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64
64화. 압도적 화자(4)
출입구에서 내려다본 대회의실은 거대한 깔때기 같았다.
계단식으로 배치된 수백 개의 좌석이 거대한 원을 그리며 둘러져 있었고, 그 중앙에 의장석과 질의석, 증인석 등이 놓인 게 보였다.
장내엔 천 명 가까이 되는 사람이 모여 있었는데, 의외로 정우에게 시선을 주는 이가 많지 않았다.
처음엔 의아했지만 곧 이어진 중성의 설명을 듣자 납득이 됐다.
“이곳의 대다수가 조금 전 바깥에서 벌어진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오늘 회의에 1위 구원자가 오는 줄로만 압니다.”
그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 그 구원자는 이미 저기에 와 있습니다.”
“……?”
정우가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짓자 중성이 손을 들어서 저 멀리 보이는 회의실 중앙부를 가리켰다.
그곳엔 아까 봤다시피 국회처럼 꾸려진 좌석과 그 위에 자리 잡고 앉은 사람들이 있었다.
개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의장석에 앉은 인물.
‘최성환?’
정우의 동공이 커진다. 다름 아닌 대통령이었으니까. 하지만 대통령이 자칭 1위 구원자일 리는 없지 않은가.
이내 정우의 시선이 그 옆으로 옮겨 갔다.
그러자 창백한 얼굴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청년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 저 사람입니까.”
정우의 말에 중성이 고개를 끄덕였고, 명일도 얼른 그리로 고개를 돌렸다.
“저 애가 1위 구원자라고요?”
‘저 애’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앳된 인상. 자신감 없는 표정과 위축된 자세는 덤이다. 1위 구원자는 고사하고 대통령 옆자리조차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저희로선 검증할 방법이 없으니 믿을 수밖에요. 타인의 정수량을 읽어 내는 것까진 확인을 마쳤습니다.”
중성의 말에 명일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도 구원자였지만 정부에 이를 밝히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 그럼 구원자가 맞겠지만 1위까진 아닐 겁니다.”
정우는 이 말을 하면서 멀찍이 보이는 ‘가짜 1위’와 시선을 맞댔다.
왜 뻔히 들킬 거짓말을 했는가? 정우가 눈으로 이렇게 묻자 녀석이 대번에 고개를 떨궜다.
다만 회의실 중앙까지의 거리가 꽤 돼서 아직 정수량을 읽어 낼 순 없었다.
‘그럼 아까 헬기가 싣고 가던 게 저 녀석이었나.’
정우는 비로소 전후 사정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자신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정부는 희망에 차 있던 것이다. 1위 구원자를 찾아냈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심지어 구원자가 꽤 호의적으로 굴기까지 하고.
‘그런데 내가 나타나서 초를 친 거군.’
당연하지만 미안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과정이 어땠든 결국 원하던 대로 ‘진짜’ 1위 구원자를 만나게 되지 않았는가.
슥.
정우가 예고 없이 회의실 안쪽으로 발을 내딛자 깜짝 놀란 중성이 얼른 앞장섰다.
그리고 이를 본 대통령 최성환이 의장석의 법봉을 두들기며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탕, 탕.
“정숙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귀빈을 모셨습니다.”
대통령조차 정우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귀빈이라고만 지칭했다.
이에 수백 개의 시선이 일제히 정우와 명일 쪽으로 홱 돌아갔다.
“누구야?”
“그냥 평범하게 생겼는데.”
“누가 귀빈이라는 거예요?”
사방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반면 정우가 누군지 아는 정부 인사들은 사색이 돼서 그가 걸어 내려오는 모습을 지켜봤다.
저벅, 저벅.
대량 학살 현행범이 객석 사이를 가로지르는데도 단 한 명의 경호원조차 붙지 않았다. 저항하는 게 무의미하다는 걸 앞서 배운 것이다.
겉보기엔 그저 한 사내가 정부의 초대를 받은 것에 불과했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이건 문명의 체계와 상식이 훼손되고 있는 광경이었다.
“…….”
묵묵히 정우의 뒤를 따르던 명일은 문득 개미를 떠올렸다.
인간이 재미 삼아 밟아 죽이기도 하고 도시를 통째로 박살 내기도 하던 개미들 말이다.
일방적, 불가항력, 종(種)이 세대를 거듭해 쌓아 온 모든 것을 동원해도 막아 낼 수 없는 어떤 것. 개미들에게 인간이란 저런 존재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젠 인간에게도 그런 존재가 생겼다. 눈앞의 구원자를 포함해 진입로에서 기어 나온, 또 앞으로 나올 것들까지.
탁.
이윽고 정우가 회의실 중앙부에 깔린 카펫을 밟았다.
그러자 의장석에 앉아서 그쪽을 내려다보고 있던 최성환이 턱 근육을 실룩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정우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버선발로 마중 나온다고 하던가. 딱 그 꼴이었다.
“……!”
사방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수백의 관중이 깜짝 놀랐음은 당연하다.
몇몇은 불쾌감을 여실히 드러냈다. 다들 전직 고위 관료거나 현직 정부 인사들의 친인척이었으니까.
그러나 최성환은 이런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우 앞에서 허리를 깍듯이 숙이기까지 했다.
“환영합니다. 대통령, 최성환입니다.”
과연 진심일까. 정우는 꼼꼼히 염색된 대통령의 정수리를 빤히 바라봤다.
슥.
허리를 도로 일으킨 최성환이 옷매무새를 고치며 활짝 웃어 보였다.
제발 잘 봐 달라며 사정해 오고 있는 것이다.
이때만큼은 정우도 화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 고생 많으십니다.”
“감사합니다.”
최성환은 일국의 책임자로 잘 훈련된 인물이었다. 단 한 번도 같은 형태의 미소를 짓지 않았고, 안면 근육을 자연스럽게 잘 사용했다.
하지만 인간인 이상 어쩔 도리가 없는 부분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눈이었다.
정우는 쉼 없이 흔들리는 최성환의 동공 안에서 시커먼 공포를 봤다.
최선을 다해 가려 두긴 했지만 그 거대한 실루엣을 완전히 감출 순 없었던 거다.
“사람이 많네요. 이렇게 많이 모인 건 처음 봅니다.”
정우가 주변을 둘러보며 나지막하게 이야기하자 최성환의 발성이 흐트러졌다.
“더 많이 구했어야 하지만…….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우는 이 말을 믿지 않았다. 여력이 없던 게 아니라 애초에 모두를 구할 의지가 없던 것일 터.
그래도 이만한 인원을 한데 모으려면 어제부터 부지런히 움직였어야 할 것이다. 즉, 일찍이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최후의 국민’을 미리 골라놓은 셈.
그런데 기껏 고른 게 겨우 친인척이라니……. 머리로 이해는 되지만 실망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정우는 긴 한숨을 코로 뱉으며 최성환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제 뭘 할 생각이셨습니까? 사람을 이렇게 다 모아 놓고.”
“그것이…….”
이번엔 대통령의 시선이 부의장석에 앉아 있는 또 다른 구원자, 김동희에게 향했다.
녀석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는데, 이 점이 최성환의 마지막 희망을 놓게 만들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녀석이 ‘진짜’였으면 했던 것이다.
그러나 몇 마디 안 되는 정우의 대사가 그를 현실에 처박았다.
“저 사람을 데리고 뭘 하려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순위권 흉내를 내기엔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정우가 확인한 동희의 정수 총량은 2,663개.
오랜만에 보는 천 단위 구원자긴 했다.
몇 위쯤 될까? 본인도 웬만해선 상위권 구원자와 마주치지 않을 거로 생각했을 터. 그러니 정부를 상대로 1위를 자처한 게 아니겠는가.
“……정말입니까?”
성환이 믿고 싶지 않다는 듯 되묻는다.
그리고 이건 이런 의미이기도 했다. 그럼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수백 명을 도륙하던 네가 정말 1위 구원자란 말이냐……?
“…….”
정우는 부연하는 대신 동희를 물끄러미 봤다.
놈은 곧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제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다.
그 역시 정우의 정수 총량을 확인한 탓이다.
41,643개.
대체 무슨 짓을 해야 이틀이 채 지나기도 전에 4만 개를 모을 수 있는가.
‘저건 진짜 1위다.’
동희는 시야가 흐려지는 걸 느끼며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노력했다.
저만한 괴물 앞에선 어떤 방식으로도 도망갈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자신도 여태 죽여 온 사람들 앞에선 압도적인 괴물이었으니까.
자연스레 두 구원자의 서열이 정리되는 사이 장내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회의실이 워낙 넓은 탓이었다.
좌석에 앉아 대기 중이던 사람들은 정우와 대통령이 나누는 이야길 들을 수 없었고, 이에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한 거다.
“뭐야, 아까부터?”
“회의는 언제 시작합니까.”
“자기들끼리 무슨 이야길 저렇게 하는 거야.”
이건 회의실에 정확히 어떤 존재가 와 있는지 모른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이들에게 구원자란 단어 그대로의 의미에 불과했으니까. 그저 사람들을 구하는 게 목적인 줄로만 아는 것이다.
이에 정우가 성환에게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진행하세요. 대책 회의라는 거,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하네요.”
그러자 성환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현재 시각 오후 3시 58분. 그는 잽싸게 손목시계를 확인한 뒤 근처 단상으로 가서 마이크를 켰다.
지잉.
특유의 기계음이 대회의실 허공에 울려 퍼졌고, 곧 대통령의 음성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구원자들께서 모두 도착하셨기 때문에 바로 대책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이 멘트가 끝나기 무섭게 어딘가에서 정장 차림의 직원들이 거대한 U형 데스크를 끌어왔다.
수 초 사이에 데스크 외곽을 따라 11개의 의자가 배치됐고, 12시 방향의 벽면이 갈라지면서 초대형 화면이 나타났다.
“두 분, 이쪽으로 오시죠. 따로 자리를 마련해 놨습니다.”
외교부 차관보 김중성의 목소리다. 정우와 명일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적갈색 가죽 소파와 소형 식탁이 눈에 들어왔다.
소파 옆엔 김중성 외에도 정장을 입은 젊은 남녀가 하나씩 서 있었는데, 일종의 수행원인 것 같았다.
“뭔가 정부 쪽에서도 준비를 많이 해 둔 느낌이군요.”
명일이 귓속말하듯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고, 정우도 거기엔 동의했다.
정부가 구원자 수배령을 내린 것이 벌써 26시간 전이다. 최소한 저 때부터는 정부도 이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의미가 된다.
오늘 아침에 방송됐던 강원도의 진입로 봉쇄 작전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물론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하루 만에 그런 걸 시도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야 해.’
그 이상의 무언가. 그런 게 정말 있긴 할까?
이건 인간 차원의 문제 해결 방식으로 될 일이 아니다. 아마 핵을 떨어뜨려도 진입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정우는 소파로 걸어가면서 장내를 다시 둘러봤다. U형 데스크에 ‘높으신 분’들이 하나씩 자리를 잡고 있었다. 데스크 위엔 언제 가져다 놨는지 자료 파일이 수북했는데, 몇몇은 사진첩처럼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정우가 소파에 다다르자 수행원으로 보이던 사내가 물어 왔다.
“물과 국화차, 커피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떤 것으로 드시겠습니까?”
“……?”
이 말을 듣고 나서야 정우의 시선이 소파 옆의 식탁에 닿았다. 식탁 위엔 고급 찻잔과 티스푼이 세팅되어 있었다.
“아.”
새파랗게 날이 서 있던 그의 얼굴에 사람다운 기운이 슬쩍 지나갔다.
문득 생각나서였다.
언젠가 또 이런 물음을 받게 될 날이 올까? 하는 생각.
지구 폐쇄까지 앞으로 약 41일.
만에 하나 지구 존속에 성공하더라도, 누군가 차를 권해 오는 순간이 다시 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면 정말로 많은 것이 사라진 뒤일 테니까.
“음.”
혹여 독이 들었을까, 잠시 염려하던 정우는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국화차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