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62
62화. 압도적 화자 (2)
지잉.
방 천장에 붙은 스피커에서 특유의 기계음이 새어 나왔다. 통제실의 누군가가 마이크를 켰다는 의미다.
아마도 대책 회의까지 30분 남았음을 알리는 방송일 터.
“흠.”
동희는 침대에 누운 채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런데 현재 시각이 오후 3시 12분이었다.
“뭐야.”
회의까지 아직 38분이나 남아 있던 것이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동희가 상체를 일으키자 스피커 너머의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김동희 씨는 이 방송을 듣는 즉시 지하 3층 로비로 나와 주십시오. 긴급 상황입니다.」
“긴급……?”
산 밑에 박힌 이 벙커에서 긴급 상황이랄 게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동희는 저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닐 거란 걸 직감했다.
‘뭐, 뭐지? 괴물이 여기까지 왔나?’
침대를 짚은 양팔이 후들거린다. 하지만 대놓고 부르는데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잽싸게 침대를 빠져나와 신발을 챙겨 신고 출입문을 열었다.
촤르륵.
그러자 병원 복도를 연상케 하는 깔끔한 통로가 좌우로 나타났다.
여긴 이미 지하 3층. 오른쪽으로 쭉 걸어 나가면 로비다.
‘젠장…… 대체 무슨 일이지.’
여전히 목덜미를 짓누르는 불안감. 그러나 여긴 도망갈 데도 없었다.
게다가.
“동희 씨, 이쪽입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이미 복도 저편에서부터 정장 차림의 사내가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훤칠한 키에 의지 가득한 눈빛, 딱 봐도 엘리트 티가 나는 이 사내는 정부에서 동희에게 붙여 준 보좌관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흔들리는 동공으로 바라보고 있는 동희는 바로 정부 측의 구원자.
김동희, 24세, 대학생.
정부의 구원자 수배에 응한 사람은 여럿 있었지만 ‘픽업’에 성공해서 이곳까지 무사히 도착한 건 동희가 유일했다.
나머진 정부에서 보낸 헬기를 타러 가다 죽거나 픽업 장소를 정하기도 전에 연락이 두절됐다.
“무슨 일인데 이러는 거예요?”
동희가 걸음을 주저하며 겁에 질린 목소리를 내자 보좌관이 달려와 그의 팔을 붙들었다.
“본인이 구원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예? 예에? 어디예요?”
“지상층 출입구에서부터 106미터 지점입니다. 일단 가시죠.”
이 말을 끝으로 보좌관이 몸에 힘을 줬다. 이에 동희는 끌려가다시피 하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 * *
종합 상황실은 동희의 개인실과 같이 지하 3층에 있었다.
상황실 출입구는 큼지막한 철문 두 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전기가 끊길 경우를 고려해 수동문으로 제작된 상태였다.
이 때문에 보좌관이 어깨로 문을 밀치며 들어갈 때 그가 붙들고 있던 동희에게도 상당한 충격이 전해졌다.
쾅!
“억, 조심 좀요……!”
짜증이 난 동희가 몸부림치며 팔을 휘젓자 의외로 보좌관이 그를 바로 놔줬다.
동희의 정신이 번쩍 든 것도 이때였다.
로비를 지나올 때와 달리 공간감이 엄청나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헉.”
비로소 자신이 어디에 오게 됐는지 인지한 거다.
그의 눈앞엔 영화에서나 보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실내 한 면을 가득 채운 대형 화면과 그 앞에서 기기를 조작 중인 수많은 직원, 높이가 짐작도 안 되게 까마득한 천장 따위 말이다.
“김동희 씨 모셔 왔습니다.”
그새 보좌관이 깍듯한 말투로 보고했고, 이를 누군가 받았다.
“그래요, 고생 많았습니다.”
울림이 있을 정도로 굵은 음성. 동시에 익숙한 소리라는 생각이 든다.
“어……?”
동희가 멍한 얼굴로 바라본 곳엔 군청색 정장을 입은 중년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 대통령, 최성환이었다.
“어?”
동희의 두 눈이 크게 껌뻑인다. 믿기지 않았다. 이따금 텔레비전에서 보던 그 얼굴 그대로 대통령이 불과 십여 미터 앞에 서 있었다.
그가 입만 쩍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최성환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동희가 텔레비전에서 본 것과 달랐다. 상대는 활짝 웃고 있지 않았다. 아주 희미한 미소, 아니 쓴웃음에 가까웠다.
“…….”
동희의 얼굴이 굳자 대통령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먼 길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쉴 시간도 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너무 중요한 일입니다. 가감 없는 의견 부탁합니다.”
슥.
이어서 상황실의 대형 화면을 가리키는 최성환.
동희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리로 향했다.
화면에선 벙커 외부의 폐쇄 회로가 찍은 장면을 보여 주고 있었다.
“7분 전 상황입니다.”
대통령 곁에 있던 또 다른 사내가 짤막하게 브리핑했고, 바로 녹화본이 재생됐다.
화면 속엔 각각 흰 셔츠, 줄무늬 남방을 걸친 두 사내가 있었다.
남방을 입은 쪽이 갈림길의 이정표를 더듬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뒤편의 흰 셔츠 사내가 나무들을 향해 만년필을 뻗었다.
그러자.
“꺽!”
이를 보던 동희의 입에서 딸꾹질에 가까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폐쇄 회로가 현장음까지 잡아내진 못했지만 수십 그루의 나무가 일시에 지워지는 장면이 똑똑히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저 미친놈은?’
동희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조금 전 브리핑했던 남자가 손에 쥔 무언가를 조작하며 부연했다.
“이건 방금 보신 상황 발생 직후 현장에 접근한 8구역 경비대장의 개인 카메라 녹화본입니다. 6분 전 상황입니다.”
이와 함께 대형 화면의 시점이 1인칭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실내에 당시 현장음이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1회만 경고합니다. 지금부터 움직일 경우 즉시 발포하겠습니다. 신분과 용무를 밝히십시오.」
이건 카메라 주인인 8구역 경비대장의 음성.
그러자 경비대장과 대면하고 있던 흰 셔츠 차림의 사내가 이쪽을 응시하는 게 보였다.
정확히 카메라 렌즈를 쳐다보고 있어서, 상황실에선 그와 눈을 마주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그러더니 사내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대통령을 만나러 왔습니다. 전 1위 구원자입니다.」
“……!”
1위. 스피커에서 이 단어가 출력되자마자 동희가 움찔했다. 마치 엉덩이를 가시에라도 찔린 듯이.
뚝.
녹화본 재생은 여기에서 멈췄고, 곧 장내 모든 시선이 동희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동희 자신도 너무 잘 알았다.
문제를 입 밖으로 꺼내어 공론화한 건 이 나라의 통수권자인 최성환이었지만 말이다.
“김동희 씨, 본인이 정말 1위 구원자가 맞습니까?”
* * *
오후 3시 21분.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매미 울음은 마치 기계 시동음 같았다.
하지만 진짜 기계는 다름 아닌 코앞에 놓여 있었다.
퇴로를 막고 있던 군인들 뒤편으로 K4 유탄 기관총을 실은 군용 지프가 나타난 것이다.
‘저런 걸 어디에 숨겨 놨던 거지? 그럼 어쨌든 포격 같은 건 안 하겠다는 의미인가.’
정우가 재미있다는 듯이 지프를 바라보자 차량 근처의 군인들이 무거운 침을 삼켰다. 그러면서도 경계심 가득한 눈빛은 죽이지 않았다.
“그래도 총구가…… 하늘로 올라갔네요. 뭔가 진행 중인 것 같습니다.”
명일이 군인들을 슬쩍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전후방의 모든 군인이 총구를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곧 쏴 죽일 듯한 기세였는데 분위기가 확실히 바뀌었다.
그러나 군인들이 싸우길 두려워해서는 아닐 것이다. 분명 이 상황을 보고 있을 ‘윗선’에서 내린 지시일 터.
그리고 조금 지나자 정우와 처음 대면했던 경비대장이 부하들을 헤치며 다시 나타났다. 왼손에 무전기를 쥔 채였다.
“대통령이십니다. 강명일 기자와의 통화부터 원하십니다.”
“엇.”
청와대 출입 기자였던 양반이 웬 괴물을 대동하고 나타났으니 놀라긴 했을 것이다.
의외의 통화 지정에 명일이 어정쩡한 자세로 무전기를 받아 들었다.
“측면의 버튼을 누르면 통화가 개시됩니다.”
경비대장이 무전기 사용법을 일러 줬지만 명일은 바로 통화 버튼을 누르는 대신 정우를 잠시 쳐다봤다.
기자의 직감을 끌어다 쓰지 않아도 그냥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이건 큰 분기점일 게 분명했다. 자신이 대통령의 물음에 어떤 식으로 대답하느냐에 따라 향후 전개가 달라질 터.
물론 이 괴물을 피해 도망가라고 외칠 순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지금 와서는 오히려 궁금할 지경이었다. 앞으로 이 세상은 어떻게 굴러갈 것인가? 그러니 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계속 살아 있어야만 했다.
한편 정우는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네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겠다는 의미일까. 명일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틱.
이윽고 명일이 통화를 개시했다.
그러자 무전기에서 아주 작은 소음이 났다.
치익, 치익.
출력 음량을 작게 줄여 둔 것이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경비대장이 명일을 정우에게서 멀리 떨어뜨렸고, 곧 무전기 안쪽에서 중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강명일 기자님이십니까?
치익.
“아, 예. 백동일보의 강명일입니다.”
칙.
-반갑습니다. 대통령 최성환입니다. 참 여러모로 유감이지요. 본론부터 바로 말씀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치익.
“예, 그게 좋겠습니다.”
치직.
이에 조급한 어조의 누군가가 통화를 이어받았다.
-기자님, 안보실장 임송재입니다. 혹시 지금 인질로 잡힌 상태이신 건지.
칙.
“전혀 아닙니다.”
칙.
-혹시 다른 일행은 없습니까? 현재 파악하기로는 청사에도 두 분이 들르신 거로 아는데.
치직.
청와대 진입 장면부터 전부 봤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거길 장악하고 있던 각성자와의 전투도 모두 확인했다고 봐야 한다. 본관 쪽에 감시 카메라가 있었을 테니까.
“둘뿐입니다. 다 보셨으면 이야기 진행이 바로바로 되어야 할 텐데요. 의미가 없는 일들입니다, 이런 거.”
치익.
명일이 말한 ‘이런 거’란 통화로 간을 보거나 병력을 보내 포위하는 등의 행위를 뜻했다. 자존심 세울 때가 아니라는 소리.
“실장님, 계십니까?”
칙.
갑자기 정적이 이어지기에 이번엔 명일이 먼저 말을 걸었다. 그랬더니 대번에 상대의 말투가 고압적으로 바뀌었다.
-지금 스탠스가 좀 이상하십니다?
짧은 대사였지만 저변에 진노가 자글자글한 게 느껴진다. 일개 기자가 훈수하듯 말하는 게 괘씸하다는 거다.
아무리 그래도 1위 구원자가 코앞에 와 있다는데 제정신인가. 명일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애써 안면 근육을 풀었다.
“제가 말실수를 좀 했습니다. 워낙 긴장했다 보니…….”
다음엔 길을 순순히 열어 줘야 하는 이유에 대해 덧붙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다른 방법이 생각났습니다.”
어느새 다가온 정우의 동공이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당황한 명일이 무슨 의미냐고 되묻기도 전에 사방의 군인들이 총구를 겨눴다. 무슨 명령이 떨어져서 그런 게 아니었다. 단지 정우가 무서워서였다.
그리고 모두가 우려하던 그 일이 벌어졌다.
슥.
만년필을 쥔 정우의 팔이 허공으로 올라간 것이다.
조준 대상은 K4를 실은 군용 지프.
하지만 그가 나무들을 지워 버리던 장면만 떠올려 봐도 단순히 지프만 사라지진 않을 거란 걸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 자, 잠시!”
마침 지프 근처에 서 있던 경비대장이 질겁하며 뛰쳐나왔다. 심지어 그의 소총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상태.
팍!
길을 헤매던 총구가 마찰음을 내며 바닥에 누웠고, 때를 같이해 정우가 정수를 품었다.
파아앗!
푸른빛이 백여 명의 군인과 지프를 한꺼번에 휘감는다.
경비대장이 머리에 쓰고 있던 카메라를 통해 북악산 어딘가에 있을 벙커 안에도 이 빛이 전해지고 있을 터였다.
푸아아악!
이어서 들려온, 살점이 파열하는 소리.
이 소리와 함께 현장 병력의 반이 사라졌다. 그래도 조금 전까지 이곳에 사람들이 있었노라고, 수백 개의 발목이 알려 주고 있었다.
“으, 으악!”
“아아아!”
전우들이 지워지는 걸 본 나머지 군인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더러는 정우를 향해 총을 쏘기도 했으나 대부분이 소리를 지르며 뒤로 돌았다. 그러더니 가짜 관목들을 헤치며 어딘가로 뛰었다.
탈주 방향도 마찬가지로 두 가지 정도로 갈렸지만 대다수가 북서쪽으로 달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걸 본 정우가 명일을 향해 이야기했다.
“저쪽에 벙커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병력도 좀 더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