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60
60화. 징조 (5)
세광의 이야기를 쭉 듣던 정우는 새삼스러운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어제 아침 나타난 지구의 성명문을 모두가 봤다는 사실 말이다.
자신은 그때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다른 누구는 전혀 다른 환경, 상황에 놓여 있던 것이다.
경찰서에서 범인 신분으로 종말을 맞이하게 된 세광, 세중 형제처럼.
“그래서… 설문이 끝나자마자 싸움이 벌어졌고, 당신들도 거기에 휘말렸다는 소립니까?”
금은방을 털다 잡혀 온 두 형제, 8인의 폭행범과 성난 경찰들.
정우가 봐도 공교로운 조합이긴 했다. 이 조합이면 정수가 분배되자마자 살육전이 시작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어진 세광의 답변은 아주 의외였다.
“아닙니다. 휘말렸다기보다는…….”
그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동생 세중을 슬쩍 봤다.
“살인을 시작한 건 그 8인조가 맞지만 저희도 일이 터지자마자 뭘 해야 할지 바로 깨달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피해자라고 할 만한 사람은 몇 명 없었습니다.”
세광이 눈을 지그시 감는다. 당시 상황을 떠올리고 있는 거였다.
경찰서 내 모든 이의 설문이 끝난 직후 한 사내가 주목받았다.
다름 아닌 문제의 8인조 중 하나였는데, 머리 위에 ‘포식자’라는 문구를 붙이고 있었다.
다들 심상치 않은 설문을 직접 지나온 뒤였기에 저 문구가 보통 의미는 아닐 거로 직감했고, 마침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있던 경찰 몇 명이 포식자를 겨눴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과열됐다.
수십의 사내가 고성을 주고받자 그 누구의 음성도 제대로 된 문장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탕!
권총을 들었던 누군가가 격발했다. 그건 공포탄이자 신호탄이기도 했다. 살육전의 시작을 알리는.
“아마 실수였을 겁니다.”
눈을 다시 뜬 세광이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정우도 거기에 동의했다. 총이 겨눠진 상태에서 언성이 높아지니 8인조 중 누군가의 정수가 활성화됐을 것이다. 이에 따라 동공이 파랗게 빛나기 시작했고, 이걸 권총 쥔 사람이 봤을 터.
겁이 나서 본인도 모르게 쐈다고 보는 게 맞다. 죽일 생각으로 쐈다면 한 발만 쐈을 리가 없으니까.
일찍이 행운동에서 살의가 담긴 총알을 받아 본 정우이기에 더욱 잘 알았다.
“두 사람은 그 경찰서 안에서 살아남았다 치고……. 그럼 이쪽은 누구죠?”
정우가 두 형제의 좌우로 늘어진 다른 사내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희가 그때 1층에 있었는데, 이쪽에서 총성이 나니까 위에서부터 경찰들이 몰려 내려오더군요.”
그래서 그들까지 다 죽이고 위로 올라가니 다른 범죄자들이 있더라, 라는 것이 세광의 설명.
“싹 다 죽일까 했지만 아군이 필요해질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로 근처엔 경찰이 어마어마하게 많았거든요.”
“그렇군요.”
정우는 짤막하게 대답하면서 사내들을 다시 둘러봤다.
평균 정수량 400개. 두 형제와의 정수 차이가 너무 심했다. 이건 사실상 아군이라기보다는 총알받이에 가깝지 않은가. 경찰과의 전투에 필요한 최소한의 정수만 들고 있는 셈이니까.
‘결국 자기들이 살자고 남을 이용 중인 거네.’
물론 이게 잘못된 건 결코 아니다. 구원자인 정우도 남을 이용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아니, 구원자 중에서 인류의 존속이나 타인의 안녕을 목표로 삼고 있는 자가 과연 존재할까?
본질적으론 모든 행위가 자신의 생존을 위한 게 아니던가. 사람을 죽여서 정수를 모으고, 진입로를 닫고, 방주에 태울 사람을 고르는 일 말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읍시다. 청와대엔 왜 온 겁니까? 구원자도 아닌 것 같고, 특별히 목적의식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정우의 ‘마지막’이란 단어에 세광이 흠칫하더니 도리어 질문을 던졌다.
“대답하면, 저희를 살려 주실 겁니까?”
이건 충분히 예상했던 물음.
“아니요. 제 기준으로는 여러분을 살려 보낼 이유가 없습니다.”
정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이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던 세중이 뒤로 잽싸게 물러났다. 싸울 준비를 하려는 거다.
반면 세광은 끝까지 매달렸다.
“아니,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를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누구와 싸우든 무조건 이길 자신이 있다는 겁니까?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같은 부류끼리 뭉쳐야…….”
그가 대사를 여기까지 읊는 동안 정우의 어깨 너머 멀리서부터 거뭇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이에 세광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옮겨 갔고, 정우도 뒤를 슬쩍 봤다.
“아.”
그건 정우의 흔적을 따라오고 있던 명일이었다. 그리고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세중이 정수 칼날을 뽑았다.
“씨발, 진짜 꼴사납게!”
쉬아악!
6천 개짜리 각성자답게 엄청난 기세의 공격. 이판사판임을 깨달은 나머지 사내들도 정우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 상황은 정우의 예상 시나리오 범주에 들어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정수를 최대한 모아 놔야죠.”
이건 정우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콰츠츠츳!
세중이 휘두른 칼날은 여지없이 정우의 보호막에 튕겨 나왔다.
다음엔 정우가 답례로 정수 파동을 뿜었다.
푸아아악!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로 널찍한 방사형 파동.
정우의 왼손에서 뻗어 나간 이 파동은 신장 175의 세중을 완전히 집어삼켰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츠츳, 츳!
뒤이어 다른 사내들의 공격이 정우의 보호막을 두들겼지만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휙.
이 400개짜리 각성자들은 정우가 팔을 한 차례 휘젓는 것만으로도 무(無)로 돌아갔다.
그리고 현장에 뒤늦게 도착한 명일이 이 장면을 목격했다.
“헉…….”
정수를 이용해 싸워 본 적이 없는 그에게 지금 정우가 보이고 있는 능력은 이해 불가의 영역이었다. 손짓만으로 각성자들을 죽이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상대는 청와대를 무력으로 점거한 놈들인데.
‘정수 차이가 심각할 정도로 벌어지면 이렇게 되는 건가?’
비로소 명일은 사람들이 서로를 해쳐 가면서까지 정수 수집에 목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세상이 망해 가는 와중에 나에게도 저런 힘이 생긴다면, 그럼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과연 어떤 삶을…….
푸아아악!
이윽고 세광을 제외한 모든 사내가 제거됐다. 망자들이 남기고 간 정수 구체가 사방에 가득했고, 이 덕분에 사위가 푸르스름했다.
티틱, 틱.
정우는 구체들을 밟으면서 세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전에도 어림없었지만 지금의 정우는 세광이 어떤 짓을 해도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는 존재가 된 상태였다. 정수 총량이 3만 개에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정우의 왼팔에선 여전히 피가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아…….”
세광이 메마른 신음을 낸다. 그의 눈은 정우가 아직 흡수하지 않은 세중의 정수 덩어리에 닿아 있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깔끔한 살인.
동생이 정말 죽었는가? 녀석의 죽음을 의미하는 푸른 구체가 눈앞에 있건만 도저히 실감할 수 없었다.
낯설었다. 그가 아는 ‘죽음’이란 건 저런 형태가 아니었다.
거칠고 슬픈 감정이 피부 밑에서만 소용돌이치다 잦아든다. 대신 어떤 의무감이 뿜어져 나왔다.
“이 개새끼가!”
드디어 세광이 몸을 움직였다. 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그림자의 위치가 바뀌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만큼은 아주 위축되어 있었다. 자신이 패배하리란 걸 아는 것이다.
예정된 죽음을 향해 제 발로 달려가는 한 사내.
정우는 상대를 맞이해 보호막의 밀도를 끌어 올렸다. 녀석이 사용하는 정수 형태를 직접 보고 싶어서였다.
스아앗!
그리고 이와 동시에 세광 쪽에서부터 푸른색의 가냘픈 무언가가 휘둘러졌다.
홱!
“……!”
정우의 동공이 반사적으로 커졌다. 역시 아버지가 쓰던 것과 똑같은, 파란 실이 날아들고 있었다.
파츠츳!
얇디얇은 선처럼 보이던 그것은 정우의 보호막에 닿자마자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그간 전투 경험을 충분히 쌓아 온 정우는 이 장면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아, 저게 물체화가 아니고 방출의 일종이었던 거구나.’
삿!
그사이 세광이 두 번째 공격을 준비하는 게 보였다.
그런데.
“어!”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던 명일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신장 190의 거구가 다름 아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팍!
세광의 신체가 옆으로 튕기듯 움직이자 사위가 또 한 번 일렁이는 듯했다. 본래 전문적으로 운동하던 사람인지 신체 강화를 한 상태가 아님에도 움직임이 무척 빨랐다.
‘미친!’
정우가 황급히 놈을 따라 고개를 돌렸지만 마침 햇볕이 그쪽에서부터 내리쬐고 있어 눈을 제대로 뜨기 어려웠다.
‘설마 이것까지 계산한 건…….’
그러나 당황할 시간이 없었다. 정우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발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정수를 뿜었다. 공격 범위에 명일이 휩쓸리지 않길 바라면서 말이다.
푸악!
짤막하게나마 살점 파열하는 소리가 났다.
“명일 씨, 괜찮습니까?”
“예, 옙! 일단은!”
명일의 음성이 예상보다 먼 곳에서부터 들려왔고, 곧 정우의 시야가 복구되기 시작했다.
그를 지나쳐 뒤편으로 뛰어가던 세광은 불과 4미터 거리에 엎어져 있었다.
정수 파동이 하반신을 비스듬히 할퀴고 지나갔는지 오른쪽 다리는 흔적조차 없었고, 왼쪽 허벅다리만 간신히 남아서 경련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하늘을 향한 목덜미는 보기 거북할 정도로 창백했다. 하지 절단부를 통해 온몸의 피가 빠져나간 탓이다.
정우의 위치에선 세광의 얼굴을 볼 수 없었으나 맞은편에 선 명일의 표정만 봐도 녀석이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으웁…….”
급기야 세광이 이상한 소리를 낸다. 구역질이 올라오는 걸까. 그러곤 살짝 들려 있던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달달 떨리던 그의 몸이 멈춘 것도 이때였다.
“주, 주, 죽었습니다.”
명일은 아마도, 라고 덧붙이려다 입을 다물었다. 움직임이 멎은 사내의 몸에서부터 푸른 구체가 튀어 올랐기 때문이다.
팟.
세광이 지니고 있던 6,741개의 정수는 다섯 구체에 나뉘어 땅바닥을 굴렀다.
‘그러고 보니 결국 못 들었네. 놈들이 여기 온 이유.’
대통령을 붙잡아서 면죄부를 받아 낼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여태 해 온 살인에 대한 면책권 말이다.
아니, 어쩌면 전부 죽여서 죄를 묻지 못하게 만들 계획이었을지도.
어찌 됐든 놈들도 끝내 죽임을 당했다. 더 큰 살인자에게.
“…….”
정우는 건조한 얼굴을 하고서 세광과 세중이 떨어뜨린 정수를 모조리 흡수했다.
그러자 정수 총량이 40,286개까지 불어나면서 머리가 얼어붙는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급격한 정수 증가에 따른 후유증이었다.
“크억!”
눈이 꽉 감겨 있는데도 머릿속에 새겨진 자신의 정수량은 뚜렷하게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명일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여전히 거리감이 있었다. 이쪽을 걱정하면서도 차마 가까이 다가오진 못하는 것이다.
“괜찮습니다. 잠깐 기다려요.”
정우는 온몸에 보호막을 짙게 두른 뒤 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수그렸다. 그러자 고통이 서서히 사그라지는 게 느껴졌다.
‘싸우는 도중에 이 꼴이 되면 그것도 문제겠어. 정수도 무턱대고 집어 먹을 게 아니구나.’
힘겹게 눈을 뜬 정우의 시야에 패스파인더의 정수 표식이 들어왔다.
줄곧 북쪽을 가리키던 푸른 화살표가 짧게 명멸하더니 서쪽으로 빙글 돌았다. 종로엔 더 이상 적수가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북악산 아래에 있다는 청와대 제2 대책실에도 제대로 된 각성자가 없다는 의미일 터.
“갑시다. 이제 당신이 목숨값을 할 차례군요.”
정우가 이 말을 하며 몸을 일으키자 그의 그림자가 청와대 앞마당을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