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48
48화. 원시 (2)
“선택권이요……?”
용헌이 무슨 말이냐는 듯이 되물어 왔다.
이쪽은 이미 선택된 사람들이 아니냐는 뜻이다.
그에 정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아직 제자리에 떠 있는 ‘단말기’를 가리켰다.
“방주에 10석을 확보했어요. 약속한 대로 여러분을 방주 탑승자로 지정할 겁니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방주가 뭡니까?”
동훈이 손을 슬쩍 들어 보이며 질문했고, 정우는 뒤늦게 떠올렸다.
동훈과 효신에겐 방주가 무엇인지 설명해 준 적이 없었다.
‘아, 방주가 뭔지도 몰랐으면서 진입로 앞까지 따라왔던 거였나.’
정우는 새삼 감탄했다.
물론 행운동 안에서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알았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간단히 말씀드리죠. 제가 방주의 탑승자로 지정해 드리면 앞으론 진입로에서 나온 괴물들에게 추적을 받지 않게 됩니다. 이게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 건진 정확히 모릅니다. 선례가 없었으니까.”
정우가 방주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자 선웅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음…… 지금 정우 씨가 국내 구원자 중 1위입니다. 그러니까 아마 우리가 최초의 방주 탑승자일 겁니다.”
너무 좀 앞잡이 같은가. 선웅 스스로도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꼭 제공해야 하는 정보라고 판단했다.
나머지 세 사람이 자각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 남자에게 간택된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어설픈 순위의 구원자에게 붙었다가는 아까 같은 고생만 하다가 결국엔 죽게 될 가능성이 높다.
더 강한 구원자에게 살해당하는 경우가 가장 많을 것이고, 진입로에서 나온 괴물이나 길에서 조우한 각성자에게 패배할 수도 있다.
최악은 목숨을 의탁하고 있던 구원자가 변덕스러워서 일방적으로 정리당하는 경우다.
그러나 선웅의 생각에 박정우는 달랐다.
현 시점 이 사내보다 뛰어난 구원자가 없을뿐더러, 적어도 아직까진 일관된 행보를 보이지 않았는가.
그 방향이 옳다, 그르다를 논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살려 두는 게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다 죽이는 사람이야.’
반대로 저렇게까지 하며 골라낸 사람인 만큼 방주에 탑승한 인원은 끝까지 살려 둔다고 봐도 무방할 터.
선웅이 다른 구원자들을 전부 만나 본 건 아니었지만, 이보다 더 좋은 생존 조건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아…… 구원자 사이에 순위 같은 것이 있나 보지요? 그럼 다른 구원자들과 경쟁 관계인 겁니까?”
동훈이 눈을 빛내며 은근히 물어 온다.
뭐라고 대답해 줘야 하는 걸까.
선웅은 이 질문에 답변할 자격이 없었으므로 정우를 바라보며 자신의 턴을 넘겼다.
그러자 셔츠 차림의 구원자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순위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구원자끼리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유리한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일단 전 정수가 많이 필요했고, 그래서 여태 만난 구원자는 전부 죽여 왔습니다.”
여태 만난 구원자는 전부 죽였다……. 적어도 용헌과 동훈 그리고 효신에게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로 다가왔다.
이들에게 구원자라는 것은 정부가 공개 수배를 할 정도로 뭔가 특별한 존재였으니까.
더욱이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을 때, 지구가 말하지 않았던가.
이 모든 일을 해결하고 싶다면 구원자를 찾아서 도우라고.
그런데 그런 구원자를 보이는 족족 죽였다니…… 정말 그래도 됐던 걸까?
구원자를 죽이는 구원자. 다들 눈앞의 사내가 아까보다 한층 더 커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갈까요.”
장내에 정적이 흐르자 정우가 일행을 눈으로 훑었다.
다음엔 선웅을 포함한 네 사람을 방주의 탑승자로 지정했다.
지정 방식은 아주 간단했다.
단말기와 접촉한 직후부터 각 사람의 머리 위에 나타난 원형 마크를 지그시 보기만 하면 됐다.
이건 구원자인 정우의 시야에만 드러나는 일종의 인터페이스였고, 그가 한 사람씩 쳐다봄과 동시에 짤막한 신호음이 났다.
띡, 띡.
그리고 이 소리에 맞춰 사람들이 오른쪽 손목을 움찔거렸다.
살짝 따끔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가장 먼저 선웅이 자신의 몸에 변화가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어……?”
슥.
눈높이까지 들어 올린 손목에 아주 작지만 명백하게 ‘한글’이 적혀 있었다.
인간, 이라고.
그 밑엔 가로 실선이 짤막하게 그어졌다.
일(一) 자처럼 보인다.
“이게 뭐죠? 종족 표시 같은 걸까요?”
선웅의 질문에 정우가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표정을 미묘하게 구겼다.
‘혹시 이거, 제 채널 닉네임입니까?’
이건 정우가 자신의 평가관에게 묻는 내용.
이에 ‘다467’이 그의 의식 속에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모든 방주의 탑승자에게는 주인의 채널 닉네임과 방주의 호수가 각인됩니다.
‘호수……?’
답변을 들은 정우의 시선이 자연스레 선웅의 손목에 다시 닿았다.
‘인간’이라는 글자 밑에 그어진 가로 실선.
저게 바로 이쪽이 보유한 첫 번째 방주의 탑승자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럼 서른 번째 방주를 가지게 됐다고 치면, 거기에 태운 사람들에겐 실선이 30개씩 붙겠네요.’
-예, 그렇습니다.
‘…….’
숫자로 표기하는 게 훨씬 보기 편하고 간단할 텐데, 왜 굳이 실선인 걸까.
어쨌든 저 호수 표시가 연달아 30개나 붙게 되면 아마도 바코드처럼 보일 것이다.
‘닉네임’까지 함께 표시되니 정말 무슨 상품이란 느낌마저 들 터.
‘아, 덕분에 다른 녀석의 방주 탑승자를 만나면 그쪽 닉네임을 확인할 수도 있겠군.’
단, 그러기 위해선 상대방을 잠시라도 살려 놔야 한다. 아니면 오른쪽 팔뚝 정도는 남도록 조준을 잘하든가.
“그건 여러분이 이제 방주의 탑승자가 됐다는 표시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이제부턴 진입로에서 넘어온 것들의 추적을 받지 않게 될 거예요.”
정우는 ‘인간’이란 글자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아직까진 이쪽의 닉네임이 최대한 노출되지 않는 게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단 방주에 자리는 내드렸고, 다음은 아까 말했던 선택권 문제입니다.”
그 말에 모두가 굳은 표정으로 정우를 쳐다봤다.
“세 가지의 선택지를 드리겠습니다.”
그가 일행에게 제안한 것은 다음과 같았다.
1. 자신을 따라서 이번과 유사한 여정을 계속한다. 이제 방주의 탑승자가 되었으므로 괴물 앞에서도 공격받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선 좀 더 알아봐야 한다.
2. 이곳에 남아 알아서 살아간다. 앞으로 행운동에선 진입로가 다시 생기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다른 인간이나 짐승만 조심하면 죽진 않을 터. 원한다면 권총을 한 자루 주겠다.
3. 이 자리에서 죽는다. 고통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아…….”
선택지를 확인한 대다수가 창백한 얼굴로 입만 벌렸다.
솔직히 몇 사람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우에게서 해방되길 바랐다.
더는 아까와 같은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공간 자체를 변질시키는 정체불명의 어둠과 상상도 못 한 모습의 괴물들 말이다.
그러나 막상 이곳에 남아서 생존해 보라는 선택지가 주어지자 본인의 처지를 새삼 깨닫게 됐다.
죽음을 받아들일 게 아닌 이상, 이 사내의 곁에 붙어 있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는 것이다.
“정우 씨는 저희를 일종의 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데려오신 게 아닙니까? 여기에 두고 가 버리면 좌석만 낭비하는 셈일 텐데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동훈이 핵심을 짚었고, 이 말을 들은 정우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아까 진입로를 폐쇄하면서 깨달았거든요. 제가 아무리 여러분의 명줄을 쥐고 있어도 낙오할 사람은 낙오할 거란 걸요. 계속 저와 함께할 거라면,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십시오. 그리고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이세요. 만약 여기에 남기로 하신다면 정말 살려 드리겠습니다. 대신 저는 새 사람을 다시 찾아 나서야겠죠.”
정우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관점에 따라서는 ‘퇴직금’인 셈이다. 용케 구원자를 따라 진입로 앞까지 다녀온 사람들이었으니.
“음, 저는 정우 씨와 함께하겠습니다. 제 생각엔 이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군요.”
가장 먼저 선웅이 자신의 입장을 밝히며 정우의 뒤편에 섰다.
이에 곧 동훈도 그를 따라 움직였다.
“정말 1위 구원자이십니까? 그럼 이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제 남은 건 용헌과 효신.
정우로서는 최소한 용헌 정도는 건지고 싶었다.
그러나 이쪽의 발이 돼 줘야 하는 사람인만큼, 이자의 생존 의지가 얼마나 확고한가는 정말 중요했다.
내일도 모레도 생존에 성공한다면, 오늘보다 더한 것들을 보게 될지도 모르니까.
겨우 진입로 하나 닫은 것에 질려 버린다면 어차피 오래 써먹긴 어려운 인물이라는 뜻일 터.
과연 ‘자유’를 마다하고 구원자를 따르려 할 것인가?
“…….”
역시 고민되는지, 용헌의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답은 정해져 있었다.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 말을 하는 용헌의 얼굴에서 허탈감이 마구 흘러내렸다.
반면, 효신은 큰 결심을 했는지 입을 꾹 다문 채로 바닥을 노려보고 있었다.
낌새를 알아챈 동훈이 당부하듯 한마디 했다.
“잘 생각합시다. 먹고 자는 게 문제가 아닐 겁니다.”
그의 말은 여기까지였지만,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는 충분히 전달됐다.
물론 효신이 위험 요소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살인, 강도, 강간. 무법 지대가 되어 가는 이 세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란 게 빤하지 않은가.
다만 그것들은 이전 세상에도 존재하던 위협이었다.
그러나.
“알아요……. 하지만 그게 나아요. 전…… 더 이상 안 될 것 같아요.”
그녀에겐 진입로에서의 경험이 더 두려웠다.
설령 변을 당할지언정, 자신이 예측 가능한 위협에 노출되겠다는 것이다.
언뜻 이해가 되면서도 동시에 이해하기 어렵다.
정우를 포함한 나머지 네 사람은 한동안 그녀를 멀거니 바라봤다.
“알겠습니다. 행운을 빌죠. 고생 많았습니다.”
이윽고 정우가 배낭에서 권총을 한 자루 꺼냈다.
대성 그룹 사옥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가지고 있던 것 중 하나였다.
딸깍.
정우는 권총에 실탄이 가득 차 있는 것을 확인한 뒤 효신을 향해 천천히 던졌다.
마지막 한 발은 자신을 위해 남겨 두라는 이야기 같은 건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꿀꺽.
총을 양손으로 받아 든 효신이 무거운 침을 삼켰고, 정우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선택을 번복할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였다.
그리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죠.”
정우가 짤막하게 이야기하며 걸음을 떼자 나머지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저렇게 버려 두고 가느냐는 의미였다.
그사이 정우는 효신을 지나쳐 내리막길을 성큼성큼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 * *
통화 신호와 인터넷은 헬기를 세워 둔 곳 근처까지 가서야 정상화됐다.
현재 시각, 오전 11시 4분.
용헌은 물류 창고 옥상에 도착하자마자 헬기에 이상이 없는지부터 살폈다.
의사인 동훈은 특별히 무슨 장비가 없더라도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지만, 조종사인 자신은 헬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멀리서는 여기에 헬기가 있다는 걸 볼 수 있었을 텐데, 다행히 누가 왔다 간 흔적은 없군요.”
대략 점검을 마친 용헌이 정우에게 보고를 해 왔다.
“예. 생각해 보니, 우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헬기가 망가질 수도 있겠네요.”
정우는 이 말을 하면서, 자신을 따라나서기로 결정한 세 사내를 훑어봤다.
당연하지만, 이 중에 헬기를 홀로 지켜 낼 정도의 인물은 없었다.
알다시피 다음 행선지는 일찍이 무법 지대가 돼 버렸다던 종로.
발밑의 패스파인더도 종로 쪽에 정수가 잔뜩 모여 있음을 알려 왔다.
따라서 이번처럼 헬기를 방치해 둔 채로 움직였다간 분명히 사달이 날 것이다.
‘소리가 워낙 커서 우리가 접근하는 걸 일대의 모두가 알게 될 거야. 그러니 전부 이쪽으로…….’
아.
고민을 하던 정우가 한 가지를 깨달았다.
다음엔 말없이 옥상 난간 쪽으로 나아갔다. 곧 떨어지겠다 싶을 정도로 위태로운 지점까지.
“정우 씨?”
그를 곁눈질하고 있던 선웅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그러나 정우는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난간 너머로 힘차게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