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44
44화. 진입로 (1)
헬기는 파도를 만난 조각배처럼 흔들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위아래로 들썩거렸고, 고도가 계속해서 낮아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머리에 쓴 헬멧과 헤드셋 때문에 현장음이 한참 작게 들렸는데, 이게 정우의 무력감을 증폭시켰다.
떨어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보다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꼈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난…… 나는 왜 멀쩡하지?’
이 생각이 든 순간, 정우는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던 보호막을 팽창시켰다.
8인승 헬기를 통째로 집어삼킬 크기가 될 때까지.
파아앗!
현재 정수 13,200개.
거대한 기체를 두꺼운 보호막으로 감싸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장내가 파랗게 물들자 나머지 네 사람의 구토 증세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정우는 알게 됐다.
헬기를 가졌다고 해서 아무나 탈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구가 튜토리얼의 통과 조건을 정수 1만 개로 해 둔 이유가 다 있었던 것이다.
“푸우…… 후욱!”
다들 입안에 남은 이물질을 흘려 내느라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벌렸다.
단, 용헌은 예외였다.
그는 조종간을 붙든 채, 콧속으로 밀려드는 토사물을 다 받아 냈다.
자신이 기체의 중심을 바로잡지 못하면 전부 죽을 걸 알았기 때문이다.
‘저 정도면 합격점이다. 여태 배짱을 부릴 만했네.’
정우는 차츰 안정되어 가는 헬기의 상태를 느끼면서, 창밖을 내다봤다.
고도가 백 미터 수준까지 내려온 상황이라 행운동 일대가 훤히 보였다.
평가관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 ‘농부’와 ‘공명수’란 존재가 있다.
공명수란 건 아마도 저 거대한 괴물체일 테고…….
‘그럼 나머지 하나는 누구냐.’
그가 미간을 좁히며 바깥을 살피고 있자 아까 그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찌잉!
이에 사람들이 반사적으로 움찔했지만, 이번엔 아무도 구토를 하지 않았다.
정우가 전개해 둔 보호막이 건재한 덕이었다.
“오…….”
동훈이 놀랍다는 듯한 소리를 내며 푸른 빛깔의 보호막을 둘러본다.
이 구원자란 사내가 다른 이를 해치기만 하는 줄 알았지, 누군갈 보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몰랐던 것이다.
효신도 정우가 자신들을 지켜 주리라곤 상상도 못 했는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상황에서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로 침착한 건, 그를 비교적 오래 보아 온 선웅뿐이었다.
“정신 공격…… 같은 것이었습니까?”
이에 정우가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입만 열었다.
“모르겠어요. 분명한 건, 앞으로 여러분을 계속 살려 두려면 고생 좀 할 것 같다는 점이죠.”
보호막을 두르지 않으면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이상 증세를 유발하는 괴물이다.
혹시 방주에 탑승한 사람들은 이런 공격에서도 자유로워지는 걸까?
어쨌든 겨우 2일 차에 나타난 존재가 이 정도이니, 앞으로 무엇이 나올지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이 근방에서 활동하려면 항상 보호막을 감고 다녀야겠네. 공격에 쓸 수 있는 정수의 여유분이 얼마나 되느냐가 관건이겠군.’
아직 헬기가 비행 중이라 보호막의 최소 밀도를 시험해 볼 순 없었다.
정우가 파일럿에게 물었다.
“용헌 씨, 당장 착륙할 수 있는 지점이 있나요?”
“음, 5시 방향에 널찍한 건물 보이십니까? 저곳 옥상에 착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방금 그 일을 겪고도 용헌은 정우의 요청에 순순히 응했다.
구원자의 곁에서 멀어지는 게 더 위험한 짓이란 걸 직감한 탓이다.
용헌이 말한 건물은 행운동에서 사당역으로 이어지는 도로변에 세워진 물류 회사 창고였다.
행운동에 뭐가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도로면에 착륙하는 건 자살행위일 테고, 정우가 봐도 저곳이 최선책이었다.
“예, 저리로 갑시다.”
곧 정우의 승인이 떨어졌고, 헬기가 선회하기 시작했다.
* * *
세원물류.
엊그제만 해도 정우는 이곳에 커다란 화물차가 옆구리를 열어젖히고 있는 걸 봤다.
그 안에선 장갑을 낀 사내들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택배 상자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지구가 말을 걸어오던 그날 아침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실례지만, 담배 한 대만 태우고 가도 되겠습니까?”
조종석에서 내려온 용헌이 간절한 표정으로 말해 오기에 정우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헬기는 물류 창고 옥상에 무사히 착지했고, 다들 이제 막 한숨 돌리는 중이었다.
현재 시각은 오전 10시 8분.
이곳에서부터 대략 300미터 저편엔 ‘공명수’로 추측되는 그 새까만 괴물체들이 대낮의 허공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있었다.
각각의 길이는 대개 5미터에서 10미터 사이. 둘레는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사람이 저걸 감싸 안으려면 성인 남성 너덧 명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이쯤 와서 보니, 그것들의 표면이 매끄럽진 않았다. 사람의 피부처럼 주름이 있었다.
더 가까이에서 보면 모공마저 있어서 숨을 쉴지도 모르는 일이다.
단단해 보이지만, 분명 생물체 특유의 느낌이 나던 청소부의 외피와 매우 흡사했다.
“대체 뭘까요, 저건.”
선웅의 목소리다. 딱히 대답을 구하는 게 아니라 혼잣말에 가까운 투였다.
정우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옹기종기 모여 담배를 태우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선웅, 용헌, 효신. 세 사람 모두 착잡하다는 표정으로 공명수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연스레 정우의 시선이 홀로 남은 동훈에게로 옮겨 갔다.
“흡연자면 지금 피우시죠. 언제 또 기회가 있을지 모르는데.”
그러자 동훈이 고드름 같은 코를 들썩이며 낮게 웃었다.
“원래 안 피웁니다.”
그러더니 옥상을 덮듯이 전개된 정우의 보호막에 손을 대며 물었다.
“이게 어느 정도의 내구성을 가지고 있는 겁니까?”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대답해 줘야 할진 잘 알았다.
“총알 정도는 막죠.”
“아.”
정우는 동훈의 눈에 이채가 어리는 걸 봤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아까 헬기에 있을 때보다 보호막의 밀도를 낮춰 둔 상태였다.
현재 직경 7미터 범위를 보호하기 위해서 8천 개의 정수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무작위로 총알이 날아든다면 솔직히 막아 내기 어려울 것이다.
어제 행운동에서의 경험에 따르면, 전방에서 날아온 총알 하나를 막는 데만 정수 천여 개가 필요했으니까.
그러나 진입로에게 완전히 잠식당한 이곳에서 권총을 쥔 사람을 만날 일이 있겠는가.
당면한 문제는 보호막을 유지한 채로 행운동의 진입로까지 무사히 도착해 폐쇄 작업을 마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이곳의 진입로를 닫는 데 필요한 정수는 10,843. 그럼 진입로 앞에서 방어용으로 돌릴 수 있는 정수가 2,300개 정도 되네.’
2천여 개의 정수로 자신과 나머지 사람까지 전부 보호하는 게 가능할까?
“음.”
정우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이 자리를 비워도 안전할지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아직 근방에서는 쥐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지만, 단 한 마리의 청소부만 나타나더라도 위험해질 것이다.
살의를 가진 각성자가 나타난다면 그건 최악.
오히려 모두를 끌고 저 안으로 들어가는 게 안전할 수도 있겠으나…….
관건은 이 사람들이 계속해서 벌어질 ‘일’들을 다 감내할 수 있느냐는 것.
아까는 구토로 끝났지만, 다음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이제 저 안으로 들어갈 겁니다. 도저히 엄두가 안 나는 분들은 여기에 남아 계세요. 대신 제가 뭘 어떻게 해 드릴 수 없으니, 제가 돌아올 때까지 알아서 버티셔야 합니다.”
정우가 상아 무덤처럼 변해 버린 행운동을 가리키며 말하자 바닥의 꽁초를 밟아 대고 있던 사람들이 얼른 한 개비를 더 입에 물었다.
* * *
10층 높이의 아파트 옥상.
누군가 뒤통수에 총을 갖다 대면서, 당장 죽거나 아니면 밑으로 뛰어내리라는 선택지를 준다면 무얼 택하게 될까?
많은 이들이 십중팔구 뛰어내리는 걸 선택할 것이다.
머리통에 총알이 박히는 건 확정적인 죽음이지만, 10층에서의 다이빙은 불확실한 죽음이니까.
운이 좋다면 근처 나무에 걸릴지도 모르고, 기적적으로 다리만 부러지고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물론 머리가 수박처럼 으깨져서 죽을 확률도 상당하다.
그럼에도 대다수는 옥상 난간 너머로 몸을 날리리라.
단 1초라도 더 살고 싶을 테니까.
“…….”
정우는 이 생각을 하면서, 자신을 따라나선 네 사람의 얼굴을 흘깃 봤다.
알게 모르게 저울질을 많이 했을 것이다.
헬기에 혼자 남는 것과 행운동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 중 어떤 게 ‘확정적인 죽음’에 가까운 것일지 말이다.
예상대로 효신은 아직 확신이 없는지, 곧 울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도 용케 따라나선 걸 보면 구토까진 견딜 만했던 것 같다.
어쩌면 정우의 보호막을 굳게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으음.”
용헌은 아래턱 끝에 힘을 꽉 준 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얼굴처럼 보였다.
한때 정우의 앞에서 목을 내놓고 영업하던 그이지만, 인간 앞에서 배짱을 부리는 것과 이번 상황은 비교가 불가능했다.
인간의 상식이나 공감대가 통할 리 없는 상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미지의 존재와 맞닥뜨려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 대체 이 사람은…….’
사람들을 훑던 정우의 시선이 한 사내의 얼굴에서 멈췄다.
우주가 찾아준 주치의이자 현직 비뇨기과 전문의 최동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이상야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동훈도 자신에게 닿은 시선을 느꼈는지, 기묘한 표정 그대로 고개를 돌려 정우를 쳐다봤다.
“아…….”
정우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구원자가 된 뒤로 인간에게서 당혹감을 느껴 보긴 처음이다.
“그쪽이야말로 괜찮습니까? 좀 흥분한 것 같던데요.”
정우가 은연중에 불쾌감을 드러내며 이야기하자 동훈이 얼른 정색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제가 썩 유쾌하게 생기진 않았죠.”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고.”
정우는 부연하려다가 말았다.
동훈 나름대로는 초조함을 나타내는 표정이었는데, 알다시피 범상치 않은 얼굴 구성 때문에 이쪽이 오해를 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이어진 동훈의 대사가 정우의 생각을 토막 내 버렸다.
“그런데 다른 지역에서도 이런 것들이 자라나고 있겠지요?”
두려워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기대감 같은 게 느껴졌다.
설마 이쪽 외의 다른 인간 모두가 죽을 때까지 구토하고 있길 바라는 걸까?
“그게 무슨…….”
정우 대신 선웅이 동훈을 나무라듯 운을 뗐고, 때맞춰 사위가 어둑해졌다.
“……?”
미간을 찌푸리려던 선웅의 얼굴이 삽시간에 공포로 흐트러진다.
갑자기 밤이 찾아오거나 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림자였다.
불과 몇 미터 앞에 모습을 드러낸 행운동 진입부.
이곳에 무성하게 치솟은 공명수들이 시커먼 그림자를 장막처럼 드리우고 있었다.
그런데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