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58
58화. 징조 (3)
“저기가 비서동 입구입니다.”
명일이 떨리는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그의 손가락은 오른편으로 쭉 늘어진 펜스의 한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군요.”
짤막한 정우의 대답.
실은 명일이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을 거다. 비서동 입구라는 곳 주변에 유난히 시체가 많았으니까.
왼편으론 여전히 경복궁 돌담이 이어지는 중이었는데, 군데군데 핏물이 튀어 있어서 마치 사극 세트장을 보는 것 같았다.
여태 보아 온 광경과 마찬가지로 근방의 시체 대다수가 경찰과 경호원이었지만 이번엔 사복 차림의 민간인도 섞여 있었다. 아마 청와대를 급습했다던 범죄자 중 하나일 터.
‘이 녀석은 총을 맞고 죽었네.’
툭.
정우가 민간인 시체를 발로 밀자 벌집처럼 변한 놈의 뱃속에서 쩔럭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끈적한 피가 스멀스멀 기어 나와 바닥을 핥기 시작했다.
“으…….”
명일이 끔찍하단 표정을 지으며 물러섰지만 정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시체 사이를 가로질렀다.
비서동 입구가 이미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에 그저 걷기만 하면 됐다.
이 와중에 특이점이 있다면 그건 바닥에 빈 탄창이 꽤 많이 보인다는 점.
정우는 이게 일종의 ‘주저흔’이라고 생각했다. 수비 측이 아닌 습격자들의 주저흔 말이다.
적어도 두 명이 정수 6천 개씩을 가진 상태였다고 했으니 청와대 외곽에 나와 있던 경호원 정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워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경호원들이 탄창을 교환할 수 있었다는 건 습격자들이 이 앞에서 머뭇거렸다는 뜻밖에 안 된다.
‘막상 와 보니 망설여졌던 건가.’
정우는 사선으로 잘려 나간 펜스를 보면서 청와대 안쪽에 발을 들였다.
척.
콘크리트가 발라진 땅에는 붉은 발자국이 무수히 찍혀 있었다. 경호팀을 박살 낸 습격자들의 흔적이다. 비서동 쪽으로 뛰면서도 계속 갈팡질팡하던 당시 정황이 그대로 드러났다.
‘발자국만 봐도 질서가 없다는 게 느껴지네. 민간인은 민간인이구나.’
자국들이 신발 밑창 형태만 아니었다면 짐승의 것이라고 해도 믿었을 거다.
그사이 명일은 발자국을 따라 직사각형 건물 앞에 서 있었는데, 발자국들이 곧장 그 안으로 들었다가 도로 나온 것을 보고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 그저 가까워서 이리로 들어온 게 아니라 본래 목적이 여기였군요. 비서동 지하의 위기관리상황실 말입니다. 대통령을 잡으러 왔던 거죠.”
그런데 벙커엔 대통령이 없었고, 이 때문에 다음 행선지가 대통령의 집무실이 있는 청와대 본관으로 바뀌었다…….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저쪽입니까? 본관 방향이.”
“예, 또 한참 걸어야 합니다.”
명일이 비서동 왼편의 가로수 길을 가리키며 정우를 안내했는데, 부지가 워낙 넓어서 육안으론 길의 끝이 어딘지 가늠할 수 없었다.
“여기 총면적이 7만6천 평 정도 됩니다. 어쩌면 놈들과 마주치지 못할 수도 있겠네요.”
노파심에 명일이 부연했고, 이에 정우의 시선이 발치의 패스파인더로 향했다.
‘여태 저기서 뭘 하는 거지?’
현재 정수 표식은 정확히 이쪽의 진행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놈들이 아직 본관 근처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먼저 가서 길을 뚫어 놓을 테니 조심히 따라와요. 다른 길로 새지만 않으면 놈들과 마주치진 않을 겁니다.”
마음이 급해진 정우가 근골격에 정수를 불어 넣자 그의 몸이 새파랗게 빛났다.
“억!”
흡사 마인(魔人)의 모습. 기겁한 명일이 뒤로 자빠지려는 순간, 정우의 신형이 쏜살처럼 튀어 나갔다.
* * *
쏴아앗!
귓바퀴를 할퀴며 지나가는 풍절음.
2만 개가량의 정수를 머금은 신체는 정우를 엄청난 속도로 실어 날랐다.
이때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이렇게 혼자 날뛰어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청와대 본관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5분쯤 달렸을 때 저 멀리 불그스름한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시체?’
대상과의 거리는 빠르게 좁혀졌고, 곧 시신경을 타고 올라간 충격이 뇌를 강타했다.
“……!”
붉은 밭.
수백 조각의 살덩이가 잔디 위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청와대에 잔류한 경호팀이 습격자들과 결전을 치렀다던 그 장소일 터.
“후.”
극심한 악취에 콧속이 시큰해진다.
정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서 대기 중이던 경호원의 수가 200명쯤 됐다고 했던가. ‘밭’의 면적을 보아하니 그들이 널찍한 대형을 갖춘 상태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습격자의 머릿수는 열다섯 정도. 아무리 각성자들이어도 이 구도에서 긴장하지 않을 순 없었을 것이다.
‘사실상 한 명이 다 했군.’
이 전투에서도 ‘정수 실’을 사용하는 누군가가 대활약을 했다. 현장이 시뻘건 밭처럼 보이는 것도 잔여물이 많기 때문이었다. 머리, 가슴, 배, 손, 발…… 망자들의 생전 모습이 개별적으로나마 전부 보존되어 있었다.
만약 파동을 쓰는 각성자가 해치운 거였다면 발목이나 손가락 끝마디 정도만 남았을 것이다.
다만 비서동을 뚫고 들어올 때와 달리 좀 흥분한 상태였는지 대다수 시체가 서너 갈래로 찢긴 게 눈에 띄었다. 대상을 불필요하게 여러 번 벴다는 소리다.
세로로 썰린 시체도 있는 거로 봐선 보통 아비규환이 아니었으리라. 공격하는 쪽이 이 정도로 광분했다면 살해당하는 쪽도 제정신이 아니었을 테니까.
“음.”
정우는 건조한 표정으로 본관 방향을 바라봤다.
아, 드디어 보이기 시작한다. 흐릿한 형체긴 했지만 분명 푸른 지붕을 가진 건물이 저 멀리 있었다.
팍!
다시금 정우의 다리가 시퍼런 빛과 함께 허공을 갈랐다.
손목시계가 일러준 현재 시각은 오후 2시 6분.
‘이대로라면 해가 저물기 전에 전부 끝낼 수 있다.’
정우는 청와대와 북악산에서의 용무를 모두 마친 뒤 이태원으로 돌아가 진입로를 닫을 계획이었다.
그렇게 하면 폐쇄한 진입로가 둘이 되니 방주의 좌석도 20개로 늘어난다. 비로소 ‘구원’의 기반이 갖춰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놈들인가.’
본관 건물과의 거리가 100미터 안쪽으로 접어들자 건물 입구 근처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머릿수는 네 명. 나름대로 경계 근무 중인 걸까.
그런데 이때 정우가 미처 자각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현재 그는 신체 강화를 극한으로 해 둔 상태였고, 따라서 전신이 시퍼렇게 빛나는 중이었다. 상대의 이목을 단번에 사로잡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어어?”
아니나 다를까, 본관 앞에 모인 사내들이 기겁하더니 푸른 침입자가 오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
정우가 놈들의 손에 기관단총이 들린 걸 본 것도 이때였다.
투타타타타!
네 개의 총구가 동시에 탄을 뱉어 내자 어마어마한 소음이 허공을 꿰뚫었다.
하지만 전부 유효 사격은 아니었다. 넷 중 둘은 견착도 하지 않은 채로 격발한 탓에 총구가 이미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문제는 나머지 둘이었는데, 이들은 당황한 와중에도 정확히 정우를 노리고 쐈다.
물론 초탄 사격만 신중했을 뿐 30발들이 탄창을 한 번에 비워 내는 과정에서 총구로 반원을 두 번이나 그렸다.
타타탁……!
2초가량 이어진 연사가 마침내 멎었고, 네 사람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총구를 옆으로 밀어내며 시야를 확보했다.
“주, 죽었나?”
조금 전 견착조차 하지 않고 총을 쏴대던 녀석 중 하나다. 놈은 눈을 껌뻑거리며 연기 너머 상대방이 있던 자리를 유심히 봤다.
그러고는.
푸아아악!
난데없이 날아든 파란 빛줄기를 맞고서 상반신이 사라졌다.
“억, 씨발!”
남은 셋의 동공이 확장됐고, 때맞춰 정우가 번개처럼 난입했다. 오른손엔 이미 길쭉한 정수 칼날이 빚어 올라간 상태.
스악.
푸른 궤적과 함께 섬뜩한 절삭음이 났는데, 총을 쥔 세 남자 중 둘은 이 소릴 들을 수가 없었다. 머리가 더는 몸통과 연결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투둑, 툭.
두 개의 머리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잔디밭 위를 구른다.
광대가 큰 쪽은 금세 제자리에 멈췄고, 얼굴이 둥글던 녀석만 두어 바퀴 구르다가 바닥에 코를 박고 섰다.
남은 사수는 이제 하나.
“아…….”
놈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자 빠진 채 동료들의 머리통을 멍하니 봤다.
탄창이 말끔히 비어 버린 기관단총은 아주 가벼웠다. 지금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물건이라는 게 여실히 느껴질 정도로.
그사이 푸른 침입자, 정우는 바닥에 떨어진 정수 구체를 흡수하고 있었다.
티틱, 틱.
이 녀석들이 가지고 있던 정수는 평균 400개, 완전 피라미였다. 사실상 고기 방패 수준으로나 쓰이던 놈들이었던 것이다.
스아아…….
정수 총량이 23,498개로 늘어나면서 온몸에 싸늘한 기운이 확 끼쳤다가 사그라졌다. 그리고 이내 왼쪽 팔뚝이 다시 뜨거워졌다. 출혈 때문이었다.
조금 전 네 명의 사수가 쐈던 초탄 중 하나가 팔을 비껴간 거다. 정수 2만 개짜리 신체 강화는 총알을 막아 주지 못했다.
놈들의 사정거리 안에 들었을 때 정수를 보호막으로 돌렸어야 했는데 너무 안일하게 굴었다. 명백한 패착이다. 이 총알이 팔 대신 머리로 날아들었다면 즉사했을 게 아닌가.
“제길.”
상처가 깊진 않았다. 총알이 살짝 스쳐 간 정도. 그럼에도 피부와 근육 일부가 쓸려 나가서 무시 못할 통증이 있었다.
몸 밖으로 새기 시작한 피가 소매 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건 덤.
“어?”
멀거니 있던 마지막 사수 놈도 정우가 피를 흘리는 걸 보고서 소리 내어 놀랐다.
이에 정우가 정말이지 태연한 음색으로 물었다.
“혹시 지혈제 가진 거 있습니까?”
그러다 아차,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순간적으로 잊었던 것이다. 상대를 죽일 예정이었다는 거. 만에 하나 지혈제를 받게 된다 해도 그런 이유로 이자를 방주에 태울 거 같진 않다는 사실.
“아, 잊어요. 됐습니다.”
“예? 무, 무슨……?”
사내는 정우가 방금 보인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두려움을 느꼈다. 단순히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알 수 없는, 지독한 위화감에서 오는 공포였다.
“잠깐! 잠깐만요!”
정우가 푸른 검신을 유지한 채로 다가가자 사내의 얼굴이 볼품없게 일그러졌다.
죽음의 예감.
강렬한 생존 본능이 사내의 모든 정수를 보호막으로 밀어 넣게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400개짜리 정수 보호막은 계란 껍데기에 불과했다.
삿.
결국 푸른색 가로 실선이 그의 목을 스쳐 갔고, 곧 잔디밭 위에 머리통 하나가 추가됐다.
털썩.
머리 잃은 몸뚱어리가 지면과 부딪치자 목이 있던 자리에서 핏물이 벌컥벌컥 흘러나왔다.
정우는 그걸 보면서 시체를 뒤졌다. 자신에게 쓸 지혈제를 찾기 위해서였다.
“…….”
문득 초라하단 생각이 든다.
심지어 죽은 녀석의 몸에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붕대라도 있으면 출혈을 좀 막아 볼 수 있을 텐데. 어쩌면 청와대 안에 응급 도구가 남아 있을지도.
정우가 이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자 청와대 본관 입구와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총성을 듣고 황급히 달려온 것이다.
“뭐야, 이 새끼는?”
놈들 중 하나가 정우를 보면서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목이 잘린 시체를 더듬고 있지 않았던가.
“비켜 봐.”
이윽고 입구 안쪽에서부터 꽤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사내들이 길을 터주기 위해 좌우로 물러섰다.
이쯤 되면 감이 오지 않는가. 정우는 직감할 수 있었다.
‘네놈이구나. 아버지와 똑같은 기술을 쓰던 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