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8
38화. 선두 특혜 (1)
안녕(安寧)하다는 것은 아무 탈 없이 편안한 상태를 이른다.
그러니까, 지금 지구는 자신의 주민들에게 안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잘 살아 있느냐고.
오늘도 버텨 낼 수 있겠느냐고.
팟.
지구의 2일 차 첫 멘트가 사라지더니, 곧 다른 문구가 나타났다.
「먼저, 제가 통보 받은 사안에 대해서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이에 정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통보 받았다고? 누구에게서?’
지구 폐쇄 조치를 결정한 ‘우주’를 의미하는 것일까?
평가관들을 파견했다던 ‘외부 업체’를 뜻하는 걸지도 모른다.
|지구에 대한 진입 제한이 한 단계 낮아졌습니다.
|지구의 정수 총량이 6% 감소했습니다.
|행성 폐쇄까지 41일 남았습니다.
짤막한 세 줄.
그러나 많은 걸 담고 있었다.
‘진입 제한이 한 단계 낮아졌다는 건……. 이전까지 그 제한 때문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던 놈들이 들어온단 소리다.’
이 정도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바다.
하지만 두 번째 줄의 내용은 좀 심각했다.
지구의 정수 총량 6% 감소.
‘하루 사이에, 그것도 소총으로 제압 가능한 청소부를 상대로 6%나 잃은 거야.’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가 혼란에 빠져 있음을 잘 보여 주는 수치다.
그리고 이대로라면 남은 41일을 채우기도 전에 지구상 모든 생물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첫날에 지구가 강조하지 않았는가.
지구 소속이 아닌 존재에게 정수를 빼앗기지 말라고.
싸울 자신이 없으면 동료 옆에서 자살하라고.
외부로 유출된 정수는 복구할 수 없는 게 분명하다.
즉, 죽더라도 구원자나 다른 각성자에게 죽어야 국익…… 아니 자신의 행성을 위할 수 있는 것이다.
“하루 만에 6%면 엄청난 양이네요. 이 페이스로 열흘만 지나도…….”
똑같은 문구를 보고 있던 선웅이 떨리는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이야기했다.
그의 말대로다.
주민들이 계속 이런 식으로 정수를 빼앗긴다면, 지구는 17일 이내에 모든 정수를 잃게 될 거다.
오늘부로 진입로에서 더 강한 놈들이 들어올 테니, 실제론 저것보다 더 빠르게 진행될지도.
‘결국 모든 생물이 각성자가 되어 정수를 보호해야 해. 예외가 있다면…….’
정우는 어제 평가관에게 들었던 ‘방주’의 기능을 떠올렸다.
진입로를 폐쇄한 구원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진정한 구원 시스템.
이 방주에 올라탄 사람은 진입로를 건너온 녀석들에게 추적을 받지 않으므로 각성자가 될 필요가 없다.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되는 거다.
-으, 으으……!
그사이 텔레비전에선 이상한 소리가 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몸을 움찔하며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대번에 멀미가 날 정도로 심하게 휘청거리는 화면을 보게 됐다.
카메라맨이 촬영 모드를 켜 둔 채 미친 듯이 뛰고 있는 거였다.
-으!
이를 악다문 채로 비명을 질러 대고 있는 걸까.
정우는 사내의 억눌린 음성 뒤로 격렬한 총성과 포격음이 깔리는 걸 들었다.
진입로를 에워싸고 있던 군대가 모든 화력을 쏟아붓고 있는 듯했다.
수십 분 전, 보병만을 이용해 진입을 저지하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상황.
‘뭔가 다른 존재가 들어왔구나.’
정우는 새 침입자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지만, 사내에겐 진입로를 비출 마음이 없어 보였다.
-가, 같이……! 제발!
사내가 어딘가를 향해 애원하듯이 울부짖었다.
아마도 함께 도망가던 사람들과의 거리가 벌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무거운 카메라를 여태 들고 있으니, 남들만큼 달릴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사내도 곧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갑자기 제자리에 멈춰 섰다.
척.
아주 잠깐이었지만, 화면에 저 멀리 달음질 중인 김영태 앵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중계실에 같이 있던 김석훈 대장과 박경원 대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뒤에 남아서 부대를 지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정우와 선웅.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텔레비전을 지켜봤다.
-헉, 헉.
화면 속의 사내가 바닥에 늘어뜨리듯이 들고 있는 카메라는 이제 시퍼런 수풀만을 비추고 있었다.
그러더니 슉, 하면서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다음엔 암흑뿐이었다.
흙바닥에 처박힌 카메라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여 주지 못했다.
다만 카메라가 꺼진 게 아니라는 걸 지저분한 잡음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지직, 지지직.
뒤늦게 의문이 든다.
적어도 방송국 조정실에선 이 모든 걸 보고 있었을 텐데, 왜 얼른 송출을 끊지 않았을까.
지구의 두 번째 접촉에 너무 놀라서?
아니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인지조차 못 한 걸까?
‘아냐. 그럴 리 없어. 오히려 일찌감치 위험을 감지하고 도망갔다고 보는 게 맞을 수도 있다.’
만에 하나 조정실에서만 볼 수 있는 다른 위치의 고정 카메라가 따로 있었다면?
그렇다면 방송 관계자들은 군인들이 전차 포격까지 감행해야만 했던 상대의 실체를 두 눈으로 봤을 것이다.
스으…….
때마침 고요하던 정우의 머릿속에 평가관의 기척이 나타났다.
이에 정우가 ‘새 침입자’에 대해 질문하려 했으나 평가관이 먼저 말을 시작했다.
-곧 선두 특혜가 발동됩니다. 인간 박정우 님께서는 현재 소속 지역 내 1위 구원자이므로 특혜 내용을 직접 선택할 수 있습니다.
‘특혜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선두 특혜는 매일 우주가 행성 구원자에게 주는 한정적 권한입니다. 이 선택의 결과는 지구가 거부하거나 변경할 수 없습니다.
우주가 매일 주는 권한이다?
이 말에 정우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평가관이 말한 ‘우주’란 하늘의 별이나 태양, 달 따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지구 폐쇄 조치를 명령한, 어떤 거대한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단,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긴 했다.
‘그런데 왜지? 우주 입장에선 지구 쪽에 특혜를 주지 않아야 유리한 것 아닌가?’
지구를 폐쇄하기로 결정한 우주가, 지구의 구원자에게 특혜를 준다…….
정우의 상식에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구가 다시 문자열을 출력했다.
「각 지역의 최상위 구원자가 특혜 권한을 선택하기 시작했습니다.」
“어……?”
문자가 나타나자마자 선웅이 정우를 돌아봤다.
이 문구가 구원자 외의 존재들에게도 보이고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정우는 그런 걸 알아챌 여유가 없었다.
이미 시야가 새로운 문구들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특혜 선택을 위해서, 박정우 님에 대한 보호 조치가 개시됐습니다.
|특혜 선택에는 10분의 시간이 주어집니다.
|제한 시간 내에 특혜를 선택하지 않을 경우, 무작위 특혜가 발동됩니다.
다음엔 본격적인 선택지가 나타났다.
정우는 비로소 이 ‘특혜’를 왜 우주가 관장하는지 알 수 있었다.
‘미친 자식…… 미물에게 선택권을 준다는 것 자체가 특혜라고 생각하는 건가.’
|공통 특혜부터 선택합니다.
|본 특혜는 행성 전체에 적용되며, 다수결로 결정됩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이 다섯 가지뿐이었다.
어제 아침, 지구가 진행했던 설문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것에 비하면 지구의 설문은 어린애 장난 수준이었다.
‘이걸 다수결로 결정한다고?’
선택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머릿속이 하얘졌다.
최악을 피해 차악을 택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그마저도 이쪽의 선택이 결과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지 미지수다.
각 지역의 최상위 구원자…….
국가별로 한 명씩 이 선택지 앞에 서게 됐다는 건데, 그렇다면 총 몇 명의 ‘특혜 선택자’가 존재하는 것인가?
일반적으로 전 세계 ‘국가’가 몇 개냐고 하면 195개를 든다.
국제적으로 자주 국가로 인정을 받은 나라를 꼽은 것이다.
193개의 UN 가입국과 팔레스타인, 바티칸 시국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이것은 지구라는 행성 내 인간이라는 일개 종의 관점일 뿐이다.
지구 또는 우주가 ‘지역’을 어떤 식으로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곳, 대한민국이 하나의 지역으로 인정된 것으로 봐선 인간의 분류를 참조한 것으로 보이지만…….
‘모나코는 정식 국가인데도 인구가 4만 명이 안 돼. 이런 곳도 구원자 순위가 있는 지역으로 설정했을까?’
그렇다면 미국이나 러시아, 중국, 인도 등의 최상위 구원자는 정말 억울할 것이다.
자신의 경쟁지보다 한참 작은 나라의 구원자와 위상이 같은 셈이니까.
게다가 공통 특혜 중 5번, ‘특혜 선택자 중 무작위 1명 희생’이 걸리기라도 하는 날엔 상대적으로 큰 리스크를 안게 된다.
수억 명과 경쟁해서 정상에 섰는데, 무작위 추첨으로 사망하게 된다면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8분 남았습니다.
정우가 5개의 선택지 앞에서 고민하고 있자 시간이 유한함을 알리는 경고가 나타났다.
‘그래도 다섯 가지 중에서 리스크가 가장 작은 건 5번이야. 특혜 선택자가 100명만 돼도 내가 죽을 가능성은 1%니까.’
하지만 이 선택이 매일 찾아온다는 걸 간과해선 안 된다.
‘만약 5번으로 구원자 하나가 죽게 되면, 그 정수는 우주가 가져가는 건가?’
이번 것은 질문이었다.
평가관이든, 누구든 답변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선 정적이 흐를 뿐이었다.
‘일단 1번부터 4번까진 아직 시기상조야. 나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구원자들도 아직 덜 여물었을 테니까. 누군가 희생해야 한다면, 평균 정수 보유량이 낮은 지금이 적기다.’
정우는 마음을 정한 뒤 5번을 선택했다.
그러자 지구의 설문 때와 달리, 눈앞의 문구가 먼지처럼 흩어졌다.
다음엔 새로운 문구가 떠올랐다.
|개별 특혜를 선택합니다.
|본 특혜는 선택자에게만 적용됩니다.
1. 확답
-현재 직접 폐쇄할 수 있는 진입로의 위치를 모두 표시합니다.
2. 강림
-지정한 대상과 함께 소속 지역 내 원하는 지점으로 즉시 이동합니다.
3. 전시안
-원하는 조건에 맞는 존재를 총 2회 찾아냅니다.
4. 잠행
-침입자들에게 먼저 공격 받지 않습니다.
5. 성역
-지정한 구역 내에서 외부인의 정수 사용을 금지합니다. 진입로를 직접 폐쇄한 구역만 지정할 수 있습니다.
공통 특혜로 입은 피해를 개별 특혜로 완화시키라는 의미일까?
이번엔 전부 긍정적인 효과로 꾸려져 있었다.
‘현재 쓸 만한 것은 1, 3번.’
2번 ‘강림’도 나쁘지 않지만, 당장 필요한 기능은 아니었다.
그보다도 4번이 거슬린다.
이 특혜는 국가별 1위 구원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떡하니 침입자들을 피하도록 도와주는 기능을 넣어 둔 이유가 뭘까?
심지어 구원자의 동료들을 보호하는 것도 아니다.
구원자에게만 적용되는 기능이어서 더 께름칙했다.
‘진입로에서 대체 어떤 것까지 기어 나온다는 거지?’
목덜미를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불길함.
|5분 남았습니다.
이제 남은 시간이 반 토막에 불과하다.
정우는 1번과 3번을 두고 고민했다.
패스파인더를 통해 총 30개의 진입로 방향을 알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방향일 뿐이고, 진입로의 크기도 불명이다.
하지만 1번을 선택하면 진입로 폐쇄를 위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명확히 알 수 있다.
단, 리스크가 없는 건 아니다.
현재 정우의 정수는 12,441개.
튜토리얼 통과 조건이 정수 1만 개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가 폐쇄할 수 있는 진입로가 얼마 없을 가능성이 높다.
‘안전지대부터 하나 만들어 두고 싶다면, 행운동으로 가서 진입로를 닫으면 그만이지. 1번도 어떻게 보면 지금 쓰기엔 모호하네.’
계속해서 정수를 모아 가야 하는 지금, 행운동으로 돌아가는 건 상당한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모든 일이 마무리되어 갈 때까지도 행운동에 진입로가 있다면, 그때 돌아와서 닫아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3번.
원하는 존재를 2회 찾아낼 수 있다.
정수를 가장 많이 보유한 순으로 두 명을 찾아내는 방법도 있고, 일전부터 계획 중이던 의사를 수배하는 데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관건은 그 ‘조건’을 얼마나 상세하게 적용할 수 있느냐는 점일 터.
‘당장은 기반을 잡는 게 우선이니, 3번부터 써 볼까.’
만약 내일도 1위를 유지하고 있다면 이 선택지를 또 만나게 될 것이다.
정우는 개별 특혜 3번을 선택했다.
그러자 또다시 문구들이 허공 속으로 사라졌고, 갑작스레 ‘소리들’이 그의 귓가에 밀려들었다.
“……!”
깜짝 놀란 정우가 뒷걸음질 치자 그를 바라보고 있던 선웅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아.”
정우는 깨달았다.
그가 선두 특혜를 고르고 있는 동안 청각을 포함한 모든 감각이 차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시각도 차단됐었다.
여태 문구를 ‘보고 있다’라고 착각한 건, 우주가 그의 의식 속에 문구를 주입했기 때문이다.
외부와의 접촉이 제한된 상태에서 투표가 이뤄졌던 것이다.
“후…….”
나름대로 현 상황에 대한 이해를 마친 정우는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코 만나서는 안 되는 어떤 것과 잠시나마 얼굴을 마주하고 있던 기분이다.
속이 메스껍고, 형태를 알 수 없는 공포가 가슴속에서 꿈틀댔다.
“이게 다 무슨……. 방금 정우 씨의 모습이 어땠는지 아십니까?”
선웅이 가늘게 떨리는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하기에 정우가 얼른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아뇨, 말하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더는 알고 싶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많은 걸 알아 버렸으니까.
그리고 곧 그 일이 시작됐다.
「각 지역의 최상위 구원자가 특혜 권한 선택을 마쳤습니다.」
…「투표 결과에 따라, 오늘 특혜 선택자 중 무작위로 한 명을 살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