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40
40화. 선두 특혜 (3)
헬기를 타고 왔다, 라…….
이 와중에 자랑을 하려는 건 아닐 테고.
“헬기를 제공하겠다는 말인가요.”
정우가 묻자 용헌이 조용히 눈웃음을 지었다.
“하늘을 날 순 없으실 것 아닙니까. 사실 첫 제안으로 뭘 꺼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서 정우의 오른손을 슬쩍 본다.
‘정수 검’이 뽑혀 나오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다음엔 아직 잘 붙어 있는 자신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일종의 유머인 것 같았다. 첫 고비를 넘겼다는 걸 자축하는 의미의.
‘헬기라…… 정말 의외인데. 만약 헬기를 얻게 되면 매일 특혜 선택 때 꼭 강림을 고르지 않아도 되긴 하지.’
아까 용헌이 말했듯이, 헬기를 타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두 시간 만에 이동할 수 있다.
주요 도로가 전부 마비된 지금, 비행이 가능해진다는 건 엄청난 이점이다.
경쟁자를 제거할 때이든, 진입로를 제거하기 위해서이든 무조건 유리해진다.
‘전국의 진입로를 전부 걸어서 방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이동 수단이 필요하긴 해.’
헬기도 지금이니까 존재하지, 사태가 악화되면 더는 없을 수도 있다.
의사만큼이나 미리 확보해 둬야 할 중요 자산일지도 모른다.
“공항들을 보존해 주신다면 전세기도 얼마든지 마련해 드릴 수 있습니다.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겠지요. 힘을 보태 주신 영역에 대해선 절대적인 권한을 드릴 겁니다.”
용헌의 대사에 아까보다 힘이 더 실렸다.
자신감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 대담하구나. 완전히 영업 모드로 돌입했네.’
정우는 이글거리는 김용헌의 눈을 마주 보면서 내심 감탄했다.
그러나 대성 그룹의 가이드라인을 따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해결사 노릇을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또한 자신이 도와준다고 해서 이 일이 모두 끝날 때까지 기업체가 존속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진입로를 닫을 수 있는 건 이 나라에서 다섯 명뿐이지만, 진입로는 전국 곳곳에 수십 개씩 생겨나고 있다.
진입로의 폐쇄 속도보다 침입자들이 나라를 집어삼키는 속도가 더 빠를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그래서 방주라는 시스템이 주어진 거고.’
방주라고 해 봐야 폐쇄한 진입로 하나당 열 명을 살릴 수 있을 뿐이다.
안타깝지만, 거기에 대성 그룹을 위한 자리는 없다.
“그 헬기는 어디 있죠?”
정우의 물음에 용헌이 엘리베이터 천장을 쳐다봤다.
“본 사옥 꼭대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없으면 운용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여기 온 조종사가 저뿐이거든요.”
“직접 헬기를 몰아서 왔다고요?”
“예. 한때 회장님을 제가 직접 모셨기 때문에…….”
그새 용헌의 목소리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정우가 자신을 죽이고 헬기를 빼앗아 갈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띵.
스르륵.
이윽고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며 나타난 광경을 보면 말이다.
“웁.”
선웅이 코를 막으며 미간을 찌푸린다.
어제저녁 정우가 대량 살상을 벌인 1층 로비엔 부패하기 시작한 시체 조각이 즐비했다.
용헌의 안색도 새파랗게 질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꼿꼿하게 서 있었다.
일찍이 이곳에 도착해서 미리 살펴본 현장일 것이다.
애초에 정우와 선웅이 깨어날 때까지 1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아니던가.
“저희가 원하는 건, 그저 약간의 자비와 도움뿐입니다.”
용헌은 시체 더미에 눈길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정우에게 간청하듯이 말했다.
이에 정우는 무심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헬기를 직접 몰고 오신 거라면, 김용헌 씨의 결정이 중요하겠네요.”
“……?”
용헌이 무슨 의미냐는 듯이 눈을 크게 떴고, 정우는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와서 시체 사이로 나아갔다.
그러고는 정수로 검을 빚어내며 나지막하게 이야기했다.
“여기서 죽든가, 아니면 회사를 버리고 절 따라오세요. 그럼 방주에 태워 드리겠습니다.”
* * *
방주.
각 구원자는 자신이 직접 폐쇄한 진입로 하나당 열 명의 방주 탑승자를 지정할 수 있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생물이라면 무엇이든지 태울 수 있으며, 이들은 진입로에서 기어 나온 존재의 추적을 받지 않게 된다.
지구는 왜 이런 시스템을 만들었을까.
녀석이 직접 말해 주지 않으니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최소 한 가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조만간 지구 생태계가 아주 험악해지리란 점 말이다.
진입로를 박살 내고 다니는 수준의 구원자가 아니고선 살아남기 힘들 정도로.
그러니 구원자 외의 생명을 남겨 두기 위해 방주를 마련한 게 아닐까.
“가급적 빨리 첫 진입로의 폐쇄를 진행할 겁니다. 당장 태워야 할 사람이 적어도 두 명은 있거든요. 그럼 남은 자리가 여덟 개뿐이라는 건데, 이 중에서 하나를 드리겠다는 겁니다.”
정우가 이 말을 끝으로 방주에 대한 설명을 마치자 멀거니 서 있던 용헌의 입이 벌어졌다.
상상도 하지 못한 이야기였으니까.
“아니…… 잠시만요. 지금이야 정원이 10명이지만, 진입로를 열 개 폐쇄하면 100명을 태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용헌의 목소리에서 다급함이 묻어 나온다.
다시 말해서, 장기적으로 보면 대성 그룹을 굳이 버릴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였다.
그러자 정우가 대번에 쳐냈다.
“100명? 대성 그룹 임직원이 전부 몇 명인데요. 설마 수뇌부만 살리자는 한심한 소리는 아니었겠죠.”
“아.”
용헌이 짤막한 탄식과 함께 자신의 아둔함을 인정했다.
대성 그룹은 오십만 명 가까이 되는 직원을 거느리고 있었으니까.
그 안에서 누굴 구하고, 누굴 살리겠는가.
대성은 이미 침몰이 확정된 배인 것이다.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정말로…… 종말이 왔군요.”
용헌의 끝말에서 짙은 슬픔이 흘러나왔다.
적어도 이 대화를 조용히 듣던 선웅만큼은 그 감정을 느꼈다.
“앞으로 전국의 진입로를 하나씩 닫으면서 괴물과 경쟁자들을 처리할 겁니다. 용헌 씨가 해야 하는 일은 저 현장에 절 실어 나르는 것이고요. 자신 있으면 절 따라오세요. 거절하신다면 다른 조종사를 찾아보죠. 헬기는 이미 확보했으니.”
이 말을 던진 정우의 오른팔에서는 여전히 정수로 빚어낸 칼날이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실상 영입 제안이 아니라 통보인 셈이다.
물론 삶에 미련이 없다면 얼마든지 이 제안을 거절할 수 있다.
또한 용헌은 실제로 목숨을 걸고 이곳에 온 사람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대성 그룹에 대한 믿음. 그는 언젠가 대성이 이 모든 일을 수습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정말 방주라는 시스템이 있는 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구원자의 말대로, 간택되지 않은 자들은 전부 죽게 될 것이란 걸 예고하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으음.”
목이 멘 용헌이 침음을 흘리며 로비에 가득한 시체 더미를 눈으로 훑었다.
다음엔 정우를 향해 한 발 내디뎠다.
“강남 한복판에서 헬기 조종사를 찾는 게 쉽진 않으시겠지요. 제가 보좌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정우가 불쾌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용헌은 끝까지 질러 볼 요량으로 턱 근육에 힘을 잔뜩 줬다.
“한 자리만 더 주실 수 있겠습니까?”
“누굴 태울 건데요.”
“아내를 태우고 싶습니다. 작년에 이혼했지만…….”
“…….”
법적으로 이혼 절차가 끝났다면 그 여자는 더 이상 아내가 아니다.
정우는 용헌의 말을 정정해 주고 싶었으나 곧 마음을 접었다.
‘쓸모 있는 사람이야. 동반자 하나 정도는 허락해 줄 수 있지.’
현 시점에서 이 사내의 가치는 의사보다 더 높다.
정수를 모으고, 작은 진입로부터 찾아다녀야 하는 지금은 기동력이 가장 중요하니까.
문제는 이자가 태우고자 하는 사람이 전처라는 거다.
“그…… 상대는 함께할 마음이 있다고 합니까?”
“이동 시간까지 합해서 삼십 분만 주십시오.”
사전에 합의가 안 됐으나 만나서 어떻게든 설득해 보겠다는 이야기.
“그렇군요.”
정우는 이 말을 하면서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각, 오전 8시 50분.
2일 차가 시작된 지 한 시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좋습니다. 대신 잘 해결이 되지 않을 것 같으면 깔끔하게 포기하세요.”
정우가 다짐을 원한다는 눈빛을 쏘자 용헌이 허리를 깍듯이 숙였다.
“약속하겠습니다.”
“예.”
일단 이동 수단은 해결된 걸까.
정우가 용헌의 사정을 배려해 가면서까지 영입한 이유는, 그가 자신의 앞에서 위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만간 괴물이 득실거리는 진입로를 향해 헬기를 몰아야 하는 사람이다.
조종 실력보다 담력이 중요한 건 당연한 일.
그런 점에서 용헌은 정우가 원하는 인재상에 딱 맞았다.
“그럼 이제 강남역 쪽으로 가죠.”
“어, 헬기는…….”
정우가 건물 바깥으로 나가려 하기에 용헌이 엘리베이터 쪽을 돌아보면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선웅이 간단히 설명했다.
“일행으로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 하나 더 있거든요. 지금 픽업하러 갈 겁니다.”
* * *
오전 9시 1분.
정우는 다시 강남역 11번 출구 앞에 섰다.
그가 대성 측의 구원자 ‘박 팀장’과 이름 모를 정수 3천 개짜리 각성자를 죽인 곳 말이다.
“…….”
정우가 특별히 무슨 말을 한 건 아니지만, 용헌은 곧바로 눈치챘다.
출구 근처의 발목만 남은 시체들이 전부 구두를 신고 있었으니까.
“음, 음, 무슨 유령 도시 같네요.”
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선웅이 재빨리 운을 뗐다.
아니나 다를까, 강남역 일대엔 사람이 없었다.
하루 만에 모든 이가 출근하길 그만둔 것이다.
“아침에 그 난리가 났는데 당연한 일이겠죠. 그래도 몇몇은 돌아다닐 줄 알았는데요.”
정우는 어제 중앙동에서 봤던 사내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것이 나타났다.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한 사람의 실루엣.
“어.”
용헌이 짤막한 소리를 냈을 때, 정우와 선웅의 시선은 이미 실루엣에 닿아 있었다.
11번 출구 맞은편, 이쪽과의 거리는 대략 120미터 정도 됐다.
“으음.”
실눈을 뜨며 상대를 살피던 선웅이 신음 같은 것을 흘린다.
정우도 그 이유를 잘 알았다.
둘 중 한쪽의 키가 유난히 작았기 때문이다.
“애…… 인 것 같죠?”
선웅이 정우에게 확인을 요청하듯이 물었고, 이에 용헌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용헌은 이 구원자가 살인하는 걸 직접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여태 이곳에서 무슨 짓을 해 왔는지는 충분히 봤다.
“이,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용헌의 목소리에서 걱정, 공포, 비애가 한꺼번에 흘러나온다.
직접 살인을 해 본 적이 없고, 살인마 곁에서 생활해 본 적도 없는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였다.
이 순간, 용헌은 세 사람 중에서 가장 순진했다.
대성 그룹에서 부장까지 달 정도였으면 닳고 닳은 사회인이었을 텐데 말이다.
“의사는 저 뒤, CGV 건물 안에 있어요. 직행할 겁니다.”
정우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두 개의 실루엣 뒤편에 박혀 있는 고층 건물을 가리켰다.
마음을 이미 정했다는 소리였다.
그러니 상대의 운명 역시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