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63
에필로그- 비망록(1)
* * *
지구 폐쇄 개시 10일 차, 남양주의 성역.
중성은 의사당의 낡은 테이블에 앉아 금일 조례 결과를 적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선 최초의 투표권자, 즉 원로 중 한 사람이자 현직 서기인 명일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
성역 서기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가 모든 기록물의 검토 및 관리인 만큼 중성이 사실 그대로 적어 나가는지 감시 중인 것이다.
“…….”
물론 성역 안정화의 일등 공신이자 명일과 마찬가지로 원로이기도 한 중성이 공적인 기록에 거짓을 섞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원칙은 원칙. 제아무리 중성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임을 맡은 자가 대부분 원로 출신인 이유도 여기에 있었고 말이다.
원로들은 박정우의 여정을 일부나마 함께한 자들이다.
이들은 성역이 세워지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으며 구원자 박정우를 포함한 지구의 주민들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지 잘 알았다.
그래서 원로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원칙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항상 자신의 잇속보단 성역의 안녕을 위한 선택을 내리는, 대체 불가능한 인재들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그건.
끼익.
방금 막 문을 열며 들어선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인간, 조선웅. 35세 남성.
구원자 박정우의 직장 동료이자 현직 성역의 수호자.
머리 위에 적힌 ‘대리자’라는 글자가 그의 정통성과 막강한 권한을 드러냈고, 이 때문에 그가 들어서자마자 실내의 분위기가 은근히 경직됐다.
“오셨습니까.”
중성이 기록하길 잠시 멈추고 고개를 들어 선웅을 맞이했다.
이에 명일도 뒤를 돌아보더니 가볍게 묵례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반면 선웅은 두 동료의 얼굴을 보기 무섭게 업무 이야기부터 꺼냈다.
“여전히 분위기가 어수선하더군요.”
성역 주민들을 말하는 거다.
지난 8일 차에 벌어진 시카고 성역과의 ‘좌석 경합’ 이후 여론이 아주 미묘해졌다.
당시 시카고 측에 좌석을 내주기 위해 남양주 쪽에서 잉여 인력을 수십 명 정리했는데, 그 안에 임산부의 남편들이 다수 포함된 탓에 유족 그룹이 생겨 버린 게 원인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아주 명료했다.
이미 한 차례 선별을 거쳐 성역에 안착한 인원도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내쳐질 수 있다면 더는 성역에 헌신할 필요가 없지 않겠냐는 거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쿠데타를 시도하거나 대대적인 선동을 하진 않았지만 크든 작든 저런 불만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는 건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저들에게 동조하는 인원도 점점 늘어날 테고 말이다.
특권 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일부 기술자와 의료진들이야 이미 기득권을 가진 셈이니 저런 여론에 휩쓸리지 않겠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저쪽’이 더 자극받을 여지가 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계급 간 갈등이라고 해야 할까.
결국엔 성역도 기성 세계처럼 더 가진 자와 덜 가진 자 간의 대립 구도가 생겨 버리게 될지도 몰랐다.
‘끝내 역사적 답습을 피할 수 없는 건가.’
중성은 피곤에 절은 선웅의 얼굴을 보면서 착잡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러다가.
“어……?”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며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쥐고 있던 펜이 종이를 가로로 찢으며 미끄러진 것도 이때.
픽!
이에 명일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중성을 쳐다봤다가, 황급히 그의 시선을 좇아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다름 아닌 선웅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명일 또한 선웅을 보자마자 묵직한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웬만해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선웅이 더없이 충격받은 얼굴로 서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 선웅 씨! 어떻게 된 겁니까?”
그의 머리 위에 명함처럼 붙어 있던 ‘대리자’라는 문구가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더니 곧이어 바깥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어어?”
“꺄악!”
“겨, 경비! 경비!”
침입자가 보호막을 뚫고 들어왔나 싶을 정도로 다급하고 악에 받친 비명들.
“맙소사.”
“대체 무슨 일입니까?”
중성과 명일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의사당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동안에도 선웅은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
마치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끼익.
이윽고 중성이 의사당 출입문을 열었고, 그 뒤를 바짝 따르던 명일의 입에서 처참한 비명이 쏟아져 내렸다.
“아아……!”
보고 만 것이다.
남양주 성역의 보호막이 사라져 버린 광경을.
아니, 정확히는 성역이 송두리째 사라진 거였다.
“아!”
사태를 깨달은 명일이 눈물을 왈칵 쏟으며 땅바닥에 주저앉는 사이 중성은 그보다 한 수, 아니 두 수를 더 앞서 나갔다.
홰액!
그는 여전히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선웅을 마구 흔들며 물었다.
“선웅 씨! 정우 씨가 죽은 겁니까? 정신 차리고 대답해요!”
그 역시 감정에 매몰되어 몹시 흥분한 상태인 건 마찬가지였으나, 절대자 박정우를 통해 배운 한 가지만은 잊지 않고 있었다.
「최악 대신 차악.」
선웅이 대리자 신분을 잃게 된 원인이 정말 박정우의 사망이라면 지금 원로들에겐 정우를 애도하는 것조차 사치일 터였다.
성역의 보호막이 영영 사라진 건 물론 절대자까지 소멸했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되면 이곳은 그야말로 무법 지대가 될 테니까.
만약 그 사태를 막고 싶다면 누구보다도 빠르게 남양주를 장악해야 했다.
“선웅 씨!”
중성이 악을 쓰며 성역의 수호자를 다그치자 마침내 선웅의 입에서 ‘불가능’의 동음이의어들이 마구 발음됐다.
“예, 정우 씨는 죽었습니다. 구원자와의 연결이 끊겼고, 차용 가능한 정수도 사라졌으니 그렇게 보는 게 맞겠죠. 방주도 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웅의 입술이 흔들린다.
그는 눈꺼풀을 한 번 꽉 닫고 나서 말을 이었다.
“구원자가 사망할 경우 대리자에겐 유언이 전달되도록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방금 그 유언을 받았습니다.”
“이……!”
중성은 선웅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바깥으로 뛰쳐나가면서 한 사람의 이름을 외쳤다.
“이성태! 성태 씨!”
이성태.
경기 북부 광역 수사대 출신의 형사이자 현직 성역의 집행부장.
다들 경황이 없는 상태이기에 아직까진 경비대원들이 집행부장의 명령만큼은 따를 터였다.
“중성 씨!”
다행히 저 멀리서 집행부장 이성태가 중성의 목소리를 듣고서 달려왔고, 이에 중성은 그를 향해 다급히 손짓하면서 동시에 명일을 일으켜 세웠다.
“오전 9시 42분, 정우 씨의 공식적인 사망 시각입니다.”
“……?”
중성의 대사에 명일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고, 이내 그의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짝!
중성이 그의 뺨을 후려친 탓이었다.
“정신 차려요. 정우 씨가 죽었다고 해도 여긴 아직 성역입니다. 미래를 위한 모든 자원이 여기에 모여 있어요. 해야 할 일을 하십시오.”
“그, 그렇지만…….”
“정우 씨 사후에 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명일 씨는 모든 걸 적어 두지 않았습니까. 제가 미처 챙기지 못한 게 있는지 묻는 겁니다.”
그리고 그사이 이성태가 경비대원 셋을 대동한 채 의사당 앞에 나타났다.
이에 중성은 성태가 어깨에 두른 소총과 허리춤의 리볼버를 흘깃 본 뒤, 주변에 들리지 않게 조용히 지시했다.
“지금 당장 모든 경비대원을 호출해서 주민들을 한자리에 모아야 합니다. 일단 의료 지구부터 가세요. 무력 충돌이 생긴다면 그쪽이 첫 번째일 겁니다.”
“……만약 이미 사태가 발생했다면 저희는 어디 편을 들어야 합니까?”
“…….”
성태의 물음에 중성은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결론을 내렸다.
“의료진…… 그리고 환자들의 편입니다. 살인을 막기 위한 살인은 허가합니다. 단, 물자를 들고 도주하는 경우엔 그냥 놔두십시오.”
“알겠습니다.”
중성의 지시를 받은 성태가 의사당을 떠났고, 이를 본 선웅이 오른팔에서 시퍼런 정수 칼날을 뽑아내며 걸어 나왔다.
그는 대리자이기 전에 천만 단위의 각성자이기도 했다.
신분을 잃었지만 그의 몸 안에 깃든 정수는 여전히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치안엔 아직 문제가 없어요. 저 말고도 다른 각성자가 일부 있긴 하지만 최악의 사태가 온다고 해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처 몰랐다.
전혀 다른 형태의 ‘최악’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중성 씨.”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 가는 듯하자 명일이 중성의 어깨를 살짝 잡았고, 이에 중성이 그를 돌아봤다.
“예, 말씀하시죠.”
“모두 잊게 됩니다.”
“……?”
“정우 씨요. 만약 행성이 존속에 성공한다면 우리 모두 정우 씨의 존재를 완전히 잊게 됩니다.”
정우가 6일 차에 탑에서 구매해 온 상품 중 하나인 ‘사학자’의 대가였다.
“그렇다는 건…….”
중성이 혼란한 눈빛으로 성역의 전경을 훑자 때맞춰 모두의 시야에 일련의 문구가 나타났다.
|행성의 모든 진입로가 폐쇄됐습니다.
|‘지구’에 대한 폐쇄 조치가 중단됩니다.
|모든 방문자는 즉시 복귀하십시오.
이것은 시스템이 송출한 메시지.
즉, 우주가 행성 폐쇄와 관련된 모든 존재에게 전하는 공지였다.
지구의 주민뿐만 아니라 이 행성에 진입한 이계의 존재들에게도 말이다.
그리고 다음엔.
「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구입니다.」
이 모든 일이 시작됐던 그때와 같이 물리 법칙을 무시하는 문구가 모두의 앞에 나타났다.
「지난 열흘 동안의 항거를 통해, 마침내 존속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안내를 따라 주신 주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항거 기간 동안 소실된 정수는 기존 총량의 51%에 달하나, 일부 자원의 노고로 인해 상당량의 손실을 만회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특별한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
이는 박정우를 일컫는 것이다.
중성을 포함한 세 원로 모두 이 사실을 바로 알아차렸다.
「현 시간부로 행성 내 모든 침입자가 복귀하였습니다. 따라서 더는 외부의 위협이 없다고 판단하여 여러분에게 지급한 정수를 회수할 예정입니다.」
“……뭣?”
선웅이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고, 곧 그가 빚어냈던 정수 칼날이 허공에 녹듯이 사라졌다.
스르륵.
“……!”
칼날뿐만 아니라 정수량 자체를 확인할 수가 없게 됐다.
한순간에 모든 정수가 사라져 버린 거다.
「다음은 금일의 최종 정산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러더니 새로운 유형의 문구들이 나타났다.
|마지막 진입로를 닫은 존재: 삼검불, 인간/호랑이
|가장 많은 정수를 보유한 존재: 삼검불, 인간/호랑이
|구원자 전형의 최고 점수 달성자: 인간
“……?”
다들 마지막 문구를 보고선 일종의 오류일 거라고 생각했다.
박민구의 구원자명이 표기되지 않은 것이거나, 또는 행성 폐쇄에 맞서 분투한 ‘인간’이라는 종 전체를 치하하는 의미라고 생각한 거다.
그 누구도 저게 남양주 성역의 주인이었던 박정우의 구원자명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고 표현하는 게 옳을 것이다.
어느새 모두가 정우를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으니까.
“아……. 그럼 민구 씨가 결국……?”
명일이 확신 없는 목소리를 내며 나머지 두 원로를 번갈아 본다.
중성은 뭔가 석연찮다는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중이었고, 선웅도 꿈을 꾼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뭔가, 뭔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때 저편에서 총성이 났다.
타앙!
“아……!”
방향은 의료동.
총성이 한 발에서 그쳤다는 점에 안도해야 할까.
가장 먼저 중성이 반사적으로 뛰어나갔고, 곧이어 명일이 허겁지겁 수첩을 챙기며 뒤를 쫓았다.
“…….”
그러나 선웅은 처음 섰던 그 자리에 그대로 박혀 있었다.
왜냐하면.
「박민구를 잘 부탁합니다.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그의 시야엔 아직도 ‘유언’이 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 그는 이것을 누가 보내온 건지, 이게 유언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엇.”
눈앞에 보이던 문구가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고, 잠시 뒤엔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뭐, 뭐였지? 방금 그거.’
선웅이 눈을 깜빡인다.
정말 무얼 보긴 한 걸까.
너무 긴장한 탓에 헛것을 봤거나, 지금의 기분처럼 아주 짧은 꿈을 꾼 건 아닐까.
“……하.”
선웅은 무의식중에 양손을 들어 얼굴을 마구 비볐다.
그러곤 다시 팔을 떼어 냈는데, 손목에 무언가 새겨져 있는 게 보였다.
짤막한 가로 실선 하나와 ‘인간’이란 글자.
“이건…….”
그리고 이때쯤 모든 주민의 시야에 새 알람이 떠올랐다.
|구원자 삼검불이 지구 특혜를 선택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