 무구에게로 옮겼다.
다음엔 저 먼 허공에서 이쪽을 주시 중인 첫째를 바라봤다.
아마 ‘미물’로선 민구가 유일한 존재일 것이다.
그는 현신한 초월자를 직접 보아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정우는…… 정말 소멸한 거냐?”
민구가 이렇게 물었으나 첫째는 답을 주지 않았다.
어쩌면 정우와 달리 민구는 초월자와 대화할 자격을 얻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슥.
답을 받지 못한 민구는 진입로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보유한 모든 정수를 방출해 냈다.
“지구는…… 존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