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74
74화. 전에 없던(1)
오후 6시 11분.
폐허가 된 동작구 노량진동 외곽.
투둑, 툭, 툭.
어디선가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비가 오나?’
민구의 고개가 하늘로 향한다.
장마철이긴 했지만 하늘에 먹구름이라곤 한 점도 없었다.
‘아.’
그가 사태를 깨달은 건 자신의 손마저 축축해지기 시작한 뒤였다.
품에 안고 있던 사육사의 바지가 젖고 있었던 것이다.
슬슬 올라오는 시큼한 냄새.
“…….”
민구는 내색하지 않고 계속 걸었지만 이를 호랑이가 모를 리 없었다. 애초에 분비물로 영역 표시를 하는 동물이 아니던가. 대번에 냄새를 감지했다.
* 이상해.
크릉, 하면서 놈이 맥 빠진 소리를 낸다.
그러더니 민구와의 거리를 좁히며 사육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괄약근마저 풀려 버린 인간의 몸에선 엄청난 냄새가 났다.
더군다나 지금은 7월 말, 충분히 더웠다. 육신이 바로 썩진 않겠지만 이미 밖으로 흘러나온 노폐물은 엄청난 속도로 부패할 것이다.
따라서 몇 분 이내에 시체를 처리하는 게 현명했다.
“그래……. 이상하지.”
민구는 난감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뭘 찾는 건지는 그도 잘 몰랐다. 그저 이 문제를 해결할 마땅한 무언가를 찾고 싶었다.
시체도 시체지만 호랑이에게 설명해 줘야 할 게 아닌가. 네가 지키려던 사람이 죽어 버렸다고.
‘일단 실내로 들어가야 한다. 이놈은 너무 눈에 띄어.’
호랑이에게 부고를 알리는 적절한 방법이라는 게 존재는 할까.
그나마 확실한 건, 뜨거운 아스팔트 위는 적절한 장소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고개를 휙휙 돌리던 민구의 눈에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건물이 들어왔다.
“따라와.”
그가 앞장서자 호랑이도 군말 없이 네 개나 되는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도 실외기가 돌아가네.’
민구가 고른 건물은 3층짜리 상가였는데, 이곳 2층 외벽에 붙은 실외기가 힘차게 가동 중이었다. 냉방이 돌아간다는 뜻이다.
주변 분위기를 봤을 때 사람이 있을 것 같지는 않고……. 운 좋게 전선이 보존된 케이스이지 않을까.
민구의 걸음이 빨라진다.
도로를 가로질러 건물 정면으로 접근하자 1층에 입주한 가게들이 나타났다.
-벧엘 서점.
-다모아 부동산.
이 건물만 유난히 멀끔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비인기 종목들이라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거다.
슥.
자연스레 위로 올라간 민구의 고개.
2층은 한복점이었고, 층 전체를 혼자 썼다. 마찬가지로 침입의 흔적은 없었다.
‘완벽하네.’
이 커다란 짐승을 숨기기에 딱 좋다. 에어컨도 돌아가고.
민구는 고민 없이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그러자 그의 발소리가 좁은 층계 안에서 메아리쳤다.
떠걱, 떠걱.
군화를 신고 있던 탓이다.
반면 뒤따라 올라온 호랑이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소리를 내지 않았다.
“…….”
민구는 놈의 울긋불긋한 몸통이 층계를 따라 U자로 구부러지는 걸 보면서 천천히 2층 출입문을 밀었다.
그런데.
철컥.
잠겨 있었다.
물론 예상한 바이긴 하다.
정수 방출로 잘라 내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지만 그래도 문을 보존하고 싶었다.
심리적인 이유다. 허울뿐인 문짝으로나마 출입구를 가려 두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실례 좀.”
민구는 사육사를 바닥에 내려 둔 뒤 벨트 백의 지퍼를 열었다.
드륵.
입이 벌어진 백 안에서 독특하게 생긴 소형 망치가 나왔다. 주로 도둑들이 쓰는 도구인데, 문고리를 최대한 빨리 해체해야 할 때 요긴하다.
망치 머리 한쪽이 송곳처럼 길게 빠진 형태고, 이걸로 문고리의 열쇠 구멍을 후려치면 안쪽의 잠금쇠가 통째로 부러진다.
퉁, 퉁.
퉁!
세 번째 타격에서 원통형 체결 장치가 문고리 바깥으로 돌출됐다. 남은 건 발로 차서 마무리하는 것뿐.
콰곽!
보강재가 들어간 군홧발로 문고리를 올려 차자 드디어 문이 열리며 찬 공기가 흘러나왔다.
“하.”
얼마 만에 느껴 보는 시원함인가.
민구는 잽싸게 시체를 안고서 실내로 들어섰다.
그리고 동시에.
홱!
“억?”
우측에서부터 매서운 기척이 일었다.
민구는 반사적으로 온몸에 보호막을 둘렀고, 곧 반짝이는 무언가가 그의 이마를 사선으로 찔러 왔다.
그건 과도였다.
틱!
여지없이 도로 튕겨 나가는 칼날.
민구가 공격자 쪽을 바라보자 입술을 꽉 문 어떤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이는 40대 중반 정도. 몸엔 자줏빛이 도는 한복을 걸치고 있었다.
이 가게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
벌써 그 일이 터진 지 이틀째인데 왜 아직도 이런 곳에 사람이 있는가?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캬오!
뒤따라 들어오던 호랑이가 이 장면을 보고서 광분한 거다.
사육사에 대한 공격이었다고 여겼을 터.
순식간에 놈의 신체가 파랗게 빛나기 시작했고, 이를 본 민구가 경악했다.
“잠깐……!”
놈의 뒷다리는 이미 도약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제길.’
찰나의 순간, 민구는 사육사를 안은 채로 여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호랑이가 앞발을 휘두르며 몸을 날린 것도 이때다.
쏴악!
어디서 파도 소리 같은 것이 난다 싶더니 민구의 뒷덜미로 섬뜩한 기운이 스쳐 갔다.
놈의 공격이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비껴간 것이다.
“이 씨발.”
죽음의 공포가 등골을 저릿하게 만들었고, 민구는 이에 악기를 내뿜으며 응수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였다.
까득.
갑자기 그릇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시야에 흰 실금이 거미줄처럼 뻗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이게 무슨.”
민구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린다.
방금 놈의 일격에 보호막이 깨져 버렸다.
* * *
같은 시각, 황무지가 된 이태원.
정우는 보랏빛 구체 앞에 서 있었다.
-진입로 폐쇄를 축하드립니다. ‘단말기’와 접촉하시면 진입로 폐쇄 보상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저번처럼 담당 평가관 ‘다467’이 축하 인사를 해 왔고, 정우는 말없이 구체에 손을 얹었다.
[진입로를 폐쇄했습니다!]|더는 이 지역에 진입로가 생성되지 않습니다.
[방주 기능이 확장됐습니다!]|현재 7/20 개체를 탑승자로 지정할 수 있습니다.
‘20자리…….’
정우가 안내 문구를 곱씹는다.
이미 일곱 사람이 탑승해 있으니 실질적인 공석은 13개였다.
하지만 자리가 있으면 뭐하는가.
두두두두…….
저 멀리 허공에서부터 흰색 의료 헬기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헬기는 이미 만석이야. 방주에 남은 자리를 다 채운다고 해도 그 사람들을 데리고 다닐 방법이 없다.’
게다가 방주는 앞으로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운이 좋아서 헬기 조종사를 한 명 더 구하게 된다고 해도 그건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백 명 이상도 수용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한 상황이다.
정우로선 오늘 아침에 선택했던 ‘개별 특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확히는 개별 특혜의 5번 항목.
5. 성역
-지정한 구역 내에서 외부인의 정수 사용을 금지합니다. 진입로를 직접 폐쇄한 구역만 지정할 수 있습니다.
지금 자신이 고민 중인 사안에 대한 해결책이 이미 제시되어 있던 거다.
문제는 저 성역 기능을 가지려면 다시 한번 특혜 투표에 참여해야 한다는 점.
즉, 내일 오전 8시 전까지 1위 자리를 되찾아야만 한다.
텅!
그사이 일행을 싣고 온 헬기가 굉음을 내며 착륙했다.
사람들이 하나씩 땅에 발을 딛기 시작한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멍한 표정의 태휘.
왜인지 기대감이 엿보이는 얼굴의 중성.
이 와중에 손톱의 때를 신경 쓰는 동훈.
이전과 달리 사뭇 침착해진 선웅.
반면 여전히 초조해 보이는 용헌.
그리고 이들의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이 곁눈질하는 명일.
정우는 이 사람들이 각자 걷는 모습마저 다른 걸 보고서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 * *
오후 6시 23분.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태원 한복판에서 명일의 목소리가 쏘아져 올라갔다.
“예…… 옙? 정말입니까?”
놀람 이전에 불안감이 더 짙게 묻어 나왔다.
박정우의 입에서 자신이 더는 1위 구원자가 아니란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어딘가에 이 사내보다 더한 괴물이 돌아다니고 있다니…….
더불어 정우는 1위의 특권인 선두 특혜와 개별 특혜 선택, ‘성역’ 기능의 존재까지도 오픈했다.
어찌 보면 원년 멤버라고도 할 수 있을 여섯 사람의 의견을 들어 보기 위해서였다.
“말씀하신 것처럼 방주를 계속 키우려면 그 성역이란 게 필수적이겠군요. 그렇죠? 태휘 씨.”
중성이 태휘에게 바톤을 넘기며 정신 좀 차리란 신호를 줬다.
“아, 예. 그렇죠. 언제까지고 유랑 생활을 할 순 없을 테니…….”
태휘는 이 말을 하면서 다른 멤버의 눈치를 봤다.
첫인상을 잘못 각인시킨 탓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정우에게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냈었으니 나머지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좋든 싫든 현재 박정우는 ‘가장’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것도 대체 불가능한.
그럼에도 태휘의 입지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농업 전문가다. 향후 식량 수급을 담당할 인재인 만큼 적으로 돌릴 필요까지는 없다.
둘째, 김중성이 전적으로 그의 편을 들어 주고 있다.
중성의 대담함과 예리함을 직접 본 건 벙커에 함께 있던 명일뿐이었지만 다른 사람들도 은연중 느끼고 있었다. 보통 인물은 아닐 거란 점 말이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 정수를 모아 가는 수밖에 없는 건가요?”
선웅의 이 질문엔 ‘언제까지 인간 도살을 관람해야 하는가?’라는 진의가 숨겨져 있었다.
정우도 상대의 의도를 충분히 알았지만 일부러 내색하지 않았다.
“당장은 그렇습니다. 물론 이렇게 여섯 분만 살려 둘 거라면 성역이 필요 없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굳이 뒷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구 존속에 성공한 다음도 고려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자 여태 잠자코 있던 동훈이 밑도 끝도 없이 행간을 몇 개씩 건너뛰었다.
“외람된 말…… 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말씀드립니다만, 번식은 고려하고 계신 겁니까?”
“……?”
다른 사람도 아닌 비뇨기과 의사인 동훈에게서 ‘번식’이란 단어가 나오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아, 중요한 문제긴 하죠. 만약 이 자리에서 어느 정도 방향성을 잡고 가실 생각이라면 반드시 짚어야 하는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적이 길어지기 전에 중성이 운을 떼며 고삐를 잡아끌었다.
하지만 정작 정우는 인류의 번성 단계까지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살인하느라 바빠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동훈 씨.”
정우가 그 주제로 더 말하길 허락하자 동훈의 눈이 번쩍였다.
“정우 씨를 포함해서 다들 뭘 하고 싶은 건지 잘 생각해야 합니다. 단순히 살아남아서 수십 년 정도 더 살다 죽는 건가요? 아니면 말 그대로 인류 보존? 이건 좀 낭만적인 느낌입니다만.”
말을 멈춘 동훈이 장내를 슥 둘러본다. 그러더니 입술을 실룩이며 좀 더 원색적인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보존한다면 정확히 뭘 보존하는 거죠? 제 눈엔 이 자리에 있는 염색체라곤 XY뿐인데. 따라서 여러분이 인류를 보존한다는 말은 남의 씨를 보존해 주겠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 여기에 동의하고 계신 건지, 그것부터 좀 묻고 싶군요.”
“아니…….”
벙커 때와 마찬가지로 성난 표정을 지어 보이던 태휘가 무어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이런 자리에서 목소리를 높일 처지가 아니란 걸 다시금 깨달은 것이다.
“음…….”
말문이 턱 막힌다. 다들 신음에 가까운 소리만 냈다. 거지 같은 표현이 거슬렸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 정신 나간 여정 도중에 결혼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현재 구성원들은 피붙이를 남기지 못하고 간다.
사람에 따라 누구는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저런 것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한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우리끼리 대충 살 궁리만 하는 게 현명하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선웅이 다소 퉁명스러운 어조로 질문을 던졌고, 이에 동훈이 눈썹조차 꿈틀대지 않고 대답했다.
“까놓고 말해서 나중에 가서 후회하면 늦으니 미리 자가진단을 해 보란 뜻입니다. 수십 년이 지나면 내 존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텐데 그런 미래를 위해 성역이니 뭐니 구해 가며 분투할 자신이 있느냐는 거지요.”
“그럼 동훈 씨는 인류 존속에 큰 의의를 두지 않는다는 입장이신 겁니까?”
“예, 전 사람 안 좋아합니다. 하지만 정우 씨가 대의를 위해 움직이겠다면 그 뜻엔 따라야겠지요. 정우 씨가 있어야 저도 수십 년이나마 존재할 수 있을 테니까.”
“…….”
선웅과 동훈의 대화는 여기에서 끝났다.
그리고 정우의 머릿속에 잠시 잊고 있던 한 가지가 떠올랐다.
헬기 조종사 용헌의 전처 말이다.
대성 전자 사옥에서 그를 영입하던 당시, 용헌이 조건을 하나 붙이지 않았는가.
이혼한 아내를 만나서 합류를 설득할 수 있도록 30분만 허락해 달라고.
번식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가 나와서 자연스레 떠오른 것이었다.
“용헌 씨, 그건 생각해 보셨습니까?”
정우가 입을 열자 장내의 모든 소리가 자취를 감췄다.
“예? 어떤 것 말씀이신지…….”
용헌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저 구원자가 무슨 이야길 하는 건지 알 것 같았다.
“합류 조건 말입니다. 제 기억엔 종로에서의 볼일을 마치는 동안 결정을 내리기로 했던 것 같은데.”
“아아, 그렇지요.”
용헌의 얼굴이 붉어진다.
“아니 그런데, 그렇다고 그런 이유는……. 그런 건 아닙니다.”
그가 경황없이 말을 내뱉자 선웅도 지금 무슨 대화가 오가는 건지 깨닫고서 헛기침을 했다.
이외에 나머지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정이다.
“예. 별 뜻이 있는 건 아니고, 이제 움직여야 하는데 용헌 씨가 걸었던 조건이 생각나서요. 위치가 어디쯤입니까?”
“……신수동입니다.”
신수동이면 신촌 아래 지역, 즉 이태원 기준으로 서쪽이었다.
패스파인더의 정수 화살표가 가리킨 방향과도 어느 정도 일치했다.
다만 한강 다리와 인접한 곳이라 어떤 지경이 되어 있을지는 미지수.
“그럼 그리로 갑시다. 어차피 서쪽으로 갈 생각이었으니까요.”
대신 동쪽으로 가야 만나 볼 수 있는 대성은 포기하게 되는 셈이다.
언젠간 놈들도 다 정리를 해야겠지만 말이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자기들이 알아서 더 많은 정수를 들고 찾아오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당장은 대성보다 서쪽에 정수가 더 많다고 하니…….
‘둘 다 동시에 처리할 순 없다.’
이윽고 정우의 시선이 서쪽으로 완전히 돌아갔다.
“비행 준비해요. 바로 떠날 겁니다. 남은 이야긴 헬기 안에서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