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85
85화. 태동(4)
* * *
오후 9시 34분.
서울 남부 교도소 4층의 종합 진료실.
두 남자가 진료실 구석에 스탠드를 켜 두고서 한창 논의 중이었다.
“이쪽은 어떻습니까?”
“글쎄요, 일단 진입로가 생긴 지역이어야 하는데…….”
“그럼 여기?”
툭.
태휘의 뭉툭한 손가락이 대한민국 전도의 어느 지점을 짚었다.
중성이 진입로 생성 지역이란 의미로 검게 마킹해 놓은 양평이었다.
“농지 여건이야 상당히 좋겠지만 교통이 나쁜 것도 그렇고, 워낙 추운 지역이라 겨울을 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니, 이 시국에 교통이 무슨 소용입니까?”
태휘가 어이없다는 듯 이야기하자 중성이 턱을 쓰다듬으며 낮게 웃었다.
“정말 이 나라의 모든 것이 전부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최악의 경우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닐 가능성도 충분히 있지요.”
만에 하나 몇몇 주요 인프라가 잔존하게 된다면 그것들은 대개 서울과 일부 공업 지역에 남아 있을 거다. 그러니 정착지를 정할 땐 타 지역과의 왕래가 얼마나 편리한가도 따져야 한다는 게 중성의 주장이었다.
“농지를 좀 줄이더라도 교통망을 포기해선 안 됩니다. 나중에 크게 후회할 때가 올 겁니다.”
물론 교통망을 십분 활용하기 위해선 차와 기름, 엔지니어들도 필요하며 현재는 먹통이 된 각 도로의 정리 작업도 요구된다.
정말 정우의 전망대로 국내 총인구가 백 단위로 줄어든다면 사실상 이번 세대에선 해내기 어려운 과업이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많은 경우를 고려해야 한다.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몰라.’
중성은 고뇌 가득한 표정으로 지도를 훑었다.
그러더니 곧 한 지점을 손으로 짚었다.
슥.
도농 복합시, 남양주였다.
“남양주? 교통이 썩 좋지 않은 건 피차 마찬가지 아닙니까.”
태휘가 중성이 가리킨 곳을 보고서 고개를 갸웃했다.
“상대적으로 봐야지요. 양평보단 남양주가 서울에서 두 배는 더 가깝습니다. 인접한 구리시엔 철도가 지나가니 상황을 봐서 정착지를 이전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중성이 남양주를 자신의 1지망으로 확정했다.
그가 서울을 놔두고 자꾸 주변 지역을 고려하는 건 진입로 때문이었다. 아무리 방주 탑승자들이 괴물의 추적을 받지 않는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적이 되는 건 아닐 것이다.
또한 정착지는 그저 몸을 의탁하는 지역일 뿐 실질적으론 주변 지역을 돌며 자원을 수집하고 확장 계획을 실행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온 사방에 진입로가 있는 서울을 근거지로 삼는다는 건 너무 큰 모험이었다.
‘농지 확보라는 것도 먼 미래를 위한 일이지. 이제 막 농사를 지어서 오는 겨울을 날 순 없어. 올해는 물자를 최대한 끌어모아서 버텨야 한다.’
중성의 머릿속에선 러프하게나마 향후 벌어질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중이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그가 제어할 수 없고 감히 예상할 수도 없는 요소가 하나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박정우.
“선웅 씨.”
“예?”
중성의 부름에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선웅이 고개를 돌렸다.
“정우 씨와 같은 회사를 다녔다고 하셨지요?”
“예, 무슨 일이십니까?”
선웅이 그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고, 이에 중성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정우 씨는 어떤 사람입니까? 아는 선에서 작은 것 하나라도 빠짐없이 말씀 좀 해 주십시오.”
* * *
오후 9시 52분.
서울 남부 교도소 진입로 끝자락.
길쭉한 창 형태의 푸른 빛줄기가 허공을 갈랐다.
파아아앗!
마치 조명탄처럼 이동 경로를 따라 불을 밝힌다.
그러다 정신없이 달음질하던 어느 사내의 등허리에까지 닿았다.
“컥!”
시퍼런 빛이 자신의 명치와 배꼽 사이를 찢고 나오는 걸 본 사내는 외마디를 토하며 앞으로 넘어졌다.
텁!
가까스로 바닥을 짚었으나 가슴 아래가 허전하다는 걸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속이 메스껍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엄연한 착각이었다.
그에게 더는 위장이 없었으니까.
파파팟!
뒤편에서부터 들려오는 날쌘 기척.
“……!”
사내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고, 그 순간 누군가 그의 머리를 밟아서 바닥에 꽂았다.
“으웁!”
입술이 땅바닥에 짓뭉개진 탓에 신음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이게 사내가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소리였다.
스아악.
허공에서 내려온 정수 칼날이 그의 목덜미를 관통했고, 그나마 몸 안에 남아 있던 여분의 피마저 바깥으로 흘러나오게 됐다.
“…….”
사내의 머리를 밟고 있던 자는 바로 박정우.
현시점 구원자 1위를 유지 중이고, 이전보다 정수가 엄청나게 불어난 상태였다.
육중하다, 라는 감상이 절로 나오는 정수 칼날의 크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슷.
그가 의식 속으로 시선을 넘기자 지금까지 모은 정수 총량이 숫자로 표시됐다.
237,413.
2위로 밀려났을 때가 대략 10만 개였으니 수 시간 만에 두 배로 불린 셈이다.
‘이리로 오던 녀석들은 얼추 정리된 거 같은데.’
정우는 푸른 안광을 뿌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발치의 패스파인더는 정방향에 가까운 동쪽을 가리키는 중이었다.
이제 결정해야 할 때다.
그는 휴대폰을 들어서 선웅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신호가 두 번 울리기도 전에 현장음이 흘러나왔다.
-예, 정우 씨. 조선웅입니다.
“그쪽은 별일 없습니까?”
-네. 아직 접근해 온 사람은 없었고, 명일 씨 말로는 건물이 워낙 넓어서 기척만 잘 죽이고 있으면 발각되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그럼 우리도 마찬가지겠네요. 먼저 누가 숨어 있었어도 눈치채기 어려웠을 테니.”
-아……. 그럴 수도 있지요.
당황한 듯한 선웅의 목소리.
정우는 주변을 다시 둘러본 뒤 말을 이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먼저 공격하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벌어 보세요. 전 도심 쪽을 훑어보고 가겠습니다.”
이 지역 각성자의 평균 정수량이 소총 따위에 죽을 수준이 아니라서 하는 이야기였다.
이에 선웅이 불안감 섞인 목소리로 물어 왔다.
-도심으로 나가신다고요? 언제쯤 돌아오신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글쎄요, 가급적이면 자정쯤엔 복귀할 생각입니다.”
자정이면 앞으로 두 시간.
하지만 선웅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네, 알겠습니다.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바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예.”
정우는 건조하게 대답한 뒤 통화를 마쳤다.
그러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벌써 오륙 명이나 되는 방문자를 처리하느라 지친 탓이다.
물론 혹시 모를 지각자를 대비해서 좀 더 기다릴 필요도 있었다.
만에 하나 자신이 여길 떠난 뒤에 누군가 교도소로 진입하면 그것처럼 낭패인 일이 없을 테니까.
“…….”
멀거니 어둠을 응시한다. 은근히 풍겨 오는 피 냄새 말곤 별다를 게 없었다.
사람이 오기는커녕 바람 한 줄기 불지 않았고, 덕분에 정우는 바짝 날이 서 있던 신경을 조금이나마 풀어 놓을 수 있었다.
그러다 자연스레 시야 좌측 하단의 자그마한 사각형에 눈이 닿았다.
다름 아닌 ‘최초의 채널’. 구원자 채팅창이었다.
‘아.’
정우는 자신이 정말 오랫동안 여길 등한시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한때는 이 안에 붙어 있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여기지 않았던가.
그런데 막상 1위 자리를 굳히고 나니 채널에 집중하지 않게 됐다.
사실 그럴 여유가 없었기도 하다. 온종일 엄청난 광경들이 시야를 채우고 있었으니까.
쉬지 않고 줄 바꿈 중인 박스 안의 문자열.
정우는 별생각 없이 그것들을 읽었다.
그리고 알게 됐다.
자신이 앞만 보고 달려오는 동안, 구원자 세계에선 엄청난 이변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일단 대화 주제가 완전히 달라진 상태였고, 모종의 서식이 눈에 띄었다.
[21] 청라가드 : 인천 근교에서 외과의 구합니다. 18위까지만 만납니다. jhk04. [36] 정석 : 수원에서 기관지 확장제 급구하고 있습니다. 30위까지 가능합니다. adop741.자신의 위치, 원하는 물품, 자기가 감수할 의향 있는 상대의 최대 순위, 그리고 이상한 아이디.
‘이게 다 뭐야?’
정우는 눈을 몇 번이고 껌뻑였다.
‘정석’ 같은 녀석은 낯익은 닉네임이었다. 그러니 여긴 최초의 채널이 맞다.
그런데 채팅 내용만 봐서는…….
‘여기에서 거래를 한다고?’
상상도 못한 일이다.
이 시점에 50위 안쪽에 들어와 있는 자들이라면 이 세계 생리를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럼에도 자기 위치를 노출하며 각자 원하는 걸 공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급한 일이니 저러는 것일 테지만 죽으면 무슨 소용인가.
물론 눈대중으로 봐도 나름의 안전장치는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자기보다 너무 강한 상대는 만나지 않으려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상대 신분을 어떻게 가려낸단 말인가.
혼란스러워진 정우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채팅을 주시하는 사이, 눈에 확 들어오는 문구가 나타났다.
[47] 두우로 : 서울 동부입니다. 아이를 받아야 하는데, 혹시 도와주실 분 계신가요? [38] 기사도 : 애가 나온다고요? [47] 두우로 : 예, 이미 진통이 시작됐어요.47위. 이 채널에선 완전 하위권이다. 그러니 거짓말이거나 함정은 아닐 것이다.
[47] 두우로 : 제가 뭐 데리고 있는 의사도 없고, 전혀 아는 게 없어서……. 도움 좀 부탁드립니다. 위로 한 20위까지도 보고 있습니다.이 와중에 순위 제한을 완전히 풀진 못하는 모습.
정우는 이 대화를 흥미롭게 지켜봤다.
[38] 기사도 : 외과도 아니고 산부인과 의사를 데리고 있는 분이 계시려나? 쉽지 않을 거 같은데. [47] 두우로 : 꼭 의사가 아니어도 되고요, 간호사든 산파든 애를 무사히 받을 수만 있으면 됩니다.그리고 이때 ‘그놈’이 나타났다.
[6] 폭우 : 애가 나온다는데 순위를 따지고 있습니까? 다 내려놓든가 아니면 알아서 낳아야지.폭우. 일전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던 놈인데 여전히 채널에 남아 있었다.
심지어 폐쇄 권능 확보를 목전에 둔 채로 말이다.
[6] 폭우 : 마침 근처니까 진짜 절실하면 쪽지 주시죠. 여기에 아이디 먼저 적는 거 잊지 마시고. deluge.‘쪽지?’
구원자 채널 내에는 채팅 외에 다른 기능이 없다. 이건 분명했다.
[47] 두우로 : 제가 아직 아이디가 없는데, 어디서 만들면 될까요?두우로란 사람은 이 채널에 온 지 얼마 안 된 신참이었다.
이에 폭우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6] 폭우 : 195.168.78.42아이피 주소다. 이들이 채널 내에서 주고받던 아이디가 모 사이트에서 생성한 계정이었던 것이다.
정우는 잽싸게 휴대폰을 꺼내 저 아이피와 방금 본 구원자들의 아이디를 적었다.
그러곤 휴대폰으로 인터넷 창을 열었다.
대체 무슨 사이트고, 누가 만들었기에 구원자들이 저길 이용하기 시작한 걸까.
주소창에 폭우 녀석이 말한 아이피를 적어 넣자 한동안 로딩이 진행되더니 까만색의 새 웹페이지가 나타났다.
「가나안.」
-상인들의 땅, 가나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고유한 아이디를 통해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고 뜻이 맞는 상대를 찾아 물물교환을 시도해 보세요.
-단, 본인의 부주의에 의한 손실은 가나안이 책임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