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70
70화. 1세대(3)
오후 4시 55분.
서울시 동작구의 상도역 사거리.
한 사내가 대로 중앙에 서서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더는 갈 데가 없어서였다. 아니, 정확히는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어딜 가도 비슷비슷한 일뿐이었으니까.
길에서 마주친 사람 중 열에 아홉은 이쪽을 공격하려 들었고, 그나마 선공을 해 오지 않던 남은 하나는 ‘포식자’란 문구를 보고서 도망가기 바빴다.
초원의 사자가 된 기분이었다.
“…….”
저 멀리 약국이 보였지만 가 볼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일찍이 털렸을 게 뻔하니까.
병원, 약국, 편의점, 마트. 여태 생활 거점을 수십 군데 들렀지만 약탈자들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은 단 하나도 없었다.
어제 아침의 자신이 그랬듯 남들도 그 일이 터지자마자 인근 거점부터 들렀던 거다.
갑자기 담배가 당긴다.
허리에 두른 벨트 백을 뒤져 담뱃갑을 꺼냈으나 몇 분 전 태웠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아.”
짜증이 살짝 섞인 외마디.
담배도 술도 없으면 남은 시간을 뭘 하며 보낸단 말인가.
물론 지구인지 뭔지가 일러준 ‘임무’가 있긴 했다.
시야 구석에 자리를 잡은 채 도통 사라질 줄 모르는 지시문.
-구원자를 찾아 그를 돕거나, 역할을 빼앗아 직접 구원의 길을 걸으십시오.
이미 세상을 개판으로 만들어 놨으면서 뭘 어쩌란 말이냐.
사내는 명령조의 저 문구를 의식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가 만나 본 구원자라곤 단 하나, 자신의 아들 박정우뿐이었으니까.
“흠.”
어쨌든 대로변에서 계속 이러고 있을 순 없다. 정처 없이 걷는 것보다도 더 따분한 일이 가만히 서 있는 거다.
일단 어디로든 움직이고, 중간에 시비를 걸어오는 놈들이 있거든 담배를 꼭 빼앗자고 다짐했다.
슥.
배낭의 측면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 펴자 목적지 후보가 대충 추려졌다.
여기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노량진.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면 한강 대교를 건너 용산으로 갈 수 있다.
서쪽은 보라매, 신대방 방향. 저리로 계속 나아가면 인천으로 넘어가게 된다.
마지막 선택지는 동쪽인데…….
‘기분 탓인가. 계속 번지는 느낌이야.’
사내, 민구의 시선이 동쪽 하늘로 향한다.
동쪽에선 누가 봐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형 화재가 난 것처럼 허공에 시커먼 무언가가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긴 흑석동과 국립 현충원이 있는 곳이다.
그 진입로란 게 현충원에 자리를 잡고 점점 커지는 중인 걸까?
이 세상이 망한다 해도 큰 미련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불구덩이에 뛰어들고 싶진 않았다.
일단 담배부터 얻어 피자. 민구는 헛헛한 느낌에 입맛을 다시며 북쪽을 향해 발을 뗐다.
아무래도 노량진에 사람과 물자가 많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의 발이 제자리에 멈추고 말았다.
“엉……?”
비슷비슷한 일들이 싫다고 투덜거려서일까. 눈을 의심케 하는 광경이 저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어떡해? 앞뒤로 포위해야 하나?”
“진짜 할 거야?”
“야, 야. 비켜보라고.”
젊은 목소리의 세 남자.
뒤통수의 윤곽만 봐도 20대 중후반이라는 게 느껴졌다. 생기가 흘러넘친다.
반면 올해로 64세인 박민구는 활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비단 나이 때문만은 아니다. 그간 너무 고된 세월을 살아온 탓에 지쳤다. 더는 분노하고 싶지 않았다.
따라서 상대가 이쪽을 해치려 들지 않는 이상 조용히 갈 길 가는 것이 그의 암묵적 룰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예외다. 도저히 참견하지 않곤 못 배길 상황이었다.
크르릉……!
청년들이 포위하니 마니 하고 있는 대상이 다름 아닌 호랑이였기 때문이다.
덩치가 어마어마한 성체였다. 몸길이가 못해도 3미터.
‘이게 생시인가.’
민구는 우두커니 서서 눈을 몇 번이고 껌뻑거렸다.
십여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오른다.
그분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넙죽 절을 올렸을 거다. 호랑이를 정녕 산신령이라고 믿던 분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동물원이란 데를 보여 주지 않았다.
카릉!
호랑이가 또 성난 소리를 내자 사내들이 본능적으로 움찔했다. 그러더니 저들끼리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어우.”
“아이, 깜짝 놀랐네.”
“너 이 새끼, 오줌 지린 거 아니지?”
아무리 세상이 무법천지가 됐어도 그건 사람 세상의 일이다. 호랑이처럼 전혀 다른 종의 강자 앞에선 조심스러워지는 게 당연한 일.
그러나 이 사내들에겐 위축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정수를 얼마나 가지고 있는데 저러지?’
이제 막 문제의 광경 속으로 뛰어들려던 민구가 멈칫했다.
상대의 정수량을 걱정하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까진 그런 걸 고려해 볼 틈도 없이 싸움이 시작되기도 했고, 실제로 맞수라고 할 만한 상대도 없었다.
현재 민구가 보유한 정수는 총 5,320개.
그럼 상대는 몇 개나 들고 있을까. 심지어 셋이다.
눈만 마주치면 서로 죽이려 드는 이 세상에서 상대의 전력을 알 수 없다는 게 얼마나 두려운 건지 뒤늦게 깨달았다.
‘제길.’
잃은 줄 알았던 활기에 불씨가 돋는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심장을 두드렸고, 민구는 다시 고민했다.
어쩔까. 지금이라면 슬그머니 현장을 뜰 수 있긴 하다.
하지만 변수는 전혀 다른 데에 있었다.
* 도와줘.
무전기를 통해 듣는 소리처럼 무언가에 한 번 걸러진 듯한 음성.
사태를 파악 못한 민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자 저 앞쪽의 호랑이가 크게 울부짖었다.
캬르릉!
동시에 분명히 ‘인간적인’ 언어가 민구의 머릿속에 주입됐다.
* 도와줘!
“뭐……?”
비로소 민구의 시선이 소리와 의미의 발원지인 호랑이에게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놈이 정말로 이쪽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호랑이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해 온 거다.
그리고.
“어? 뭐야, 저 아저씨는.”
“아, 씨발. 이번엔 진짜 지릴 뻔했다.”
“언제부터 저기 있던 거냐.”
호랑이와 대치 중이던 사내들 역시 민구를 발견하고 말았다.
“…….”
삽시간에 네 개나 되는 시선을 받게 된 민구.
뭐, 여태 한두 명 죽여 본 것도 아니고…… 이쯤이면 그냥 싸워야 한다.
‘까짓거, 여기서 뒈지면 그게 내 팔자겠지.’
민구는 사내들의 눈에 살기가 어리는 걸 보면서 전투 준비를 했다.
그러자 호랑이가 아까보단 수그러진 울음을 뱉었다.
* 너. 강하다.
* * *
명일이 마지막 담배에 막 불을 붙였을 때였다.
철컥.
갑자기 문고리가 돌아가더니 철문이 왈칵 열렸다.
“헉!”
깜짝 놀란 명일이 담배를 떨어뜨렸고,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꼬던 중성은 잽싸게 기립했다.
이 와중에 가장 극적인 반응을 보인 건 역시 태휘였다. 근처 의자를 던질 듯이 들어 올렸으니까.
그러나 문간으로 나타난 게 박정우란 걸 확인하고선 의자를 도로 내려놨다.
“흐음.”
이를 발견한 중성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걸린다.
하지만 정우는 그리로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문을 마저 젖히면서 밖으로 나오란 시늉을 할 뿐.
“어떻게 됐습니까……?”
복도로 나간 명일이 조심스럽게 물었고, 이에 정우가 삭막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전부 정리했습니다.”
“그렇군요.”
이 말인즉슨, 끝내 대통령도 죽였다는 의미이리라.
대통령을 포함한 고위 관료 대다수가 소멸했으니 사실상 이 나라의 정부는 맥이 끊겼다.
명일은 씁쓸한 마음에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의외로 죄책감은 없었다.
이 나라에 사람이 200명만 남는다고 했던가?
자신조차 정말 그렇게 믿게 됐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다 죽었을 사람들이라고.
아니, 어쩌면 그렇게 믿어야만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저 안쪽에 식량 창고 같은 것들이 보이더군요. 세 분은 필요한 물건을 챙겨서 엘리베이터 앞으로 오세요. 전 미리 올라가서 대성 그룹을 만나 보겠습니다.”
정우가 다소 빠른 어조로 지시를 내렸고, 이 말을 들은 중성이 잽싸게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현재 시각, 오후 5시 1분.
‘이미 도착했겠구나.’
중성의 고개가 천장으로 올라간다.
서울 수복을 장담하며 정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온 대기업.
적어도 망자들에겐 저들이야말로 진정한 구원자였을 터.
‘이제 어떻게 되는 거냐. 설마 대성에서 구원자를 잡아 버리는 건 아니겠지.’
중성은 머릿속으로 실현 가능한 예상 시나리오들을 검토했다.
기성 정부가 힘을 잃은 지금, 누구든지 새 질서를 만들 수 있다.
일찍이 ‘분리’를 천명하며 중앙 정부와 이별을 고한 지자체들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해야 할 거다.
그런 점에서 정부의 간판이나마 건지러 온 대성과 정부의 숨통을 송두리째 끊어 버린 구원자의 만남은 상징성이 있었다.
전혀 다른 전망을 가진 두 권력의 충돌인 셈이지 않은가.
‘물론 본인이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는 것 같진 않고.’
중성은 그새 복도 저편으로 걸어 나가고 있는 구원자를 바라봤다.
지금은 그저 힘 좋은 엔진에 불과하다. 무턱대고 탑승하기엔 다소 거칠고 불안만 면이 많다.
하지만 대성마저 어쩔 수 없는 존재란 게 확인된다면 저 사내 외엔 대안이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떻게든 탈 만하게 만들어야 한다. 직장이 통째로 증발했지만 중성은 아직도 자신이 공무원이라고 생각했다.
“갑시다. 중요한 것만 추려도 옮겨야 할 짐이 꽤 될 겁니다.”
이윽고 중성이 창고 방향으로 걸음을 뗐다.
이에 명일이 얼른 따라붙었고, 한참 뒤에야 태휘의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오후 5시 3분.
북악산의 제2 대책실 지상층 입구 근처.
새까맣게 도색된 두 대의 헬기 앞에 정장 차림의 사내 아홉이 서 있었다.
이들이 바로 대성 그룹에서 보내온 특수전단 요원.
출범은 불과 어제 했지만 절대다수가 본사의 정규 경비대로 이루어져 있어 체계가 확실했다.
단, 문제가 있다면 체계만 확실하단 점일 것이다.
특수전단의 임무는 각성자들이 판치는 상황 속에서 대성 그룹을 지키는 것이었다.
대신 대성 측에선 ‘미래’를 약속했다. 지구 폐쇄를 막아 낼 방법을 찾고, 언젠가 도래할 평화 시대에 압도적인 기득권을 안겨 주겠다고.
그리고 가시적인 혜택으론 가족들의 안전과 편의를 제안했다. 실제로 북악산에 파견된 요원들의 가족은 대성의 직원 아파트에 잘 모셔져 있었다.
하지만 각성자들에게서 대성을 지킨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각성자를 쓰러뜨리려면 이쪽은 상대보다 더 강한 각성자여야만 한다.
특수전단이 출범하고 나서 첫 번째로 수행한 임무는 서울 곳곳으로 헬기를 타고 날아가서 민간인을 죽이는 일이었다.
몇몇 팀은 경기도 일대를 돌기도 했고, 일부는 훨씬 멀리 나갔다.
심지어 ‘작전 지역’이 무작위가 아니었다. 대성의 헤드 쪽에서 1시간 단위로 지역을 특정해 줬다.
소위 말하는 못 사는 동네나 대성의 인프라가 깔려 있지 않은 지역이 대다수였다.
당연히 반발이 있었지만 이 반발이란 것도 실무진인 특수전단 내에서만 발생할 수 있었기에 곧 조용히 정리됐다.
애초에 양심이 있는 자들은 이 짓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두 부류만 남았다.
미친놈 또는 미친놈에게 정리될 걸 두려워하는 비양심자.
그리고 사태 발생 이틀째인 지금.
틱틱, 틱.
특수전단 2팀장 권형철이 거대한 터널처럼 보이는 벙커 입구 앞에서 담뱃불을 지폈다.
“어떻게 됐냐. 아직 답이 없는가.”
작전 본부로부터 추가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느냐는 물음이다.
이에 뒤편에서부터 다른 요원이 대답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랍니다.”
“오케이.”
형철은 알았다는 신호를 해 보인 뒤 담배를 길게 빨았다.
본래라면 진작에 진입했어야 하지만 벙커가 이미 습격받은 정황이 있어 상부에 보고를 올린 상태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답이 빠르게 나오지 않았다.
‘철수하라고 할 게 아니면 무조건 들어가야 맞지, 뭘 저렇게 고민 중인 거야?’
슥.
형철의 머리가 저만치 떨어져 있는 4번 요원에게 닿았다.
모든 팀의 4번은 머리에 중계 카메라를 달고 있다. 저길 통해 찍힌 영상은 곧장 작전 본부로 전송되고 말이다.
저것 때문에 아무리 팀장급이라고 하더라도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물론 헬기에 붙은 안테나를 몰래 파괴한 뒤 4번을 죽이면 영상 증거를 남기지 않을 수 있지만 정말 필요할 때를 위해 아껴 두고 있었다.
앞일은 모르는 게 아닌가.
언젠가 대성에게서 독립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만일 그런 순간이 오면 팀원을 다 죽이고 정수량을 끌어 올린 뒤 숙소로 쳐들어가 가족들을 빼 올 생각이었다. 어디까지나 망상에 가까운 계획이긴 했지만.
“프후.”
형철은 담배 연기를 세차게 뿜으면서 지루함을 달랬다.
그러다 동공이 감지한 위화감에 눈썹을 찡그렸다.
“뭐야.”
눈앞의 담배 연기를 손으로 휘젓자 저 멀리 터널 안쪽에서부터 희멀건 무언가가 살짝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졌다.
“……?”
방금 본 게 누군가 입고 있던 흰 셔츠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곧 날아든 푸른 빛줄기를 보고 나서야 들었다.
쉬아앗!
창 형태의 날카로운 정수 덩어리.
색과 질감만 봐도 엄청난 양의 정수가 담겨 있음이 느껴졌다.
“저, 전투태세! 습격이다!”
온몸의 세포가 가시 돋듯 일어난다.
형철이 성대를 힘껏 조이며 경고하는 사이, 장내를 가로지른 정수 창이 8번 요원의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