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79
79화. 원칙(2)
아까보다 하늘이 한층 까매졌다.
지구가 여느 때처럼 자전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반면 신수동의 데라파크 B동 옥상의 분위기는 결코 여느 때와 같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선웅은 저 멀리서부터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정우를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동공이 시퍼렇게 불타고 있어서 감정이 읽히질 않는다.
‘새 얼굴’인 선희와 성호는 헬기 꼬리 쪽에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애인이라고 성호가 은근히 선희 앞으로 자리를 옮긴다.
하지만 근력 따위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그도 알았다. 벌써 어깨가 덜덜 떨리고 있었으니까.
“…….”
정우는 낯선 사내의 상의가 검붉게 물든 걸 보고서 사정을 짐작했다.
“용헌 씨는 저 안에 있습니까?”
이 물음에 선웅이 얼른 대답했다.
“예, 아래에서 몸싸움이 좀 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사고가 좀 나서…… 일단 의식이 없는 상태입니다. 동훈 씨와 중성 씨가 살펴보고 있고요.”
저 40대 커플을 비호하면서도 헬기 조종사의 중태를 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횡설수설하게 된다.
“의식이 없다고요?”
아니나 다를까, 수그러드는가 싶던 정우의 안광이 확 번졌다. 이에 성호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이, 이게 정말 구원자야? 이건…… 괴물이잖아.’
눈앞의 사내가 어떤 존재인지는 일찍이 용헌에게 전해 들은 바다.
그럼에도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간 생각해 온 구원자의 이미지와는 너무 달랐으니까.
그러나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건 정우도 마찬가지였다.
‘타이밍이 너무 안 좋은데.’
하필 순위가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정우는 자신이 아직 1위 구원자임을 확인한 뒤 겁에 질린 두 남녀를 응시했다.
단연 임산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용헌 씨 아이일 리는 없겠죠.”
다들 금기시하고 있던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그리고 이 한마디로 선희와 성호는 상대가 어떤 캐릭터인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의식을 잃기 전에 남긴 말은 없었나요?”
정우가 선웅 쪽을 돌아보며 물었고, 이에 선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에 왔을 때부터 이미 의식이…… 아마 같이 있던 중성 씨가 알 겁니다.”
물론 중성은 지금 용헌을 살피느라 바쁘다.
정우도 굳이 헬기 문을 열어서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저희를 데려가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오셨던 분도 분명 들으셨을 겁니다.”
난데없이 성호가 끼어들었다.
주제넘은 짓이었다는 건 사실 본인이 가장 잘 알 거다. 심지어 자신이 가해자이지 않은가.
기가 막힐 정도의 뻔뻔함. 하지만 선웅과 명일, 태휘 중 그 누구도 성호를 비웃지 못했다.
그가 저런 무리수를 둔 건 배 속의 아이를 포함한 자기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란 걸 알았으니까.
“그런가요.”
의외로 정우가 불쾌한 내색 없이 받아넘긴다.
물론 화가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만에 하나 이 일로 용헌을 잃게 된다면 어떤 짓을 하게 될지, 정우 자신도 알지 못했다.
김용헌의 가치는 헬기 조종사라는 것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진입로의 모든 걸 겪어 보고도 곁에 남은 인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차세대 할당제를 제정한 게 불과 수십 분 전이다.
화가 난다고 해서 다수결로 정한 규칙을 대번에 깨 버리면 향후 생겨날 규칙도 힘을 잃게 될 거다. 그때는 누구도 진지하게 투표를 하지 않을 테니까.
‘용헌 씨가 죽어 버린다 해도 이 둘은 반드시 태워야 해.’
이렇게 결론을 내리자 거짓말처럼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러곤 합리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다.
‘기약 없이 기다리고만 있는 건 멍청한 짓이야. 언제 2위가 치고 올라올지 모르는데.’
1시간, 아니 2시간 뒤에도 용헌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럼 그 시간은 오롯이 땅바닥에 버리는 셈이다.
“…….”
발치의 패스파인더는 여전히 서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청와대에서부터 줄곧 이랬으니 탐지 반경을 고려하면 후보지가 몇 개 되지 않는다.
정우는 곧 마음을 굳혔다.
“오늘이 가기 전에 정수를 최대한 모아 놔야 해요. 용헌 씨가 회복하기 전까진 다들 여기 있을 수밖에 없으니 저 혼자서라도 움직여야겠습니다.”
현재 시각, 오후 7시 33분.
신체 강화를 극한으로 한다면 홍대까지 10분 안에 도착할 자신이 있었다.
홍대에도 놈이 없을 경우 다른 후보지는 한강 공원과 서울 월드컵 경기장.
“괜찮을까요? 당장은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어 보이긴 하지만…….”
정우가 떠난다는 말에 명일이 우려를 표했다.
“날이 어두워서 여기에 헬기가 있다는 건 알아채기 어려울 겁니다. 저도 최대한 빠르게 돌아올 거고요. 내일 선두 특혜에 참여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정우는 이렇게 말하고서 대번에 옥상 출입구로 향했다. 그러곤 일말의 미련도 없는지 순식간에 문을 열고 사라졌다.
퉁.
둔탁한 소리를 내며 도로 닫힌 출입구.
그러자 태휘가 턱을 쓰다듬으며 걸걸한 목소리로 물었다.
“결단력 하난 대단한 양반이네. 원래 저렇습니까?”
비꼬는 거다.
이에 선웅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결단력 덕에 저희가 여태 살아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 * *
오후 7시 37분.
정우가 서쪽으로 뻗은 6차선 도로 위를 달리기 시작하자 패스파인더의 정수 표식이 조금씩 북쪽으로 기울었다.
“……?”
추적 대상과의 거리가 줄어들고 있다는 의미다.
현 위치에서 북서쪽이라면 일단 한강 공원은 제외.
‘월드컵 경기장이거나 홍대 근처겠네.’
벌써 신수동 외곽이다. 그럼에도 근처에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척.
잠시 숨도 고를 겸 정우는 제자리에 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당연하지만 불이 들어온 건물은 하나도 없었고, 처참하게 박살 난 차량과 성한 곳이 없는 상가 건물만 눈에 들어왔다.
‘어딜 가도 다 비슷비슷하구나.’
그래도 어딘가에는 있지 않을까? 여태 번화가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도시 말이다.
정부에 따르면 일찌감치 분리를 선언한 지자체가 몇 있다고 했으니 거긴 좀 다를지도 모르겠다.
슥.
시계를 다시 확인하자 그새 2분이 지나 있었다.
“후.”
호흡을 가다듬은 뒤 땅에서 발을 뗐다.
무심코 발치를 본 정우의 눈에 이상한 것이 감지된 것도 이때였다.
‘뭐야?’
패스파인더의 정수 표식이 아까보다 한참 더 북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착각이 아니다. 제자리에 서 있는 지금도 표식이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게 보였으니까.
“헉.”
추적 대상이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였다.
팍!
정우는 망설임 없이 전력 질주를 시작했다.
예닐곱 대씩 모여 있는 자동차 더미를 단번에 뛰어넘었고, 장애물이 없는 구간에선 허벅지 근육을 터뜨릴 기세로 달렸다. 가속력을 받아 내느라 허리가 저려 올 정도였다.
그러다가.
‘아니, 잠깐.’
뒤늦은 깨달음.
엄밀히 말해서 패스파인더로 움직이는 대상을 추적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 않은가?
지금까진 패스파인더가 집합을 가리키는 게 대부분이었으니까. 거주민이 많은 동네나 각성자 그룹이 체류하고 있는 장소 같은 식으로 말이다.
‘상대가 한 명일 수도 있는 거네.’
추론을 해 나가는 사이 상수역 근처에 도착했다. 이제 정수 표식은 정북 쪽에 가까워져 있었다.
이로써 월드컵 경기장도 후보지에서 제외. 놈은 분명히 홍대 근처에 있다.
정우는 두근대는 마음으로 북쪽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맹수의 발자국을 발견한 사냥꾼이 된 기분이었다.
‘평가관님, 혹시 구원자가 아니어도 패스파인더를 사용할 수 있습니까?’
정우가 오랜만에 평가관을 호출하자 그의 의식 속에서 묵직한 기척이 일어났다.
-패스파인더는 유력한 행성 구원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애드온입니다.
여느 때처럼 핀트가 묘하게 어긋난 답변.
이럴 땐 항로를 수정하듯 몇 가지 요소를 재입력해야 한다.
‘구원자가 아니더라도 정수를 추적할 수 있나요?’
그러자 비로소 제대로 된 답이 나왔다.
-부분적으로 가능합니다.
아주 짧은 답변이었지만 이제 나름의 요령이 생긴 정우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현시점 평가관이 제공할 수 있는 정보는 저게 전부인 것이다.
‘그럼 포식자나 미분류자들도 패스파인더 비슷한 걸 가질 수 있다는 거네.’
정우가 이걸 물은 이유는 지금 추적 중인 대상 때문이었다.
놈은 대체 어딜 가고 있는 걸까? 이런 의문을 갖자, 이쪽을 피해 도망가는 걸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 거다.
물론 정수 추적이 가능할 정도의 존재라면 오히려 이쪽에 접근해 와야 정상이다. 하지만 다쳤거나 해서 당장은 전투가 어려운 상황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래도 방심해선 안 돼. 포식자나 미분류자 중에서도 어마어마한 녀석들이 있을지 몰라.’
구원자 순위는 말 그대로 구원자 간의 서열일 뿐이다. 정수를 부여받은 종 전체를 놓고 보면 순위가 매겨지지 않은 개체가 훨씬 많을 터.
스아…….
정우는 본능적으로 신체 강화의 비중을 낮추고 정수 보호막 밀도를 높였다.
언제 어디서 정수 창 같은 게 날아들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였다.
어느덧 홍대 거리에 들어와 있기도 했고.
취리릭!
발에 뭔가 치여 나간 느낌이 들어서 뒤를 보니 노란색 전단지가 나풀대고 있었다.
근처 전봇대에도 뭔가 잔뜩 붙었고, 3차선으로 줄어든 도로 좌우엔 주점이 즐비했다.
그래도 여전히 사람은 없었다.
‘뭐지? 이번엔 꿈쩍도 안 하네.’
홍대 근처로 진입한 뒤부터 패스파인더를 주시했는데, 언젠가부터 표식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추적 대상과 완전히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중이거나 상대가 제자리에 멈췄다는 의미다.
묘하다. 겁이 나는 것까진 아니었지만 왜인지 예감이 썩 좋진 않았다.
폐허가 된 거리는 계속 이어졌다. 외벽이 으깨진 의류 매장, 차 몇 대가 출입구를 틀어막은 지하 주차장,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주점 행렬.
그러다 정우의 걸음이 확 느려졌다.
저 멀리 울긋불긋한 무언가 보여서다.
좀 더 다가가니 대상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정육 식당이었다. 전면부를 완전히 개방하고 불을 켠 채 비현실적인 소리와 냄새를 동시에 뿜어내고 있었다.
치이이익……!
생고기가 철판에 눌어붙는 소리.
고기 익는 특유의 냄새는 이미 비강을 타고 들어온 상태다.
“…….”
시계를 보니 오후 7시 42분.
잊고 있던 시장기가 배를 찔러 온다.
아니, 그것보다도.
‘어떤 미친놈이…….’
정우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서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패스파인더는 여전히 꼼짝도 않는다. 놈이 저 안에서 고기를 굽는 중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스아앗.
정우는 보호막 밀도를 더욱 끌어올렸다.
식당과의 거리는 이제 약 10미터.
원한다면 이 자리에서 건물을 통째로 날려 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 궁금했다. 대체 어떤 놈이기에 저러고 있는가.
상대 역시 이쪽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으리란 염려는 까맣게 잊었다.
얼굴만 확인하고 바로 죽이자고, 정우는 스스로에게 이야기했다.
츠즉.
마침내 식당 내부를 비스듬히 볼 수 있는 위치까지 왔다.
취아악!
아까보다 소리가 훨씬 거세다. 기름기 많은 부위임이 틀림없었다.
정우는 고개를 살짝 틀어서 식당 안쪽으로 시선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불판이 놓인 원형 테이블에 앉아서 뭔가를 굽고 있는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성호를 연상케 하는 건장한 체격. 하지만 표정과 자세는 몹시 위축되어 있었다.
사내가 쥐고 있는 집게에 피가 너무 많이 묻어 있음을 깨달은 건 그다음.
그리고 그 피가 너무 날것임을 깨달았을 땐…….
‘아.’
사내와 정우의 시선이 허공 어딘가에서 맞닿았다.
상대가 가진 정수는 불과 세 개.
게다가 불판 위에서 구워지고 있는 건 일반적인 고기가 아니었다.
누런 비계가 거의 9할이다. 애초에 먹으려고 굽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달달달…….
정우는 사내의 집게가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걸 봤다.
시야 하단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정수 표식도 움찔했다.
“……!”
위험을 직감한 정우가 보호막에 모든 정수를 쏟았고, 어디선가 날아든 정수 파동이 그를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