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64
에필로그- 비망록(2)
* * *
|구원자 삼검불이 지구 특혜를 선택 중입니다.
지구 전체에 저 문구가 송출되는 순간에도 민구는 여전히 오스트레일리아에 있었다.
마지막 진입로가 있던 자리에 말이다.
차마 떠날 수가 없어서였다.
푸른 물보라가 되어 사라지던 아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으니까.
지구가 존속에 성공했음에도 민구는 아들을 잊지 않은 것이다.
「‘을’은 구원자 삼검불을 어떤 형태로도 훼손하지 않는다.」
「이 계약의 효력은 ‘갑’의 존재 유무와 관계없이 발생한다.」
정우가 남긴 이 계약이 민구의 기억 변질까지도 ‘훼손’으로 판단해 사학자의 사후 효력을 무시한 덕분이었다.
사학자의 판매자가 계약상 ‘을’인 첫째와 둘째였기에 가능한 일.
하지만 민구는 저런 사실까진 미처 추론하지 못했다. 그렇게까지 명민하게 굴기엔 슬픔이 너무 컸다.
“…….”
그가 지구를 존속시킨 건 아들이 그걸 원했기 때문이다.
이제 놈이 그토록 원하던 결말을 만들어 냈으니 민구로선 더 할 것도,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스아아앗…….
사위는 아직도 불그스름한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더는 외부의 위협이 없다던 지구의 말과 달리 두 초월자가 아직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
물론 모든 위협이 사라졌다는 건 사실일지도 몰랐다.
놈들이 흩뿌린 어둠 사이로 지구가 모습을 드러낸 걸 보면 말이다.
스르르릇.
지름이 2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구체.
정수의 그것과 똑같이 푸른빛을 띤 지구는 민구에게서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선 허공에 문구를 띄워 올렸다.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지금부터 지구 특혜 선택을 진행하겠습니다.」
이 모든 게 시작됐던 그때처럼 인간의 언어로 만들어진 문구였으나, 민구는 그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잠깐, 이게 다 무슨 짓이야? 넌 저놈들이 안 보이나? 내 아들, 아니 네 최고의 구원자를 죽인 놈들이 저기 있잖아……!”
실로 그랬다.
적어도 오스트레일리아 일대는 지구의 것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지구가 두 초월자의 공간을 빌려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러자 지구가 허공에 띄웠던 문구를 다른 것으로 바꿨다.
「제가 마련할 수 있는 최대한의 특혜를 준비했습니다. 신중한 선택을 부탁드립니다.」
마치 이 상황을 애써 무시하기라도 하듯, 지구는 예정된 절차를 진행했다.
팟!
이윽고 민구의 눈앞에 펼쳐진 ‘지구 특혜’.
행성 폐쇄를 통해 겪은 ‘선두 특혜’와 달리 이건 문자 그대로의 의미였다.
지구 존속에 지대한 공을 세운 존재에게 특혜를 주겠다는 거다.
그리고 그 특혜는 지구가 장담한 것만큼이나 대단했다.
[해방자의 표식]|지구의 어떤 주민에게도 해를 입지 않습니다.
[탐색자]|전시안을 상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신화]|더 이상 쇠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순간을 스스로 지정할 수 있습니다.
[태초]|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융합된 종일 경우 본래대로 갈라집니다.
[융화]|행성 내 모든 종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해방자의 표식은 구원자 본인의 존속을 위함이고, 탐색자는 복원을 위한 능력일 것이다.
비단 문명의 복원뿐만이 아닌 지구의 생태계까지 말이다.
전시안을 상시로 사용할 수 있다면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 사방에 흩어진 다른 생물까지도 모두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
신화는 사실상 불로장생을 의미했고, 태초는…….
‘……아.’
몹시 화가 난 상태로 특혜 항목을 읽어 내려가던 민구는 ‘태초’에 이르러 시선을 멈췄다.
문득 또 정우가 생각나서였다.
본연의 모습.
만약 정우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잃어버린 눈과 사지를 되돌려 받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자 자연스레 그다음 문구에 눈길이 갔다.
‘융합된 종일 경우 본래대로…….’
‘태초’를 골라도 정우를 되살리진 못하겠지만 자신을 위해 애써 준 냄새에게 온전한 육신과 의식을 돌려줄 순 있을 거다.
“…….”
민구는 눈꺼풀을 꽉 내리누르며 이성을 되찾으려 애썼다.
이미 모든 게 끝났다.
더는 돌이킬 수 없다면 가능한 최선을 찾아가는 게 옳을 것이다.
“그럼 이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되는 건가?”
그가 이렇게 묻자 지구가 기다렸다는 듯 허공의 문구를 다시 바꿨다.
「이미 모든 특혜를 두 분께 드렸습니다.」
“뭐……?”
민구가 반문하기 무섭게 그의 의식이 둘로 쪼개졌다.
까득.
“이 미친……!”
감히 형용할 수 없는 이질적인 감각이 뇌리를 강타했고, 동시에 육신 또한 쪼개졌다.
물리적으로 말이다.
촤악!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호랑이의 형태였던 육신이 좌우로 벌어지더니 그렇게 나뉜 각각의 덩어리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재조형됐다.
민구는 인간의 모습으로, 냄새는 호랑이의 모습으로.
‘하……!’
인지 범위 따윈 우습게 뛰어넘는 경험에 민구는 신음조차 흘릴 수 없었다.
그의 시야 한쪽에 전시안 고유의 문양이 생겨난 것도 이때였다.
정말 지구가 방금 본 모든 특혜를 한꺼번에 내려 준 것이다.
이건 그야말로…… 신의 능력이었다.
* 민구!
그새 온전한 호랑이의 육신을 갖춘 냄새가 민구를 향해 입을 쩍 벌리며 달려들었다.
비록 사위가 어둠에 잠식되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더없이 반가운 존재 아니던가.
민구는 자신도 모르게 딱딱하게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서 냄새를 받아 안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정수 역시 전량 회수됐기에 냄새의 체중을 버텨 낼 수가 없었다.
퍽!
결국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엎어진 민구.
그러자 그의 손바닥을 아주 불쾌한 촉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다름 아닌 초월자들의 영역이 주는 촉감이었다.
놈들의 공간은 아주 미세한 실 형태의 어둠이 무수하게 엉킨 형태였는데, 여길 직접 손으로 짚자 위화감이 확 느껴진 것이다.
덕분에 민구는 다시금 ‘구원자다운’ 사고를 하게 됐다.
“그런데 이게 왜 ‘선택’이지? 모든 특혜를 다 받을 수 있다면 그건 선택이 아닌 거잖아.”
크릉.
냄새도 민구의 의문에 동의한다는 듯 그를 따라 저편의 지구를 바라봤다.
이에 지구가 기존에 띄워져 있던 특혜 항목의 가장 아래에 새 문구를 새겼다.
쉬리릿…….
[차출]|더는 소속 행성에 예속되지 않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납니다.
|증명된 가치에 따라 권한이 재부여 됩니다. 소속 영역을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맙소사.’
민구는 부연 설명을 듣지 않아도 차출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더는 소속 행성에 예속되지 않는다…….
즉, 나머지 특혜를 모두 포기하고 우주의 어딘가에 자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다만 어떤 존재가 되는지는 증명된 가치에 따라 다르다.
“내 가치가 무엇이기에 저런 선택지를 내놓은 거지? 아니, 그 이전에 내가 왜 차출을 두고 고민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이렇게 묻는 민구의 심장 박동은 이미 빨라져 있었다.
알게 모르게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이 행성이 존속 판정을 받아 자유를 얻었음에도 초월자들이 계속 남아 있는 이유를.
놈들은 민구의 특혜 선택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
왜일까?
스르륵.
이윽고 지구가 새 문구를 허공에 그렸다.
「차출을 선택하지 않을 경우 귀하는 본 행성에 귀속되며 더는 구원자가 아니게 됩니다.」
“구원자가 아니게…….”
아리송한 표현에 민구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순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빠져 있던 퍼즐이 꿰맞춰지듯, 의아하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이해됐다.
사학자, 서면 계약, 그리고 기억.
‘행성이 존속했는데도 내가 여전히 정우를 기억하고 있구나. 아직까진 구원자라서.’
구원자.
정확히는 정우와 초월자 간의 서면 계약서에 적힌 구원자 삼검불.
지구에 대한 폐쇄 절차가 끝났음에도 민구는 아직 ‘삼검불’로 존재 중인 것이다.
우주에서 통용되는 그의 가치란 ‘행성 폐쇄를 막아 낸 구원자’였으니까.
그렇다는 건.
“차출을 선택하지 않으면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정우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리겠군. 그러니 나한테 선택하라는 거야. 이 행성에 남는 대신 기억을 잃을지, 아니면 기억을 가진 채 우주 어딘가로 쫓겨날지.”
「…….」
“그런데 어째서 이걸 알려 준 거지? 네겐 내가 이곳에 남는 게 무조건적으로 득이 되는 일 아닌가? 설마 내가 기억을 잃어선 안 되는 이유가 따로 있나?”
「…….」
지구는 민구의 추론을 확인시켜 주지 않았다.
어쩌면 지구의 신분으론 더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는 게 아닐까?
평가관들이 담당 구원자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걸 이야기해 줄 수 없었듯 말이다.
하지만 민구는 박정우의 아버지 아니던가.
“……아.”
그는 지구가 은연중 드러냈던 행간을 읽어 내고 말았다.
“네가 분명히 그랬지.”
민구는 푸른 구체 형태의 지구를 응시했다.
“제가 마련할 수 있는 최대한의 특혜를 준비했습니다, 라고.”
이 말인즉슨, 일련의 특혜들은 지구가 민구를 위해 직접 고른 것들이라는 뜻.
따라서 민구가 행성에 남지 않을 경우도 충분히 고려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내게 특혜를 줬다고 했다.”
민구와 냄새의 융합이 해제되었다는 것부터가 그 방증이었다. 시야 한쪽에 걸린 전시안 표식도 마찬가지.
「그렇습니다.」
마침내 지구가 민구의 질의에 대답을 했다.
이에 민구는 두말없이 자신에게 이미 허락된 특혜를 사용했다.
“답은 내가 직접 찾도록 하지. 지금 바로 전시안을 사용하겠다.”
“……!”
민구와 지구의 대화를 조용히 따라가던 냄새가 깜짝 놀라며 귀를 쫑긋 세웠고, 이내 지구의 푸른 표면이 거칠게 일렁였다.
스스스슷!
녀석이 전시안을 가동해 주고 있는 것이다.
파앗!
곧이어 민구의 시야에 그로선 처음 보는 것인 전시안의 검색 시스템이 나타났다.
흡사 스무고개처럼 문답 형태로 검색 대상을 구체화하는 특유의 방식.
|찾고자 하는 대상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까?
‘아……!’
이제 민구의 심장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박정우…… 아니, 인간……!’
그러자 문구가 바뀌었다.
|당신의 위치를 기준으로, 어느 거리까지 탐색하겠습니까?
민구는 이 질문을 받자마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만에 하나 녀석이 정말 어딘가에 존재 중이라면, 과연 어디에 있을까?
‘……온 우주.’
|원하는 조건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떠올리십시오.
‘…….’
민구가 눈을 감는다.
그는 이제 자신의 아들이자 인간이길 포기했던 무참한 살인마, 또한 지구의 구원자이자 이 행성에서 유일하게 초월자들과 맞섰던 존재를 떠올리고 있었다.
단편적인 사고로는 결코 정의할 수 없을, 복잡하면서도 단순 명료한, 모순적인 존재.
|조건 접수가 완료됐습니다. 대상을 검색합니다.
“……!”
민구는 눈을 번쩍 떴다.
고오오…….
커다란 환풍구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정말로 전시안이 정우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러더니.
파아아아앗!
곧 지구의 푸른 육신에서부터 새하얀 빛줄기가 힘차게 뻗어 올라갔다.
반사적으로 빛줄기의 궤적을 따라 고개를 들어 올린 민구.
그의 시야에 ‘V’ 형태의 표식이 나타난 것도 이때였다.
“아……?”
민구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표식, 아니 그 너머의 우주 어딘가를 바라보자 지구가 아주 익숙한 대사를 띄웠다.
「구원자를 찾아 도우십시오. 건투를 빕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