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86
86화. 태동(5)
‘부주의에 의한 손실…… 이라고?’
정우는 기가 막힌단 표정으로 문구를 몇 번씩 읽었다.
이 사이트를 만든 녀석은 구원자끼리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잘 알고 있던 거다.
아무리 비슷한 수준을 골라 만난다 하더라도 둘 중 하나가 다른 마음을 먹는 순간 파국.
심지어 거래를 먼저 요청해 오는 쪽이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
자기 자식이 천식 환자인데 흡입기가 다 떨어져 간다고 생각해 보자. 어떻게 해서든 약을 구하려 들지 않겠는가? 내줄 것이 없어도 일단 거래를 개시할 거다.
또한 채널 내부와 이 사이트를 통해 아이디 교차 검증을 한다지만 이것도 완벽히 안전하진 않다. 상대측에 각성자가 하나 더 있을 수도 있고, 둘 이상의 구원자가 공모해서 함정을 파는 것도 가능할 테니까.
‘대체 이게 어떻게 자리 잡은 거지?’
정우는 그간 채널을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은 걸 후회했다.
1위와 거래를 시도하려는 자가 있진 않았겠지만 이런 제도가 정착되어 간 과정은 눈여겨볼 가치가 있었을 터.
[27] 구패: 서울 서부입니다. 외과의 찾고 있습니다. 20위 초중반까지 봅니다. podo0604.또 외과의를 수배하는 공고다.
이건 다른 구원자들 역시 자신만의 공동체를 꾸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 봐야 성역을 얻지 못하면 오래 살려 두기 어려울 텐데.’
정우는 채널에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휴대폰 화면을 응시했다.
툭.
가나안의 메인 페이지를 건들자 한 줄의 안내 문구가 나타났다.
-가나안에서 사용할 아이디를 입력하십시오.
이와 함께 문자 입력기가 영문으로 자동 전환됐다.
‘영문 아이디만 가능한 건가.’
정우가 가장 먼저 시도한 건 그의 채널 닉네임 ‘인간’과 동일한 의미의 ‘human’이었다.
-이미 존재하는 아이디입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반려됐다.
뒤에 숫자를 붙이면 중복을 피할 수 있겠지만 그러면 누군가의 아류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 수밖에 없다.
구원이란 의미의 ‘salvation’을 쓸까도 싶었으나 너무 거창한 것 같아 제외. 게다가 이것 역시 높은 확률로 선점됐을 거다.
잠시 고민하던 정우는 human의 유의어인 ‘mortal’을 입력했다.
그러자 대번에 비밀번호 설정 페이지로 넘어갔다.
불현듯 불안한 생각이 든 것도 이때였다.
‘잠깐…… 사이트 관리자는 구원자들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다 알 수 있는 거잖아?’
이전 세계의 웹 사이트 윤리를 생각하면 안 된다. 지금은 지구가 멸망하는 중이다.
관리자가 회원들의 아이디를 도용하는 건 물론 쪽지 내용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
정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일단 비밀번호를 적어 넣었다. 만일을 대비해 오늘 날짜와 현재 시간을 숫자로 쭉 연결한 임시 비밀번호였다.
슷.
-mortal님 환영합니다. 아이디 생성이 완료되었습니다.
화면이 또 넘어가더니 본격적인 서비스 화면이 등장했다.
그래 봐야 ‘쪽지함’이란 버튼 하나가 달랑 붙어 있을 뿐이었지만 이곳에 50위 안쪽의 구원자들이 출입한다는 걸 고려하면 무게감이 사뭇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툭.
쪽지함을 열자 간단한 안내 쪽지가 하나 와 있었다.
「회원님의 쪽지함 개설이 완료되었습니다. 사이트와 관련한 건의 및 불만 사항은 ‘master’에게 문의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게시판이라도 있을 줄 알았더니, 쪽지를 주고받는 게 전부인가.’
정우는 내심 아쉬운 마음으로 휴대폰을 껐다.
그래도 다른 구원자와 개별적으로 소통할 방법이 생겼다는 건 훗날 큰 변수가 될 수도 있었다.
이걸 어떻게 활용할지는 다른 일행의 의견도 들어 보는 게 좋겠단 생각이 든다.
특히 외교부 실무자였던 중성이라면 무언가 쓸모 있는 답을 내놓지 않겠는가.
만약 현 1위가 구원자 채널에 아이디를 밝힌다면 어떤 쪽지가 날아올까?
최초의 채널이 아닌 다른 채팅방에서도 가나안을 이용 중일까?
대체 이 사이트는 누가 만들었는가?
관리자가 회원 정보를 악용한다면 어떤 사태까지 벌일 수 있는가?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이었다.
* * *
오후 10시 4분.
노량진 북부의 주민 센터 앞.
민구가 출입문 근처에 엎어진 사내를 발로 밀어내자 구부정하던 상체가 썩은 호박처럼 찌그러졌다.
쩔걱.
정수 실이 살짝 비껴간 바람에 깔끔히 토막 나지 않아서다.
“새 시대를 여니 마니 하기엔 별거 없어 보이는데…….”
민구가 주민 센터에 붙은 현수막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길잡이를 해 온 김석환 목사가 맞은편의 5층 건물을 가리켰다.
“그 사람들이 본부로 쓰고 있는 건 저 건물입니다. 지금은 심야 예배를 준비하느라 바쁠 거고요.”
“이 와중에 예배를 본다고요? 미친놈들일세.”
“네, 저쪽도 엄연히 종교인이긴 합니다…….”
“…….”
석환의 말에 민구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주민 센터는 사람을 가둬 두는 용도로 쓰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뭐, 잘된 거 아닙니까? 저쪽이 예배 보는 사이 여기부터 털면.”
철컥.
민구가 대뜸 출입구의 문고리를 돌리자 석환이 깜짝 놀라며 그를 말렸다.
“자, 잠깐……!”
그러나 이미 문이 열린 뒤였다.
‘잠겨 있지도 않네?’
민구는 철문이 스륵 움직이는 걸 보며 본능적으로 보호막을 전개했다.
파앗.
그리고 거의 동시에 문 안쪽에서부터 시퍼런 정수 칼날이 튀어나왔다.
츠츠츳!
“헉!”
철제 문짝이 두부처럼 썰리는 걸 본 석환이 신음을 흘린다.
최전방에 있던 민구는 잽싸게 뒤로 물러서며 석환을 밀쳐 냈다.
“비켜요! 방해되니까!”
전에 없이 날 선 목소리.
신경이 곤두선 민구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예, 옙……!”
당황한 석환이 자리를 피하기 위해 뒤로 돌자 저 멀리서부터 엄청난 속도로 접근 중인 호랑이가 눈에 들어왔다.
민구가 일부러 세준과 정혜를 지켜 주라고 당부까지 했는데 그걸 무시하고 오는 거다.
크릉!
길을 비키라는 듯 호랑이가 석환을 향해 으르렁댔다.
그사이 민구는 주민 센터 안에서 튀어나온 사내와 벌써 세 번째 합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보안 담당인가? 그냥 얼치기는 아닌데.’
민구의 이마에선 진땀이 줄줄 흘렀다.
상대의 기세도 기세거니와 정수량이 상당하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삿.
민구가 측면으로 빠지며 정수 실을 휘둘렀으나 놈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오히려 거리를 더 좁혀 왔다.
자신의 보호막이 깨지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는 것이다.
츠츳!
역시나 민구의 공격은 놈의 보호막에 흰 균열을 내는 데 그쳤고, 턴을 넘겨받은 상대방이 번개처럼 칼날을 내질러 왔다.
‘제길.’
민구가 사용하는 정수 실은 ‘방출’의 일종이다. 실을 휘두르는 데 소모해 버린 정수는 자연 회복 시간인 약 3초가 되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따라서 방금 공격을 마친 민구가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정수는 평소의 반이 채 되지 않았다.
스아앗.
남은 정수를 전부 보호막에 쏟았지만 이번 공격을 버텨 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어떻게든 이번 건 피해야…….’
민구는 보호막이 뚫릴 것을 상정하고 그다음 수를 계산했다.
그러나 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상대의 칼끝이 민구의 보호막을 찌르는 순간, 시퍼런 궤적이 둘 사이를 갈라 놨으니까.
부우욱!
묵직한 기척과 함께 민구의 눈앞에서 사내가 바닥에 처박혔다.
“크어억!”
여태 묵묵히 칼을 휘두르던 놈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고, 민구는 비로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인지했다.
“아니, 여길 언제……?”
그의 시야엔 사내의 목을 꽉 문 ‘냄새’의 모습이 한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또 깨닫게 됐다. 이번에도 녀석이 상대의 보호막을 단번에 박살 냈다는 사실 말이다.
* 많아.
“뭐?”
아직 경황이 없는 상태라 민구는 냄새가 무슨 이야길 해 오는 건지 바로 감지하질 못했다.
그러자 녀석이 입을 쩍 벌리며 주민 센터의 맞은편으로 몸을 돌렸다.
* 많아! 너. 약해!
“내가 약하다고? 이제 와서?”
민구는 이렇게 되물으며 냄새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자연스레 갈라지는 목소리.
등엔 소름이 촘촘히 돋아났다.
녀석이 황급히 자신을 도우러 온 이유가 따로 있었다.
두두두두…….
목사가 광신도들의 본부라던 건물에서부터 사내들이 물밀듯 쏟아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살기등등한 모습. 눈대중으로 봐도 족히 30명은 될 것 같다.
“이 새끼들, 믿는 구석이 있었구먼.”
민구는 헛웃음을 지으며 일렬로 도열하기 시작한 사내들을 바라봤다.
이쪽과의 거리는 대략 10미터.
정수 실의 사정권 밖이긴 하지만 놈들이 달려들 때 타이밍만 잘 맞추면 너덧 명 정돈 끊고 시작할 수 있을 거다.
문제는 아직 보호막조차 제대로 쓰질 못하는 냄새 녀석이다.
이번 전투는 교수형 현장을 습격하던 것과 차원이 다르다. 아무리 신체 강화에 특화되었다고 한들 수십 명의 공격을 전부 피할 수 있을까?
‘이거 예상보다 더 좆된 걸지도 모르겠는데.’
주제넘게 너무 큰 판에 뛰어들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뒤늦게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내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쪽팔리지 않는가.
“또 모르지. 전부 조무래기일 수도 있잖냐.”
민구가 냄새를 쳐다보며 혼잣말을 빙자한 자문을 구했다.
그러나 놈은 듣기나 한 건지 목덜미의 털을 실룩거리며 사내들을 훑어보기만 했다.
혹시 긴장한 걸까?
정수를 읽어 낼 줄 아는 이 녀석이 긴장했다면 이번은 결코 무시 못할 위기라는 뜻이 된다.
민구도 사뭇 뻣뻣해진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이윽고 드러나기 시작했다.
놈들이 굳이 일렬로 도열했던 이유가.
슥, 스슥, 슥.
허공으로 비스듬히 올라간 수십 개의 팔.
그러더니.
쉬이익!
날쌘 소리를 내며 공기를 갈랐다.
전부 정수 창을 날릴 줄 아는 놈들이었던 거다.
“이 씨발!”
예상치 못한 창 세례에 민구는 모든 정수를 보호막으로 돌렸다.
스아앗.
그러다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네발 구원자의 이름을 외쳤다.
놈이 멍한 눈으로 창이 날아드는 걸 보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냄새야아!”
그러자 순간 녀석의 은빛 수염이 움찔했다.
수십 개의 정수 창은 이미 현장을 덮치기 직전이었다.
민구는 자신의 능력으론 냄새를 도와줄 수 없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반격 기회라도 잡아 보기 위해 측면으로 몸을 날렸다.
텁!
두터운 군화 밑창이 땅바닥을 박차며 묵직한 소리를 낸다.
그리고 곧 그 소리 위로 아주 날카로운 파열음이 덧씌워졌다.
키지직, 치칙!
민구는 자신의 보호막에 창이 들이박히는 소리인 줄 알았으나 이내 다시 생각하게 됐다.
“……?”
언젠가부터 사위가 푸르스름했기 때문이다.
슥.
고개를 들어 보니 머리 위의 공간이 통째로 일렁인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자 냄새가 입을 크게 찢으며 울부짖고 있는 게 보였다.
* 단단한. 가죽!
놈이 반경 10미터짜리 보호막을 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