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66
66화. 압도적 화자(6)
대성 그룹.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는지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대성……? 대성전자 말이야?”
“대성이 뭘?”
“무슨 소리지, 저게.”
군대도 힘을 못 쓰는 판에 일개 사기업에 무슨 도움을 받겠는가. 사람들이 의문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정우만큼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일단 살고 보겠다는 건가.’
실소가 절로 나온다.
알다시피 대성 그룹은 현재 놀라울 정도로 진보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일찍이 각성자들을 기용해 강남역 일대를 통제하고 구원자들을 찾아 나서지 않았던가.
현실을 받아들여야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이들 역시 어디까지나 살인자라는 점.
서울 수복을 도와주겠다고 나설 정도의 힘이 과연 어디에서 나왔을까? 언젠가 그 힘이 정부의 목마저 조르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당신들이 그걸 모를 리는 없고. 하지만 선택권이 없었겠지.’
정우는 날카로운 눈으로 단상 위의 대통령을 응시했다.
힘없는 정부의 수장. 자생력을 완전히 잃은 탓에 목숨을 부지할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들일 각오가 되어 있다.
폐쇄 회로 앞에서 수백의 군인을 죽인 정우가 이 자리에 와 있다는 것 자체가 그 방증이었다.
“기탄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통령 최성환이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리모컨을 다시 조작했다.
틱.
그러자 어느 도심지의 폐쇄 회로 녹화본이 재생됐다.
아까와 달리 소리가 출력되진 않았지만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대형 마트 앞에서 수십 명의 사람이 무기를 든 채 대치 중이었기 때문이다.
야구 방망이, 식칼, 망치…… 각자 집을 나설 때부터 무력 충돌을 예상했던 것 같다.
화면 속 사람 중 반은 마트 안에서 물건을 챙겨 나오는 중이었고, 나머지 반은 뒤늦게 도착해 진입을 시도하려던 참이었다.
아마도 늦게 온 쪽이 물건을 두고 가라고 으름장을 놓는 중인 듯.
그러더니.
팟.
뒤쪽에서 뭔가가 번쩍했다.
“어어……?”
“헉!”
이를 보고 다시 술렁이는 장내.
눈 깜짝할 사이에 화면의 사람이 반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다음엔 화면 바깥에서부터 어떤 사내가 카트를 끌며 나타났다.
그러곤 여전히 마트 안쪽에 우두커니 선 사람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파동 방출.
소멸.
“…….”
멍하니 화면을 보던 정우가 뜨끔한 표정을 짓는다.
어제 아침, 혼자 마트를 다녀왔다던 아버지의 모습을 엿본 것 같아서였다.
비슷한 일이 사방에서 벌어지고 있던 거다.
그사이 대통령이 목을 가다듬으며 다음 멘트를 시작했다.
“방금 보신 것이 일명 각성자……. 정수라는 힘을 사용하기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슥.
화면이 흐릿해지더니 다시 대성 그룹 로고가 떠올랐다.
“현재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가 각성자들에 의해 점거된 상태이나 이를 되찾을 방법이 없는 상황입니다. 물론 여전히 몇 가지 옵션이 있습니다만…….”
서울 근교에 병력이 대기 중이고 도심지에 대한 폭격도 아직 가능한 상태라고, 대통령이 덧붙인다.
정우로선 저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었으나 일단 잠자코 들었다.
“그러던 차에 대성 그룹에서 먼저 연락을 해 왔습니다.”
말을 길게 할 필요가 없다는 듯 대통령이 리모컨을 조작했다.
틱.
동시에 회의실 분위기가 또 바뀌었다.
화면에 나타난 게 다름 아닌 대성 측 제안서였으니까.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1. 각성자로 이루어진 요원을 다수 보유 중이다.
2. 이를 이용해 현재 서울 일부 지역을 잘 통제하고 있다.
3. 대성은 정부를 지지한다. 체계가 더 무너지기 전에 행동할 것을 권한다.
그러자 대번에 여러 반응이 터져 나왔다.
“싸가지 없는 자식들.”
“지지한다…… 라고?”
기성 사회의 원로에 속하는 퇴직 공무원들은 하나같이 불쾌감을 표했다.
정부에 의해 특별히 구조된 사람들이니만큼 소싯적엔 꽤 높은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반응이었다.
반면 현직 공무원의 가족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다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아까는 살인자들을 더는 국민으로 볼 수 없다면서요? 대성도 같은 잣대로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일까요?”
“이리를 쫓아내자고 범을 부르는 꼴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와중에 명일이 옆자리의 정우를 슬그머니 쳐다봤다.
이 사내야말로 진짜 ‘범’이지 않은가. 이미 북악산 경비대를 작살냈고 조만간 대통령을 비롯한 이곳 모두를 죽이려 들 거다. 정수를 계속 모으는 게 최선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 제안에 대해서.”
명일이 아주 작은 소리로 묻자 정우가 화면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로 입술만 움직였다.
“지금 정부 입장에선 저런 제안이 들어온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대사를 읊는 정우의 음성이 무척 건조하다.
그는 심지어 대성이 상황을 만만하게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저들이 정부를 구제하려는 이유는 단 하나일 것이다.
정통성 내지는 명분을 가지기 위해서.
이 모든 혼란이 가라앉은 뒤 국가가 재건될 때 주도권을 쥐겠다는 거다.
과연 대기업답게 시야가 넓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정작 코앞의 문제는 보지 못한 게 아닐까. 앞으로 40일 뒤면 지구가 통째로 사라져.’
너무 많은 걸 챙기려다간 도리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지구가 방주에 탑승 제한을 둔 이유가 다 있지 않겠는가.
놈은 인류의 시원부터 지금까지를 쭉 지켜봐 온 존재다. 영악한 인간조차도 앞으로 극소수 말곤 전부 사라지리란 걸 넌지시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정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슥.
정수량을 점검하기 위해 의식을 긴장시키자 머릿속에 한 줄의 숫자가 떠오른다.
41,643개.
그리고 이 자리의 모두를 죽여서 얻을 수 있는 정수량은…….
‘대략 5천 개.’
저 멀리서 이쪽을 힐끔대고 있는 ‘가짜 1위’를 포함한 양이다.
회의실 외곽에 진을 치고 있던 경호원들과 북악산 일대의 남은 병력까지 전부 정리하면 수입이 좀 더 늘어나긴 할 거다.
그가 이런저런 계산을 하는 동안 장내에선 대성의 제안을 두고 고성을 주고받았다.
제안 수락 여부를 다수결로 정하겠다는 대통령의 발언 때문이었다.
“이 중요한 문제를 다수결로 정한다고?”
“아니, 시급한 일이라잖아요. 그럼 다수결 말고 다른 방법이 있나.”
“우리가 정확히 무슨 결정을 내리는 건지 알 수 없지 않습니까. 대성 측에서 협력의 대가로 뭘 원하는 건지도 아직 모르고.”
서서히 부정적인 여론이 일어나려고 하자 이재형 총리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반드시 참고하셔야 하는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곳 제2 대책실의 최대 수용 인원은 700명입니다.”
그리고 지금 들어와 있는 인원은 경호팀을 포함해 1,600명가량 된다는 것이 총리의 설명.
“모든 물자가 부족한 상태입니다. 확보해 둔 식량이 현재 인원 기준으로 열흘 분량이므로 이 안에서 계속 있을 수는 없습니다.”
실은 1,600명이 나눠 먹어도 한 달 이상 버틸 수 있는 식량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시국에 열흘이나 한 달이나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총리는 거짓말을 했다. 어쨌든 결국 문밖으로 나가야 하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이에 대통령이 마이크를 넘겨받고 말을 이었다.
“약 1시간 뒤 대성 그룹에서 사람을 보내오기로 했습니다. 인원 점검 및 이송 방법 논의를 위해 오는 겁니다. 임시 청사와 충분한 식량을 준비해 놨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전에 제안 수락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논지였다.
그러곤 마지막 대사로 쐐기를 박았다.
“여기에 남길 원하시는 분이 있다면 의사를 존중해 드리겠습니다. 식량을 포함한 생활 물자도 모두 놓고 갈 것입니다.”
그러자 점차 잦아들던 웅성거림이 완전히 멎었다.
대성이 현 정부의 후원자로 이미 내정되어 있음을 깨달은 거다.
아까는 서울 외곽에 군대가 있다면서요? 같은 소리가 조금씩 흘러나오긴 했지만 그것도 곧 사라졌다.
슥.
대통령이 손을 들어 신호하자 회의실 구석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직원들이 투표용지가 담긴 상자를 하나씩 들고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정우에게도 투표용지가 전달됐는데, 막상 보니 제대로 된 양식이 갖춰져 있지도 않았다.
휴대폰만 한 흰 종이에 ‘찬성 또는 반대를 적어 주십시오.’라고 적혀 있을 뿐이었다.
“이게 무슨 반장 선거도 아니고…….”
명일도 용지를 보고선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 모두가 조잡하고 엉성하게만 느껴졌다. 이게 정말 이 나라를 끌고 오던 정부가 진행 중인 게 맞나 싶을 정도다.
‘나도 뭘 기대하고 왔는지 잊었네.’
정우는 투표용지를 주머니에 쑤셔 넣은 채 아까 받았던 자료 파일을 한 장씩 넘겼다.
앞서 봤던 시국 선언문과 서울 행정 구역도, 지역별 현황 등을 지나가자 비로소 자료라고 할 만한 것들이 나타났다.
지원 요청이 가능한 주요 군부대의 위치, 핫라인 번호, ‘분리’라고 적힌 표식이 붙은 일부 지자체 목록.
“분리.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정우가 뒤편의 김중성을 향해 파일을 들이밀며 묻자 그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그게…….”
배포용 자료에 포함시켜 두고도 명쾌히 설명해 주지 못할 정도의 일이란 말인가.
정우가 중성의 눈을 빤히 바라보니 그제야 대답이 나왔다.
“일부 지역이 정부와의 한시적 분리를 선언했습니다.”
한시적 분리. 쉽게 말해서 정부가 이 사태를 제시간 안에 처리할 수 없을 것 같으니 당분간은 지자체가 알아서 하겠다는 거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
‘설마 시장이 구원자라도 됐단 말인가.’
나라가 개판이다.
뭐, 일개 시민이 공권력을 박살 낼 수 있게 된 시점부터 예견된 일이라고 봐야 할 거다.
스륵.
자료를 몇 장 더 넘기자 부처별로 작성해서 올린 상황보고서와 ‘플랜B’들이 등장했다. 사태가 최악까지 치달았을 때 정부가 해야 하는 일들을 각 부처의 관점에 따라 정리해 둔 것이었다.
기획 재정부로 시작해서 국방부, 법무부, 보건 복지부, 심지어 문화 체육 관광부까지 실무자가 생존 중인 부처는 전부 보고서를 올렸다.
그러나 하나같이 피상적이고 비슷비슷한 주장뿐 정우의 흥미를 끄는 보고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스륵, 스륵.
그러다가.
슥.
서류를 넘기던 정우의 손이 멈췄다.
이에 명일도 슬그머니 그의 곁으로 다가와 정우의 시선을 따라갔다.
「위기 대책: 외교부」
짤막한 타이틀. 대신 본문의 첫 문장이 아주 도발적이었다. 우리는 완벽히 고립됐습니다, 라고. 그런데 뉘앙스가 눈에 익다.
“…….”
정우가 슬쩍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차관보께서 직접 쓰신 거지요?”
아까 김중성이 정우에게 직접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 정부는 온전히 외톨이라고.
이 보고서의 필자와 완전히 일치하는 논조였다.
“……그렇습니다. 아직까지는 지구상 그 어느 나라도 현 사태를 주도하고 있지 못합니다. 이건 단순한 내란이 아니니까요. 최악을 상정하고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지구상.
정우는 중성이 ‘전 세계’란 단어 대신 ‘지구상’이란 표현을 골랐단 사실에 내심 놀랐다.
이 사내가 쓴 보고서의 내용도 적잖이 파격적이었고 말이다.
적어도 보고서상에선 정부의 붕괴와 새로운 권력 집단의 부상을 예견하고 있었다.
또한 식량난에 대해서도 엄중히 경고했고 말이다.
전국의 모든 유통 인프라가 소멸했기에 이 일이 모두 끝나더라도 사람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을 거란 견해였다.
대성과 모종의 협약을 맺은 것도 이러한 관점이 채택된 결과물일 터.
스륵, 슥.
중성의 보고서를 천천히 넘기던 정우가 마침내 파일을 닫았다.
그러곤 상체를 옆으로 완전히 돌려서 외교부 차관보를 똑바로 쳐다봤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만약 이 안에서 두 명만 살려서 데리고 나가야 한다면 누굴 골라야겠습니까?”
그러자 중성의 눈가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그렇다고 ‘예……?’ 같은 무력한 답은 내뱉지 않았다.
일찍이 직감적으로 알았으니까. 이 남자가 나라를 구하러 온 건 아니라는 거. 만약 이 사람이 정부가 기다리던 ‘구원자’였다면 군인들을 죽이는 짓 따윈 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이런 유형의 질문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왜 바로 실력 행사를 하지 않고 질문부터 던졌을까?
이 안에서 살려 보낼 둘을 골라보라니. 정부의 무능을 탓하는 일종의 빈정거림인가? 아니면…….
후욱.
중성이 숨을 크게 들이쉬자 입가의 주름이 잘게 쪼개졌다.
장내엔 천 명 가까이 되는 사람이 각자 신중한 얼굴을 하고서 투표용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실상 결과가 정해져 있건만 그래도 선택 과정만큼은 공을 들이고 싶어 하는 거다.
천 명 중 두 사람이면 0.2%다.
결국 중성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보고서를 썼을 때처럼 최악을 상정하고 생각해 보기 위해서였다.
“음.”
침음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목을 가다듬는다. 다음엔 힘겹게 혀를 움직였다.
“앞으로 어딜 가실지는 모르겠으나 가장 쓸모가 있는 사람을 데려가십시오.”
이를 들은 정우가 다시 물었다.
“정확히 예를 든다면?”
혹시 ‘대통령’ 같은 답이 나올까? 그렇다 해도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납득할 의향은 있었다.
그러나 외교부 차관보 김중성의 입에선 전혀 다른, 무시무시한 대답이 나왔다.
“살아나갈 수 있는 두 자리를 놓고 경매를 붙이는 겁니다. 그럼 예상치도 못한 콜이 나올 수 있고……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보단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이 말에 도리어 정우의 동공이 커졌다.
“진심입니까?”
“자신조차 뭘 원하는지 정확히 모를 때 최선의 선택지를 뽑는 방법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