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61
61화. 압도적 화자 (1)
“좀 어떠십니까?”
뒤편에서 난 음성이었다.
이에 동훈이 뒤를 돌아보자 부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는 선웅이 눈에 들어왔다. 흰 셔츠에 양복바지 차림, 어깨엔 소총 한 정이 어색하게 걸려 있었다.
슥.
동훈은 좀 어떠냐는 선웅의 물음에 대답조차 하지 않은 채 살며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현재 시각은 오후 2시 20분.
청와대로 간 정우가 세광, 세중 형제와의 전투를 마친 직후였지만 이쪽으로선 그곳 상황을 알 길이 없었다. 그저 별일 없길 바라며 기다리고 있을 뿐.
“왜요, 특이 사항이라도 있습니까?”
이 말을 하는 동훈의 얼굴이 너무 무표정해서 선웅은 객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선웅이 말끝을 흐리자 대번에 동훈의 고개가 도로 돌아갔다.
현 위치는 황룡강 건물 옥상. 헬기를 위장막으로 덮어 둔 채 세 사람이 삼면으로 나뉘어 경계 중인 상황이었다.
“딱히 할 말 없으면 각자 맡은 일이나 열심히 합시다.”
동훈의 음성에서 은근한 불쾌감이 풍겨 나온다. 하기야 총 든 사내를 뒤통수에 붙이고 있으니 기분 좋을 리 있겠는가.
그러자 선웅이 입술을 달싹이며 첫음절을 더듬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때 일은…… 제가 못났었죠.”
“……?”
무엇이 죄송하단 소리인가.
생뚱맞은 대사에 동훈이 다시 뒤를 돌아봤다.
“행운동에서, 그 물류 창고 옥상에서 말입니다. 제가 정말 실례를 범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선웅이 허리를 크게 숙이며 사죄의 뜻을 표했다.
“아아.”
비로소 동훈의 머릿속에 그때 일이 떠올랐다. 화난 선웅이 큰 덩치를 이용해 위압감을 조성해 오던 그 일.
하지만 당시 패배한 건 선웅이 아니었던가. 그거 좀 구식 아닙니까? 라는 동훈의 지적에 옴짝달싹 못했었으니까.
“앞으론 잘 지내자는 의미인가요? 그런 거라면 굳이 애쓸 필요 없습니다. 우리 목숨은 결국 정우 씨에게 달려 있으니까요. 그분이 원한다면 전 누구에게나 최선을 다할 겁니다.”
동훈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핀트가 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심지어 의미도 모호했다. 상호 관계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내 의술로 널 살려야 할 때가 왔을 때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인가?
후자라면 꽤 오싹한 말이다. 의사이기에 부여될 수밖에 없는 모종의 권력을 인지하고 있단 뜻이니까.
“아…… 그렇군요.”
선웅으로선 더 얹을 말이 없었다.
그사이 동훈의 머리가 다시 옥상 난간 바깥 방향으로 돌아갔다.
“…….”
선웅은 변기에 빠진 휴지심을 바라보는 기분으로 상대 뒤통수를 응시했다. 그러곤 조용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 * *
오후 2시 27분.
정우의 출혈이 멎었다. 청와대 본관에서 붕대와 지혈제를 찾아낸 덕분이다. 마침 명일이 응급 처치에 꽤 해박해서 수준급의 조치를 받을 수 있었다.
“이걸 또 이렇게 써먹는군요. 왕년엔 제가 등산이랑 캠핑을 좀 했었거든요. 사실 저 살자고 배워 뒀던 건데…….”
명일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이 구원자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줬다는 사실에 감명한 것이다. 이 점은 분명 자신의 생존율에도 큰 영향을 끼칠 터.
“다 됐습니다. 많이 불편하진 않으시지요?”
처치를 마친 명일이 다소 비굴하기까지 한 어조로 물었다.
“아, 예. 고생하셨습니다.”
정우는 조금 거북함을 느끼며 명일을 향해 고개를 꾸벅였다. 그러다 새삼 상대의 나이가 자신보다 한참 많음을 깨달았다.
‘마흔 후반? 아니야, 더 돼 보이는데.’
검게 보이던 머리는 사실 염색한 것이었는지 이마 근처의 머리칼 뿌리가 희끗한 게 눈에 띄었다.
그렇다고 굳이 나이를 묻고 싶진 않았다. 지금도 충분히 불편했으니까.
대신 본격적인 ‘목숨값’을 요구하며 어색한 분위기를 묻었다.
“그럼 이제 출발할까요. 대통령이 또 도망가기 전에.”
“…….”
역시나 명일의 표정이 돌처럼 굳는다.
“예, 이쪽입니다.”
중년의 기자가 뻣뻣한 동작으로 가리킨 방향은 청와대 본관 바로 뒤편이었다.
“좀 걸어가면 북악산으로 진입하는 숲길이 나옵니다. 제2 대책실은 이정표 몇 개를 구분할 줄 알아야 바로 찾아갈 수 있고…….”
그러나 이어진 굉음이 그의 음성을 덮어 버렸다.
투두두두두!
거대한 북채로 하늘을 마구 두들기는 것만 같다.
“뭣…….”
당황한 명일이 허공으로 고개를 들었고, 곧 두 사람의 시야에 암녹색 헬기가 나타났다. 서쪽에서부터 나타나 청와대 부지를 비스듬히 지나가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북악산이 목적지였다.
“저쪽은 국회의사당 방향 아닌가요.”
정우의 손가락이 헬기가 나타난 방향을 가리키자 명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이 4만 개짜리 구원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렇긴 합니다만, 국회는 어제부터 텅 비어 있었습니다.”
“국회가 비었다고요?”
정우가 어이없다는 듯 되묻자 명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시다시피 어제 일이 터진 게 오전 8시죠. 그런데 국회 일정은 대개 오전 9시 이후부터 시작됩니다.”
“아니, 그럼 출근하다 도로에서 다 죽었다는 겁니까?”
“대부분 죽었다, 라는 표현이 적절할 겁니다.”
명일에 따르면 어제인 월요일 오후 2시 30분에 대통령이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러나 당시 국회는 이를 통고받을 능력조차 없었다. 의회가 기능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계엄령 자체는 유효합니다. 심지어 청와대가 직접 공격받게 됐으니 뭔가 조치를 취하겠죠.”
“음.”
정우의 시선이 벌써 저만치 멀어지고 있는 군용 헬기에 닿았다. 저게 국회의원을 태우고 있는 게 아니라면 누굴 실어 나르는 중인 걸까.
“그렇다고 도심부에 폭격할 순 없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니까.”
정우는 이 말을 하면서 문득 슬픈 감정이 스쳐 가는 걸 느꼈다. 아주 찰나였다.
척.
그가 다시 발을 내딛자 명일이 잽싸게 앞장섰다.
* * *
오후 2시 40분.
정우는 북악산 어딘가에서 매미 소리를 듣고 있었다.
7월 말, 매미아목의 곤충들이 짝을 찾는 외침.
작년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울음이었지만 왜인지 섬뜩한 기분마저 들었다.
실은 녀석들이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중이 아닐까 싶어서였다. 정수를 통해 직접 대화를 나눠 보지 않는 이상 저들이 정말 무어라 하는 건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니까.
매미들이 우는 이유는 짝을 찾기 위해서다, 라는 이야기도 결국엔 인간의 일방적인 추론이지 않은가.
그러다 한 가지 의문이 떠올라서 평가관을 호출했다.
‘정수가 포유류 위주로 분배된 겁니까? 아직 말하는 개미나 바퀴, 이런 건 만나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에 다467이 의식 속에서 서서히 일어났다.
-모든 행성의 정수는 유한합니다. 지구 역시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을 겁니다.
‘……?’
묘하게 핀트가 어긋나 있고 거리감 역시 상당한 답변이다. 평가관을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자세히 언급해 주기 어렵다는 뜻인가?’
이건 의식 속에서 혼잣말한 것이었지만 당연히 평가관도 들었을 터. 그러나 후속 답변은 없었다.
“갈림길이네요. 여긴 이정표를 살펴보고 가야합니다.”
앞서 걷던 명일이 걸음을 멈추며 정우에게 보고해 왔다.
그의 말대로 10미터 앞에서 길이 세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각 길은 대형 버스가 지나가도 될 정도로 폭이 넓었는데, 저마다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휜 채였다.
“대통령이 여길 먼저 지나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바퀴 자국을 따라가면 될 거 같은데.”
정우가 이 말과 함께 갈림길을 살폈으나 모든 길에 바퀴 자국이 남아 있었다. 추적을 지연시키기 위한 작업이 이미 끝나 있던 것이다.
“농성용 요새긴 하지만 최소한의 보안은 하고 있죠. 전혀 모르는 사람은 찾아가기 힘듭니다.”
명일은 갈림길 중앙에 놓인 석재 구조물을 더듬고 있었다. 높이 2미터의 기둥 형태였는데, 표면에 원형 무늬가 깨알처럼 양각된 게 유일한 특징이었다.
“그게 이정표인가요?”
호기심 동한 정우가 묻자 명일이 슬쩍 돌아보며 답했다.
“예, 저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입니다. 평시엔 일대가 전부 통제 구역이거든요.”
이 와중에도 양손으론 돌기둥을 계속 더듬었다.
그러다가.
“아, 찾았습니다.”
명일의 손이 멈춘 위치는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이정표 표면의 무늬 한가운데였으니까.
정우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명일이 손을 거두면서 낮게 웃었다.
“점자입니다. 3이라고 적혔으니까 갈림길을 정면으로 본 상태에서 우측부터 하나, 둘, 셋.”
거칠어 보이는 그의 손가락이 좌측 길을 가리켰다.
“점자라고요?”
정우의 입이 벌어진다. 그저 신기해서였다. 대피용 벙커로 가는 길을 무슨 게임의 퍼즐처럼 표시해 놨으니 말이다. 그것도 청와대가.
“제가 알기론 이 길이 북악산 전체에 걸쳐 거미줄처럼 얽혀 있고, 일부는 일반 등산로와도 이어집니다.”
목숨값을 해냈다고 생각했는지 명일의 목소리에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 북악산 안쪽으로 들어가자 수풀이 점점 더 우거졌다. 그리고 이정표가 설치된 갈림길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뭐지?’
말없이 명일을 따르던 정우가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한 건 무려 여섯 번째 갈림길 앞에서였다.
“좀 이상하지 않아요?”
“예?”
여느 때처럼 이정표를 더듬던 명일이 고개를 돌리자 정우가 주변을 둘러보라는 듯 눈짓했다.
이에 명일이 천천히 사방을 훑었다.
일단 얼핏 보기엔 이상한 게 없었다. 일대 숲엔 참나무가 빼곡했고, 이 나무들 사이로 1미터 이상 자란 관목이 무성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굳이 신경 쓰이는 점을 꼽자면 이 관목의 개체 수가 참나무에 비해 너무 많다는 점일까. 널찍한 산길을 제외한 모든 공간이 인위적으로 막힌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글쎄요, 수풀이 너무 빽빽하게 자랐긴 하네요.”
명일이 어깨를 으쓱하며 잘 모르겠단 표정을 짓자 정우가 그를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이 주변에선 매미가 울지를 않잖아요.”
“……?”
이에 명일의 고개가 다시 길가 저편으로 홱 돌아갔다.
“어?”
정말이다. 아까만 해도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크게 들리던 매미 울음이 지금은 꽤 멀리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단순히 이쪽 나무를 매미가 싫어하는 걸 수도 있지만…….”
그새 정우의 눈빛이 아주 날카로워졌다.
슥.
명일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정우가 꺼내 든 만년필을 응시했다.
그리고.
팟.
만년필이 허공을 찌름과 동시에 역고깔 형태의 정수 파동이 근처 나무들을 먹어 치웠다.
그런데 그것들은 나무가 아니었다.
프트트트틋!
파동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나무 밑동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절단면이 아주 새하얬기 때문이다.
“플라스틱……?”
명일이 넋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참나무를 비롯해 가슴 높이까지 자란 이름 모를 관목들까지 전부 가짜였다.
“그 대책실인지 뭔지에 다 온 것 같은데요. 이렇게나 정성을 들인 걸 보면 말이죠.”
정우는 동강 난 공장제 식물들을 내려다보며 보호막 밀도를 높였다.
왜 가짜 식물을 썼을까. 그건 아마도 유사시에 재배치가 가능하고 시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작전 지역 안으로 들어온 거야. 여긴 일종의 진지(陣地)고.’
일찍이 뒤를 밟혔거나 포위당했을 수도 있다.
정우가 만년필을 꽉 쥔 채 뒤를 돌아보자 정말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다.
촤륵, 촤르륵! 차락!
여태 숲의 일부라고 여기고 있던 관목들이 일제히 솟아오른 것이다.
“억!”
명일이 외마디 소리를 내는 동안 ‘그것’들이 일사불란하게 퇴로를 막았다. 백여 명의 군인. 언뜻 봐도 훈련이 잘된 자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웬만해선 조준점이 흐트러지지 않을 터.
‘이게 청와대 경호팀은 아닐 것 같고, 근처 군부대인가.’
정우는 투지 가득한 상대편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수도 방위 사령부의 일부 부대가 청와대의 경호 지원 중이란 소릴 들은 적이 있었다.
“청와대 경비대일 겁니다. 이건 그저 일부에 불과…….”
아니나 다를까, 명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맞은편에서 또 한 무리의 군인이 몰려나왔다. 이젠 전후방이 모두 막혀 버린 셈.
“어, 어쩌실 겁니까? 일단 제가 말해 볼까요?”
대체 뭘 말하겠다는 건가. 명일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줄도 모르고 마구 대사를 읊었다.
극도로 긴장한 상태이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수백 개의 총구가 자신을 겨누는 상황이었으니까. 그의 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정우의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총부터 쏘진 않는 걸 보니 당장 싸울 의향은 없나 본데요.”
언제나와 같이 침착한 정우의 음성.
물론 4만 개까지 치솟은 자신의 정수를 믿는 덕분이었다.
눈대중으로 셌을 때 지금 이쪽을 포위한 군인의 숫자는 대략 2백. 어디서 포탄이 날아들지 않는 이상 큰 위협은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길 피바다로 만들었다간 대통령이 또 도망가겠지.’
벙커의 위치부터 알아야 한다. 정우는 보호막으로 명일까지 감싸면서 군인 사이로 누군가 걸어 나오는 걸 봤다.
저벅, 저벅.
40대 중반의 강인해 보이는 사내.
다른 군인과 마찬가지로 나무 위장을 한 상태였지만 목소리만으로도 지휘관급이라는 게 느껴졌다.
“1회만 경고합니다. 지금부터 움직일 경우 즉시 발포하겠습니다. 신분과 용무를 밝히십시오.”
이에 정우가 상대방을 바라봤다.
아니, 정확히는 사내의 방탄모에 부착된 특수 카메라를 응시했다.
“대통령을 만나러 왔습니다. 전 1위 구원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