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84
84화. 태동(3)
‘슬슬 시작인가.’
정우는 바닥에 엎어진 시체에서 정수 구체가 튀어 오르는 걸 태연하게 바라봤다.
사내를 죽인 정수 창이 이쪽의 보호막까진 뚫지 못했지만 어쨌든 아주 호기로운 공격이었다.
자기 딴엔 단번에 둘을 해치울 거라 생각하고 던진 게 아니겠는가.
티틱.
정우가 발을 내딛자 1만 개가량의 정수가 몸 안으로 흡수됐다.
스아아…….
정수 총량이 174,898개로 불어난다.
십여 시간 전만 해도 수준급 각성자라고 하면 천 단위 정수를 떠올렸는데, 어느새 허들이 만 단위까지 올라 버렸다.
“…….”
상대는 정우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창을 던진 직후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래 봐야 보호막을 끄고 정수를 뿜지 않는 것뿐 실루엣을 완전히 지울 순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정우가 결국 놈을 발견했고, 녀석도 자신에게 꽂힌 시선을 느꼈다.
다시 대화의 시간.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데, 여긴 왜 온 거지? 괜히 왔다가 더 강한 놈을 만나면 죽는 거잖아.”
정우의 질문에 놈이 몸을 움찔했다. 그러더니 천천히 입을 여는데, 아주 의외였다.
“그러는 넌 여기 왜 왔는데요.”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으니까.
츠즉.
녀석은 이미 슬슬 뒷걸음을 치고 있었다. 선공을 당하고도 느긋해 보이는 정체불명의 남성. 이 상황 자체에 위화감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위화감은 곧잘 두려움으로 변하기도 한다.
“도망가지 마. 더 움직이면 바로 죽인다.”
상대가 몸을 돌리려 하기에 정우가 경고했지만 여자는 말을 듣지 않았다.
탓!
대번에 날쌘 기척을 내며 달리기 시작했고, 동시에 몸에서 푸른빛을 뿜어냈다. 신체 강화였다.
정우도 더 기다릴 거 없이 상대를 쫓기 시작했다.
정수 파동은 너무 눈에 띄니 검을 뽑아서 찔러 죽이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생각이 오래가진 않았다.
얼마 달리기도 전에 여자의 맞은편에서부터 두 개의 푸른 점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누군가의 안광이었다.
“오늘 별걸 다 보네.”
굵직하면서도 낮은 톤의 목소리.
깡마른 30대 남자였다.
이때 여자는 정우를 신경 쓰느라 정작 전방을 제대로 경계하지 못한 상태였고, 덕분에 남자와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됐다.
“헉!”
깜짝 놀란 여자가 신음을 흘리며 급제동했지만 새로 나타난 녀석은 당황한 기색도 없었다.
순식간에 온몸을 파랗게 빛내더니 여자의 종아리를 거세게 후려 찼다.
빠득!
‘……미친.’
정우는 여자의 다리가 기이한 각도로 구부러지는 걸 보면서 경악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를 깨닫기도 했다.
다리가 부러진 순간, 여자가 유지 중이던 신체 강화가 툭 꺼져 버렸다는 사실 말이다.
왜일까. 육체에 손상이 발생해서?
아니다. 저건 정신적인 문제였다. 다리가 박살 나자 여자의 정신력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정수를 활성화할 수 없을 정도로.
정우도 섬광탄을 맞고서 정수에 대한 제어권을 잠시 잃은 적이 있기에 방금 본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끄악, 끄아악!”
여자는 어떻게든 극심한 고통을 참아 보려는 듯 악을 써 가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마저도 상대가 목을 쥐고서 들어 올리는 바람에 중단됐다.
“읍, 으읍……!”
성대의 개폐가 불가능할 정도로 목이 꽉 조여지자 여자의 입과 눈에서 액체가 줄줄 흘러나왔다.
놈이 상대를 제압하는 방식은 너무나 원시적이어서, 포식자 위치의 짐승이 먹잇감을 유린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실제로 놈은 ‘포식자’였다. 머리 위에 문구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같은 각성자인데도 이렇게 다르구나.’
정우는 이미 시야에 들어온 두 사람의 정수량을 보고 있었다.
남자가 대략 4만 개, 여자는 1만8천 개였다.
아무리 정수량이 크게 차이 난다지만 이런 식으로 싸울 수도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그러나 정우는 남자가 자신을 도발하기 위해 일부러 ‘이런 식’을 선택했다는 것까지는 몰랐다.
놈이 직접 의중을 밝히기 전까진 말이다.
“넌 여자가 이렇게 당하는 걸 보고도 아무렇지 않나? 독특한 놈이네.”
여자의 숨이 끊어질 무렵 사내가 이렇게 물어 왔고, 정우는 주변을 슥 둘러본 뒤 건조한 어조로 대답했다.
“좀 과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피차 살인마 아닌가? 자업자득이야. 하지만 너도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억울해하면 안 되겠지.”
“아하.”
놈은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씩 웃었다.
일반인 같았으면 오금이 저렸을 정도로 소름 끼치는 웃음이었지만 상대의 정수량을 아는 정우로선 그리 무섭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구원자의 최대 메리트가 아닐까.
“끕.”
이윽고 여자가 외마디 소리와 함께 숨을 거뒀다.
곧 그녀의 몸에서부터 정수 구체가 튀어 올랐고, 사내가 재빨리 몸을 뒤로 뺐다.
대량의 정수를 흡수할 때 찾아오는 후유증을 피하겠다는 거다. 심상치 않은 적이 코앞에 있는 상황이니까.
이것 또한 사내가 숙련된 각성자라는 방증이었다.
‘저런 놈이 나하고 비슷한 수준이었다면 꼼짝없이 당했겠네.’
정우는 몸에 보호막을 두르면서 주변을 다시 둘러봤다.
그러자 대번에 사내가 질문을 던져 왔다.
“자꾸 뭘 보는 거냐.”
이에 정우가 정수 칼날을 뽑아내며 눈을 번득였다.
“널 손질할 짬이 날지 좀 봤다.”
“뭐?”
사내는 그렇게 되물으면서도 전신에 보호막을 둘렀다. 그러곤 쏜살같이 뛰어오는 정우를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이 건방진 새끼가!”
하지만 두 눈은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정우가 뽑아낸 정수 칼날의 밀도가 보통이 아니라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보호막과 신체 강화까지 유지하며 달려오는 중이 아닌가.
쉬아아악!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정우의 칼날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씨팔!”
사내로선 급한 대로 응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때 그조차도 처음 보는 현상이 발생했다.
콰드득!
“……?”
상대의 공격을 받아 낸 자신의 칼날에 흰 균열이 생기더니.
빠각.
수십 조각으로 깨져 버린 것이다.
“어?”
사내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허공에 흐트러진 칼날 파편을 바라봤다.
반면 정우는 물체화 된 정수가 박살 나는 걸 벌써 두 번째 보는 것이었기에 놀랄 필요가 없었다.
그는 멀거니 선 사내의 복부에 냅다 주먹을 날렸다.
그러자 놈이 유지하고 있던 보호막마저 계란 껍데기처럼 깨졌다.
까드득.
“우억!”
복부에 시퍼런 주먹이 꽂힌 사내가 헛구역질을 하며 짧게 경련한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용케 왼손으로 칼을 빚어 정우의 목덜미를 찔렀다.
틱!
물론 목덜미는커녕 보호막에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아직 살 만한가? 너 정도 되는 녀석은 어떤 짓까지 해야 무너질지 궁금하네. 억울해하지 마라.”
정우의 이 말에 사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뭣……?”
“억울해하지 말라고.”
콱.
이번엔 정우의 손가락이 사내의 오른쪽 눈을 쑤시고 들어갔다.
이에 놈의 안륜근이 반사적으로 수축하며 이물질을 꽉 물었다.
“트하아아악!”
생존 본능이 극한까지 치솟은 사내가 모든 정수를 보호막 복원에 쏟았지만 정우의 팔을 감싼 정수 밀도가 훨씬 높은 탓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놈의 머리 근처에서 푸른 막이 생겨났다 도로 소멸하길 반복했다.
드드드득…….
대체 어느 정도의 고통을 느끼고 있는 건지, 사내의 신체는 생물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진동했다.
곧 입에서 토사물이 쏟아져 나왔고, 시큼한 냄새가 나면서 바지가 젖었다.
“트익, 트힙!”
입에선 웃는 건지 우는 건지 가늠하기 어려운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자 보호막 재생 시도가 끊어졌다. 모든 정수 활동이 멎은 것이다.
“…….”
정우는 상대의 근육 경련을 조금 더 지켜보다가 손가락을 빼냈다.
츠릅.
찌그러진 안구가 바깥으로 흘러나오다 말고 어중간하게 걸쳐졌다.
사내는 누가 봐도 끔찍한 몰골이 되어 있었지만 정우는 이상하리만치 아무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홍대에서 고문을 시도할 적에 느꼈던 거북함조차도 없었다.
대신.
“어……?”
갑자기 흐릿해진 시야에 정우가 눈가를 만졌다. 그러자 뭔가 주룩 흐르더니 입술에까지 닿았다.
짜다.
눈물이었다.
그러나 지금 혹시 슬프거나 분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결코 아니었다. 어떤 감정이 있다기보다는 공허한 쪽에 가까웠으니까.
그렇다고 신체가 오작동을 했다고 보기엔 타이밍이 너무 공교롭다.
정우는 이유 모를 불쾌감을 느꼈다.
* * *
“그게 아니야! 이렇게 하는 거라니까?”
민구는 성을 내면서도 상대 역시 답답할 거란 걸 알았다. 자신도 이걸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할지 몰랐으니까.
파앗.
민구를 중심으로 펼쳐진 보호막이 직경 5미터 수준까지 늘어나자 ‘냄새’가 보호막 외곽에서 머리를 들였다 빼길 반복했다.
거대한 몸에선 이미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는 중이었다.
즉, 정수로 뭔가 해야 한다는 것까진 이해했는데 그 방법을 정확히 모르는 거다.
‘어떻게 보호막 쓸 줄을 모르지?’
민구는 알 수 없다는 얼굴로 호랑이를 쳐다봤다.
어쩌면 보호막을 쓰지 않아도 전투에서 이겨 온 탓에 배울 기회를 놓친 걸지도 모른다.
아까도 신체 강화만으로 다수의 적을 상대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것도 어설픈 녀석들에게나 통할 터.
‘언젠간 임자를 만나서 죽게 될 거야. 지금까진 운이 좋았을 뿐이지.’
심지어 이놈은 다른 힘도 쓰지 않는다.
민구도 이제야 튜토리얼을 마친 상태라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긴 했다.
보유한 정수가 1만 개를 넘어가면 세 가지 유형의 정수 활용을 모두 할 수 있다는 점 말이다.
|물체화.
|방출.
|강화.
이 중에서 냄새가 사용하는 힘은 강화 하나뿐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보호막은 저기에도 끼지 못하는 기본 능력이란 거.
크릉.
놈도 슬슬 지치는지 피곤한 기색을 내비치며 제자리에 앉았다.
“아, 제길.”
그러고 보니 녀석의 상처는 지금도 계속 악화 중일 게 아닌가.
“저희는 의사부터 찾으러 가야겠습니다. 목사님은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민구가 이렇게 묻자 석환이 난감하다는 얼굴로 자신의 아들을 쳐다봤다.
“글쎄요…….”
교회가 바로 이 근처인데도 그리로 돌아가겠다는 말이 대번에 나오지 않는다.
민구는 그걸 보고서 이 남자가 뭘 고려하고 있는지 알아챘다.
“안 됩니다. 전 여러분을 책임질 생각까진 없습니다. 제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찬데.”
민구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왜인지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실은 이미 많은 걸 책임지고 있지 않은가.
호랑이를 살려 보려고 애쓰는 중이고, 어쩌다 만나게 된 정혜 역시 웬만하면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란 걸 스스로 잘 알았다.
이런 와중에 목사와 소년까지 들인다면…….
‘내 능력 밖이야.’
부담스러웠다. 당장 살려 줬으면 됐지 미래까지 보장해 줘야 할 의무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뜻밖에 정혜가 끼어들었다.
“아니, 구해 줄 땐 언제고 다시 버리고 간다고요? 사실상 죽으란 소리잖아요. 지금 세상이 어떤지 잘 아시면서.”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녀 역시 민구에게 얹혀살고 있는 신세이므로 주제넘은 소리였다.
“거 참.”
민구는 이 점을 지적하려다 그냥 한숨을 쉬는 걸로 넘겼다. 주제넘은 짓을 하고 있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길에서 마주친 호랑이를 돕기로 결심한 시점부터 행로가 많이 틀어졌다.
심지어 이 네발짐승은 그냥 짐승이 아니라 구원자이기까지 하다.
‘구원자…….’
무심결에 냄새의 신분을 되새긴 민구는 여태 간과하고 있던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냄새야.”
그의 부름에 호랑이가 귀만 쫑긋 세웠다.
“구원자가 뭘 하는 애들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