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4
4화. 선택과 집중 (2)
‘Watcher’ 사무실 밖, 건물 복도.
조 팀장을 따라가던 정우가 걸음을 멈췄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퇴근 경로였지만. 오늘은 ‘여느 날’이 아니었다.
“엘리베이터는 안 타는 게 좋겠습니다.”
지구가 종말을 예고한 것치고는 건물에 전기가 잘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여긴 8층이다.
평소처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자니 꺼림칙했다.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조 팀장이 깜빡했다는 듯이 말하며, 뒤를 살짝 돌아본다.
이때 정우는 느꼈다.
저 사내도 내심 긴장한 상태라는 걸.
그도 그럴 것이, 대뜸 지구가 ‘전 살고 싶습니다.’라고 밝혀 온 날이 아니던가.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고 있을 거다.
그러나 지구가 위협을 느낄 정도의 일이라면, 마땅히 인간도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엄밀히 말해, 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지구의 일부인 셈이니까.
지구 속 인간을 굳이 세밀하게 분류한다면, 병균 정도에 해당할까?
그간 생태계를 망치고 자연을 훼손해 왔다. 그러면서도 오만했다.
이런 이유로 소설이나 게임엔 자연이 인간올 벌하는 이야기가 많았다.
‘너회는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라면서.
그럼에도 위기에 빠진 지구가 인간을 이용해 무언가를 해 보려 한다는 사실에 정우는 안도감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꼈다.
‘좀 걸리는 점이라면. 우리에게 죄송하다는 이야기를 해 왔다는 거지.’
정우는 다른 건 몰라도 지구가 인간에게 보여 줬던 ‘성명문’의 마지막 문구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여러분은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더 살고 싶습니다. 앞으로 이어질 안내를 잘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지구였습니다. 죄송합니다.」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지구가 이런 식으로 접촉해 왔다는 사실이…… 그리고 죄송하다며 사과를 해 왔다는 점이.
“대리님……?”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우가 눈을 부릅떴다.
정신을 차려 보니, 저 멀찍이 비상구 쪽에서부터 김재형이 불안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스물아홉의 기획부 신입 사원 김재형.
정우의 부사수이자 조 팀장과 긴급히 결성한 ‘조기 퇴근 파티’의 특별 게스트다.
정우가 조 팀장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하기로 결정했을 때, 곁에서 이 대화를 듣고 있던 재형이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애원해 왔다.
울산에 계신 부모님과 연락이 되지 않고 있어서 당장 갈 곳이 홀로 사는 자취방 뿐이라는 게 이유였다.
울먹이는 재형의 얼굴을 본 순간, 정우는 직감했다.
이 녀석은 단역이구나…….
그럼에도 놈을 모질게 내치지 못한 건 순전히 잔정 때문이었다.
여태 바로 옆자리를 써 오던 부사수이지 않은가.
“아. 미안합니다. 저도 정신이 없네요.”
정우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동료들에게 다가가자 조 팀장이 괜찮다고 말하며 비상구 문올 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둔탁한 소리가 비상계단 아래쪽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퉁! 퉁! 투퉁!
사람들의 발소리였다.
아마도 다른 사무실의 직원들일 것이다.
“우리도 서둘러야겠군요.”
조 팀장이 층계 위아래를 살피며 초조하게 말하자 정우가 그에게 물었다.
“차는 몇 층에 있죠?”
이에 차주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재형의 얼굴도 덩달아 굳는다.
이어진 조 팀장의 답변.
“……지하 3층에 있습니다.”
***
지상 8층에서부터지하 3층까지.
11층이나 되는 건물을 내려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우, 선웅. 재형.
‘Watcher’에 입사하지 않았다면 평생 마주칠 일도 없었을 세 사람은, 각자만의 필사적인 표정을 지으며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헉, 헉!”
이제 겨우 4층 정도틀 내려온 상황인데, 벌써부터 누군가 거친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신입 김재형.
세 사람 중 나이와 사회 경험 모두 가장 적은 녀석이다.
조선응 팀장이 서른다섯.
정우가 서른하나.
재형이 스물아홉.
아무리 긴장했기로서니 …… 막내치고 체력이 너무 수준 미달 아닌가?
뒤따라가던 정우가 씁쓸한 표정을 짓자 어떻게 알았는지 재형이 뒤를 돌아보며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이미 선두의 조 팀장과 거리가 서서히 벌어지고 있었기에 본인도 계속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 같다.
정우는 기죽은 재형의 얼굴을 보자 더욱 불안해졌다.
그렇다고 이 와중에 화라도 냈다간 상황이 더 악화될 터.
“괜찮으니까, 앞에 잘 보고 뛰어요. 넘어져서 다리라도 접질리면 안 되니까.”
하지만 이런 배려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정우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한번 낙오하기 시작한 녀석은 앞으로도 계속 그러기 마련이다.
군대에서, 첫 행군에 실패한 병사가 다음 행군에서도 낙오할 가능성이 높은 것처럼.
복무틀 마친 지 벌써 십 년이 다 돼 가지만, 몇몇 장면은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아련하면서도 질척거리는 기시감.
정우는 자신이 일러 준 그대로 계단을 노려보며 달리는 재형을 물끄러미 봤다.
가뭄에 콩 나듯. ‘폐급’이었던 신병이 A급으로 진화하기도 한다.
그러니 일단은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이제 2층입니다! 1층 근처라 사람이 많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그새 한참 앞서 나간 조 팀장의 목소리가 아래쪽에서부터 메아리친다.
‘팀장’답게 누군가를 이끄는 데 익숙한 모습.
정우는 그의 목소리에 안도감을 느끼며 재형과의 거리를 더 좁혔다.
취이익!
츠즈즉!
바로 밑의 층계참에서부터 신발 밑창이 바닥에 쓸리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앞서 내려가던 사람들이 코너를 돌고 있는 것이다.
그러더니 다급한 것 같던 기척이 갑자기 멈췄다.
어떤 웅성거림이 시작된 것도 이때였다.
“……?”
재형과 정우는 조 팀장과 반 층 정도 떨어져 있었기에 밑의 상황을 바로 알 수 없었다.
“팀장님, 무슨 일 있습니까?”
불길한 예감이 든 정우가 재형을 추월해서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러자 곧 그의 시야에 사람들 한 무리가 들어왔다.
이제 막 1충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던 이들은, 조 팀장을 향해 손에 쥔 걸 들이밀고 있었다.
분사형 벌레 퇴치제부터 시작해서 사무용 칼, 드라이버, 망치까지.
나름대로 사무실에서 호신용 도구를 하나씩 집어 온 것 같았다.
“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경고했습니다!”
이 무리의 가장 뒤쪽에 서 있던 망치 든 남자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저들이 이쪽을 경계하는 이유는 단 하나.
‘포식자’라는 문구를 띄우고 있는 조 팀장 때문이었다.
애초에 어감이 좋지 않은 단어이기도 했지만, 남들 모두 멀쩡해 보이는데 이 사람만 이상한 글자를 붙이고 있으니 무섭지 않겠는가.
“……그럴 시간에 빨리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정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지막하게 이야기하자 망치 든 남자가 동료들을 향해 눈짓했다.
어서 나가라는 의미였다.
끼익.
닫혔던 철문이 다시 열리면서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간다.
‘그래도 용케 무기 챙길 생각을 했네.’
정우는 잔뜩 경직된 상대방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어느 사무실의 직원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챙겨서 함께 움직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저 사람들과 싸우게 됐다면 이길 수 있었을까, 하는…….
보기엔 우스꽝스럽지만, 맨손으로 망치와 드라이버를 상대하는 순간 웃음기가 싹 사라졌을 거다.
잘 생각해 보면, 벌레 스프레이조차도 위협적인 무기다.
달려들면서 눈에 뿌려 버리면 그대로 아웃일 테니.
‘정수 사용법을 빠르게 익혀야 해. 무기가 없는 지금. 우린 약자다.’
이윽고 망치 든 남자가 철문 너머로 몸을 움직였다.
정우는 얼른 자신을 긴장시켜서 상대의 정수 보유량을 확인했다.
팟.
눈앞에 나타난 푸른색 숫자.
남자가 가지고 있던 정수는 고작 두 개였다.
이에 반해 조 팀장은 열 개, 정우 자신이 다섯 개 그리고 재형이 세 개를 가지고 있었다.
“가시죠. 위에서 사람이 내려오지 않는 걸 보니 우리가 많이 늦은 것 같습니다.”
조 팀장이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밟으며,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냈다.
***
8층 비상구에 처음 몸을 들였을 때부터 정우는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예상한 것과 달리 비상계단이 너무 쾌적했기 때문이다.
총 10층짜리 건물이다.
각 사무실의 직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면 지금쯤 1층이나 지하 쪽 출 입구에서 난리가 났어야 하지 않은가?
평소에도 점심때만 되면 엘리베이터와 비상구로 인파가 몰려든 탓에 사무실 끼리 협의해서 점심시간을 안 겹치게 정했을 정도다.
따라서 오늘 같은 날의 ‘교통 체증’이란 두말할 필요가 없었을 터인데…….
“이상하지 않아요? 아까부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잖아요.”
정우가 의문을 제기하자 선두의 조 팀장이 걸음을 멈췄다.
재형도 떨리는 음성으로 정우의 의견에 힘올 실었다.
“그러네요. 점심시간 때만 해도 보통 난리가 아닌데…….”
현재 위치는 지하 2층과 3층 사이의 계단.
조금 전 지나온 지하 2층 출입문에서도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층마다 문올 열어 본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분위기라는 게 있지 않은가.
마치 세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인간이 사라진 것처럼, 통로 내부가 고요했다.
“그러고 보니 차가 나가는 소리를 들어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조 팀장이 콘크리트 벽면에 손을 얹으며 나지막하게 이야기한다.
이 벽 너머가 바로 지하 주차장이다.
그런데 멀리서라도 들려야 할 소리들이 전혀 나오고 있지 않았다.
시동을 거는 소리라든가, 차가 코너를 돌 때 나는 바퀴의 마찰음 같은 것 말이다.
그럼에도 본격적으로 위협을 느끼지 않은 건, 정적 외엔 다른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상상력을 발휘해, 갑자기 게이트가 열리고 괴물이 나타났다 치자.
그렇다면 사람들이 놈에게 맞서 싸우거나 도망간 흔적이라도 있어야 할 게 아 닌가?
하다못해 바닥의 핏자국이라도…….
“일단 문을 아주 조금만 열어서 안쪽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조 팀장 역시 바닥을 주의 깊게 살피며 걷고 있었다.
정말 원가 일이 벌어진 거라면, 주차장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을 때 확인할 수 있을 거다.
의외로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빠져나간 걸 수도 있고, 반대로 아주 끔찍한 장면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세 사람 모두 높은 확률로 후자를 예상했다.
산산이 찢어진 시체 더미나 피바다로 변해 버린 주차장 바닥 같은…….
이윽고 도착한 지하 3층 출입문 앞.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여전히 벽 너머에선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탁.
조 팀장이 문손잡이를 쥐면서 나머지 두사람을 향해 이야기했다.
“무언가 붉은 게 보이면 곧장 뒤로 돌아 나가는 겁니다. 차를 포기하고 1층 정문을 통해 나갑시다.”
끄덕.
정우와 재형은 말없이 고개만 움직였다.
두근, 두근.
심장박동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와 귓가를 저릿하게 만든다.
정우는 조 팀장의 거칠어 보이는 손이 천천히 기우는 걸 뚫어져라 쳐다봤다.
끼기긱…….
낮은 마찰음을 내며 움직이기 시작한 손잡이.
철컥.
결국, 문의 잠금장치가 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