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75
75화. 전에 없던(2)
오후 6시 31분.
대성 그룹의 서울 특별 본부 지하 3층.
풍채 좋은 중년 사내가 보좌관에게 보고를 받고 있었다.
드디어 블루 리스트의 특급 관리 대상 중 하나인 ‘구원자A’의 정체를 알아낸 것이다.
그런데 막상 들춰 보니 정보라고 할 만한 것들이 많지 않았다.
“이게 전부야? 형제도 없나?”
“예, 현재 연결 고리는 친부가 유일합니다.”
“안 됐네.”
사내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찬다.
물론 진심은 아니었다. 이쪽의 의료 헬기를 강탈한 건 물론 수준급 요원들까지 도륙한 미친놈이었으니까.
그래도 뭔가 근본 있는 놈일 줄 알았더니 그저 흔한 시민 아닌가.
박정우. 31세, 남성.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사망, 아버지만 생존 중인데 이자도 별 볼 일 없는 것 같았다. 전산상으론 장기 무직자였고, 실제로도 잘해야 일용직 노동자였을까 싶다.
어쨌든 박정우의 약점을 잡아야 일이 수월할 텐데…….
형제는 전무하고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애인도 없다.
휴대폰 사용 내역에서도 특이 사항을 찾지 못했다.
무미건조 그 자체.
이런 목각 인형 같은 놈이 어떻게 지금의 괴물로 변했는지 불가사의할 정도다.
“일단 애비부터 수배해야겠네.”
“예, GPS를 꺼 두고 다녀서 실시간 추적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통화 추적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알았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보좌관에게 물러가란 지시를 내렸다.
이 남자의 이름은 최두호. ‘지구 폐쇄’ 사태가 터지기 전까진 대성 생명의 사업 이사였고, 지금은 서울 특별 본부장이란 직함을 가지고 있다.
특수전단 운용이라는 희대의 프로젝트가 이 남자의 머리에서 나왔으니 대성에서의 입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철컥.
보좌관이 본부장실 문을 닫고 나가자 최두호가 손에 쥐고 있던 리모컨을 조작했다.
그러자 불이 나가 있던 모니터가 다시 켜지며 영상을 재생했다.
다름 아닌 오늘 오후 5시경, 특수전단 2팀의 4번 요원이 전송해 온 그 장면이었다.
-이대로 있으면 어차피 다 뒈져. 돌격 지원자, 알아서 호명해라. 내가 같이 간다.
녹화본에서 흘러나오는 망자의 음성. 2팀장 권형철이다.
특수전단 내에서도 드세기로 유명한 양반답게 목소리에서 악기가 풀풀 흘러나왔다.
워낙 대범한 성격이라 언젠간 쿠데타를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터다.
그런데 웬 구원자 하나에게 죽어 버리다니.
“음.”
몇 번을 봐도 납득이 되지 않는 전투 상황.
그는 요원들이 터널 안으로 진입하는 시점에서 화면을 껐다.
그러곤 잠시 깍지를 낀 채 생각에 잠겼다.
딸깍.
최두호가 책상 위의 수화기를 든 건 그로부터 약 5분이 지난 뒤였다.
“어, 보안실장 올려보내라. 뭣 좀 시킬 게 있다.”
* * *
오후 6시 35분.
정우 일행이 탄 헬기가 마포구 외곽에 진입했다.
슬슬 해가 질 기미를 보인다.
사위가 푸르스름하게 젖었고, 헬기 아래로 펼쳐진 도심지는 그보다 더 짙게 칠해졌다. 조명을 켠 건물이 거의 없었으니까.
마치 거대한 바다를 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고요한 풍경과 달리 헬기 내부는 아주 시끌벅적했다.
아직도 ‘인류 존속’과 ‘번식’이란 주제를 두고서 논의가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생존을 위해 필요한 사람들을 건져 내는 것과 인류의 미래까지 대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 모든 일이 끝나고 다음 세대가 태어난다고 해도, 그들은 우리의 자식이 아닙니다.”
따가운 시선이 몇 개씩 날아들었지만 동훈은 여전히 꿋꿋했다.
당장 지구 폐쇄를 제대로 해결할 수 있을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혈육도 아닌 미래의 인류를 고려하는 건 사치일 수도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이게 태휘에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허……. 그쪽이야 평생 씨 한 번 못 뿌릴 처지였으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 아니오?”
이에 중성이 태휘의 무릎을 살짝 누르며 대신 사과했다.
“이 친구가 아직도 막말할 정신이 있는가 보군요. 제가 대신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틀린 말도 아니고.”
특유의 묘한 웃음을 짓는 동훈.
그사이 헬기 조종사, 용헌이 간만에 입을 열었다.
“핀트가 어긋난 것 같은데, 미래를 준비하는 건 살아남은 사람들의 의무 아니었나요? 방주라는 게 왜 있겠습니까. 설마 우리끼리만 남아서 몇 년 살다 죽자고 이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침착한 말투와 달리 그의 내면에선 엄청난 폭풍이 몰아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그가 말을 하는 동안 헬기가 두 번이나 기울었으니까.
“인류를 보존한다는 의미가 실질적으론 남의 번식을 의미한다는 거, 확실히 맹점을 잘 짚어 주시긴 했습니다만…….”
논의, 아니 논쟁에 참전한 명일이 턱을 긁적인다.
“이 마당에 내 자식이니 남 자식이니 따질 필요가 있나요? 나라 안에선 같은 민족끼리도 혈연, 지연, 학연으로 파를 가르지만 외국 나가면 동양인만 봐도 괜히 반갑고 그런 게 사람입니다. 하물며 이번엔 행성 단위의 재앙이 왔다는데…… 최소한 같은 종(種)이기만 해도 고마운 게 당연하지 않나 싶습니다.”
“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저거였다는 듯 태휘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반면 동훈과 중성은 정우의 분위기를 살폈다.
사실 이 대화는 엄밀히 말해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아니다. 자신의 가치관을 제안하는 자리에 가까웠다. 절대적 결정권자인 정우에게 말이다.
“음.”
이야기를 쭉 듣던 정우가 이윽고 운을 뗐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미래의 인류가 제 자식이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정확히는 아예 관심이 없어요. 여태 한 번도 제가 죽은 뒤의 일을 생각해 보지 않았으니까. 그저 당장 죽지 않는 게 가장 중요했습니다.”
이건 어떻게 보면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었다.
일찍이 선웅도 살고 싶어서 정우의 살인을 묵인했고, 구원자의 얼굴에 주먹을 꽂던 태휘마저도 예외는 아니었다.
생존 본능은 많은 걸 가능하게 했다. 그래서 지구가 정수를 나눠 주고 싸움을 유도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경쟁종이 한계치 이상의 능력을 내도록 말이다. 그래야 최고 중 최고를 골라낼 수 있을 테니까.
“인류애? 그런 것도 사실 모르겠습니다. 한자리에서 천 명씩도 죽이는데 그런 감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게 더 웃긴 일이겠죠.”
자조적인 웃음.
정우의 표정에서 나머지 일행은 씁쓸함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래서 여러분을 모아 둔 겁니다. 어쨌든 저보단 훨씬 인간적인 분들 아닙니까. 그러니 인간으로서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겠죠.”
이 말에 좌중의 분위기가 은근히 굳었다.
인간으로서 현명한 판단을 내리라니……. 본인은 마치 인간이 아닌 것처럼 말하지 않는가.
“저, 정확히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명일이 용기를 내어 되물었고, 이에 정우가 오른팔을 위로 살짝 들면서 이야기했다.
“절 제외하고 여섯 분이 투표로 정하세요.”
“예, 옙……?”
예상치 못한 답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정부도 국가 중대사를 겨우 천 명 모아 놓고 정하던데 우리라고 못할 게 뭐가 있습니까?”
정우는 진심이었다.
그러자 대번에 중성이 포지션을 잡았다.
“그럼 안건은…… 다음 세대 준비 여부로 하면 될까요?”
“좀 더 구체적으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앞으로 방주에 남녀 한 쌍 또는 아이들을 태울 것인지 가부를 묻는 걸로.”
의외로 동훈이 거들어 준다.
“투표는 그럼 다수결…… 인가요? 거수하는 방식으로?”
이건 선웅의 물음.
이에 중성이 재킷 안주머니를 뒤지더니 새하얀 종이를 꺼냈다.
다름 아닌 정부에서 준비했던 투표용지였다.
“이걸 언제 챙겨 왔습니까……?”
태휘가 놀랍다는 얼굴로 묻자 중성이 그의 손에 용지를 쥐여주며 달래는 듯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비공개 투표가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펜은 제 걸 쓰시죠.”
보아하니 펜도 한두 개 챙겨 온 게 아니다.
용헌도 조종간을 붙든 채로 투표용지와 펜을 넘겨받았다.
두두두두두…….
프로펠러의 소음이 종이 위로 펜촉이 움직이는 소리를 감춰 줬다.
혹시 모를 필체 유추마저 방지하기 위해 찬성은 ○, 반대는 ×를 적는 방식으로 했다.
용헌을 포함한 모두가 투표를 마친 건 약 2분 뒤.
“흠, 흠.”
개표를 맡은 중성이 침착한 모습으로 용지 개수를 재차 셌다.
“여섯 장, 확인했습니다. 과반수 가결을 원칙으로 합니다. 즉, 두 안건 중 하나가 네 표 이상을 획득해야 하는 겁니다. 다들 동의하십니까?”
중성의 물음에 나머지의 시선이 또다시 정우에게 향했다.
“전 상관 마세요.”
정우가 계속하라는 손짓을 하자 비로소 나머지 다섯 사람이 소리 내어 대답했다.
“예, 동의합니다.”
“동의합니다.”
척.
개표를 앞둔 중성이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보기엔 우스꽝스러워도 향후 인류의 세대 개수를 바꿔놓을지 모르는 투표였다.
물론 정우가 이끄는 이 그룹이 끝까지 살아남아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현재 시각, 오후 6시 41분. 개표 시작합니다.”
여론상 찬성표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올 게 분명했기에 그리 긴장감이 흐르진 않았다.
첫 표부터 ‘반대’가 나오기 전까진 말이다.
스륵.
“반대, 하나.”
중성이 용지를 뒤집어서 모두에게 × 표시를 보여 줬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의 고개가 동훈 쪽으로 돌아갔다.
그사이 중성이 두 번째 표를 읽었다.
“찬성, 하나.”
충분히 예상한 바다.
이어서 펼쳐진 세 번째 표.
“찬성, 둘.”
아주 커다랗게 그어진 ○ 표시가 눈에 띈다.
“…….”
명일은 맞은편의 태휘가 주먹을 불끈 쥐는 걸 봤다.
그러는 동안 벌써 네 번째 표가 중성의 손에 끌려 올라갔다.
스륵.
이윽고 펼쳐진 투표용지.
그런데 중성의 표정이 묘하다.
“반대…… 둘.”
“뭣……?”
태휘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움찔했고, 용헌도 잠시였지만 뒤를 홱 돌아봤다.
중성이 뒤집어 보인 용지엔 분명히 ×가 그어져 있었다.
이때만큼은 정우도 흥미를 느꼈다.
결과야 뭐 아무래도 좋다. 문제는 동훈 외에 또 누가 반대표를 썼느냔 점이다.
중성? 분위기상으론 그런 느낌이 있으나 장기 생존 계획을 수립하고 싶어 하던 사람이 아닌가.
그런 그가 다음 세대를 버린다는 건 이율배반적인 행위였다.
그럼 누굴까.
슥.
개표자가 다섯 번째 표를 집어 든다.
긴장한 건지 이 상황을 즐기는 건지, 아까보다 머뭇거리는 기색이다.
“흠.”
짧은 헛기침.
그러더니 빠른 동작으로 용지를 펼쳤다.
“찬성, 셋.”
이제 남은 표는 하나.
만약 반대가 하나 더 나와서 완벽한 균형을 맞추면 이 투표는 부결된다. 정우를 포함해 투표를 다시 하거나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찬성이 하나 더 나온다면 4:2로 가결 처리.
슥.
드디어 중성이 마지막 표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큰 결단을 내린 것처럼 힘을 주어 표를 뒤집었다. 모두가 바로 볼 수 있도록.
“찬성, 넷.”
용지 중앙에 신중하게 그려진 ○ 표시.
가결이다. 앞으로 이 방주에는 기술자뿐만이 아니라 부부나 연인, 아이들도 탑승하게 된다.
“아아, 그럼 그렇지.”
태휘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장내를 둘러봤다.
동훈은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지만 딱히 불만까진 없는 눈치였다.
그리고 명일은.
“그런데 지금 남은 자리가 13개이지 않습니까? 부부를 들이기 시작한다고 치면 몇 자리를 내주는 거죠? 예를 들면 전체 좌석의 20%까지만 차세대를 위해 할애한다든가.”
할당제를 말하는 거다.
이 와중에 또 다른 건의라니. 그러나 충분히 타당성 있었다.
이번에도 중성이 정우를 쳐다봤고, 곧 허락이 떨어졌다.
“예…… 뭐, 이것도 투표로 정하는 게 잡음이 덜하겠죠.”
그러면서 정우는 벌써 오래전에 본 것처럼 느껴지는 문구 하나를 떠올렸다.
-질문3. ‘투표’가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합니까?
-20초 안에 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