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88
88화. Mortal(2)
“어떻게 된 겁니까?”
용헌이 당황한 모습으로 정우와 선웅을 번갈아 봤다.
덕분에 이 공동체에 합류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은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1세대 방주 탑승자 중에서도 원로 격에 속하는 용헌이 저렇게 놀랄 일이라면 대체…….
“저도 대리자라는 건 처음 봅니다. 괜찮다면 설명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정우가 이렇게 묻자 선웅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허공 어딘가를 응시했다.
자신에게만 보이는 어떤 문구를 읽고 있는 것이다.
-인간, 조선웅 님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습니다.
-당신에게 배정된 역할은 ‘대리자’입니다. 구원자를 대행하여 과업을 완수하십시오.
그가 안내문을 모두 읽고 나니 또 다른 문자열이 나타났다.
그런데 선웅을 위한 문구가 아니었다.
-대리자는 담당 구원자의 결정을 기다려 주십시오.
‘담당 구원자?’
대번에 선웅의 시선이 정우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이때 정우는 이미 눈앞에 떠오른 문구를 읽고 있었다.
-귀하의 과업을 도울 대리자가 출현했습니다.
-대리자와 권한을 공유하려면 아래 항목을 활성화하십시오.
「방주 관리」 | 비활성화.
대리자가 지정한 대상을 방주에 태우거나 내보낼 수 있도록 합니다.
「정수 차용」 | 비활성화.
대리자가 구원자에게 ‘차용 요청’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구원자가 요청을 승인하면 대리자는 일정 시간 동안 구원자의 정수를 대신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양도」 | 비활성화.
대리자에게 모든 정수와 방주를 양도하고 구원자 신분을 포기합니다.
「유언」 | 비활성화.
구원자가 사망할 경우 대리자에게 유언을 전달합니다.
“…….”
항목을 정독한 정우의 표정은 오묘했다.
네 개 항목 중 무려 두 개가 부정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구원자 신분 포기…… 유언? 멘탈이 가루가 될 때까지 달리다가 적당한 때에 자릴 물려주고 죽으라 이건가.’
쓴웃음이 절로 난다.
지구의 입장에서 구원자는 생존 도구에 불과할 테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대체로 헌것보단 새것의 기능이 더 좋으니까.
그래도 앞의 두 가지는 자신에게도 쓸모가 있어 보였다. 어떤 의도로 배치한 항목인지도 눈에 바로 들어왔고 말이다.
“당장 열어드릴 수 있는 권한은 전부 열어 두겠습니다.”
정우는 이 말을 하면서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문구를 나머지 일행에게도 공개했다.
그러자 중성이 대번에 ‘방주 관리’와 ‘정수 차용’의 용도를 간파했다.
“정착지 관리를 위한 존재인 거군요, 대리자라는 것은…….”
“예, 아마도.”
정우는 이 말을 하며 ‘대리자’라는 문구가 붙은 선웅을 응시했다.
정착지 조성에 필요한 인재도 어느 정도 모아가는 중이고 마침 성역 기능도 얻었다.
타이밍이야 대리자가 나타나기에 완벽하다만,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왜 이 사람이지?’
애초에 포식자 역할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사람 아니던가. 정말 구원자 대행을 할 수 있을까? 최악의 경우엔 ‘양도’를 통해 구원자 1위를 대체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틱, 틱.
정우가 방주와 정수에 대한 권한을 활성화하자 선웅의 시야에도 이를 알리는 문구가 나타났다.
특히 정수를 차용하는 방식은 상당히 독특했다.
-구원자가 정수 차용을 승인했습니다.
-이제부터 원격 청구 기능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더니 시야 우측에 모종의 인터페이스가 추가됐다.
[0/281,260.] [00:00.]현재 차용 중인 정수량과 잔여 시간일 것이다.
지금은 정수 차용을 하고 있지 않아 모든 수치가 0이었다.
하지만 선웅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세상에, 28만 개라고?’
정우가 가지고 있는 정수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순간.
다만 선웅에게 저 수치는 힘의 척도가 아니라 여태 죽어 간 생명의 개수로 다가왔다.
한편 중성은 태휘를 데리고서 정우에게 보고를 진행 중이었다.
“정착지 후보를 몇 군데 추려 봤습니다.”
“예, 어딘지 좀 볼까요.”
이에 태휘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대한민국 전도를 쫙 펼쳤고, 중성이 그 위로 펜을 갖다 대며 후보지를 짚었다.
“최우선으로 검토해야 할 곳은 남양주, 2지망은 경기도 이천, 3지망은 부산입니다.”
“부산이요? 양식장이라도 차릴 생각이십니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던 정우가 3지망에 의아함을 나타냈다.
“아닙니다. 진입로 때문입니다. 해상에는 진입로가 출현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여태 단 한 건의 제보도 없었으니까요.”
따라서 해안 도시는 뒤늦게 출현한 진입로에 의해 피해를 입을 확률이 상대적으로 낮다.
또한 부산에도 대성 그룹의 인프라가 상당수 있기에 물자가 풍부할 거라는 게 중성의 설명이었다.
“아, 대성.”
정우가 잊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당장 신경 써야 할 것은 정착지 확정과 인적 자원 확보였다.
진입로 생성 속도가 빨라진 탓에 비각성자가 죽어 나가는 것 역시 가속화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성 씨도 정착지 확보가 시급하다는 의견이시지요?”
정우의 질문에 중성이 선웅을 흘깃 봤다.
“예, 정착지 조성이 빨라질수록 정우 씨의 활동도 편해질 겁니다. 마침 대행권자도 생겼으니…….”
구원자가 사방을 돌아다니며 진입로를 폐쇄하는 동안 대리자는 정착지에서 벌어지는 여러 문제를 해결. 이것이 중성이 이해한 구원자와 대리자의 관계였다.
“그럼 더 지체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남양주는 가까운 편이니 바로 갑시다. 아침 식사는 헬기에서 하는 걸로.”
정우가 단번에 결론을 내린다.
실은 정착지보다 더 궁금한 것이 있어서였다.
그건 다름 아닌 진입로의 3일 차 변화.
그 안에서 어떤 것이 나오느냐에 따라 남양주 이후의 행로가 달라질 테니까 말이다.
* * *
비슷한 시각.
최상위 구원자들의 투표 소식에 잠을 깬 건 민구도 마찬가지였다.
「투표 결과에 따라 지금부터 진입로 생성 속도가 30% 증가합니다.」
“정신 나간 새끼들.”
물론 그가 투표 항목을 직접 봤다면 결코 욕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릉, 그르릉.
잠시 눈을 떴던 냄새는 그새 다시 잠든 상태였고, 정혜도 보기보다 피곤한 상태였는지 초췌해진 얼굴로 누운 채였다.
반면 김석환 목사와 그의 아들 세준은 이 와중에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저들을 굽어살피시길 바라옵고…….”
석환이 몸을 앞뒤로 흔들어 가며 거의 읍소를 한다.
세준은 그 정도 신앙심까진 없는지 기도를 드리다가도 종종 실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물론 그럴 만했다.
“힉, 히익!”
“아아…… 아…….”
사방에서 사람들이 쉬지 않고 이상한 소리를 내는데 보지 않고 배기겠는가.
“…….”
민구도 주변을 둘러보면서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현재 위치는 노량진 주민 센터 2층.
밤새 무슨 문제가 생길까 봐 결박을 풀어 주지 못했지만 이들이 바로 광신자들이 잡아 놨다던 인질이었다.
저마다 책상, 가스 배관 따위에 단단히 묶여 있었고 하나같이 온몸에 피멍이 가득했다. 피부의 본래 색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
다만 진짜 문제는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다들 제대로 된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었으니까.
민구는 어제의 일을 회상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들을 처음 발견했을 당시 민구가 이렇게 묻자 석환이 어두운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상상도 못할 가혹 행위가 있었노라고.
잡아 온 사람들을 강제로 개종시키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인데, 몇몇은 맞아 죽어서 이 자리에 없다고 했다.
“아니, 맞아 죽을 때까지 버텼단 말입니까? 개종이 뭐라고……. 받아들이는 척이라도 하는 게 죽는 것보단 나을 텐데.”
민구가 이렇게 말하자 석환은 이 건물의 최상부인 3층으로 가 보라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민구는 2층에 왜 남자들만 보였는지, 어째서 그들이 죽을 때까지도 광신도와 타협할 수 없었는지를 이해했다.
3층엔 여자들을 모아 놓은 상태였고, 실내 중앙에 얼룩덜룩해진 매트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오래된 체액 특유의 역한 냄새가 그의 안면 근육을 마구 일그러뜨렸다.
“……씨발.”
민구는 두 음절로 자신의 감상을 일축하고서 도망치듯이 2층으로 다시 내려왔다.
그러자 그새 사람들을 살펴보고 있던 석환이 한 사내를 그의 앞에 데려왔다.
“외과의라고 하십니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사내를 대신해 석환이 소개했다.
이 의사가 이곳에서 유일하게 제정신인 사람이었다.
죽거나 미치기 전에 광신도들과 타협한 거다.
팔목엔 상형 문자처럼 보이는 문신이 붓기도 빠지지 않은 채로 있었다. 아마 개종 표식일 터.
“당신, 이름이 뭡니까. 통성명도 안 할 생각이오?”
민구가 다그치듯이 묻자 그제야 의사가 입을 열었다.
“최…… 최성재라고 합니다.”
이에 민구는 한숨을 크게 쉬고선 상대의 어깨를 꽉 잡았다.
“성재 씨, 당장 환자 하나만 봐주시오. 부탁합시다.”
환멸 나는 밤이었다.
다시 오전 8시 20분.
민구가 2, 3층의 사람들을 풀어 줬지만 이들은 망부석처럼 자신이 붙들렸던 자리에 꼼짝 않고 있었다.
“정말 딱한 건 사실이나 여기에서 우리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민구가 턱에 힘을 준 채 단호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그러자 석환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충분히 해 주셨습니다. 이분들은 제가 어떻게든 해 보지요.”
“여기 남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어제만 해도 이 목사가 짐덩이처럼 느껴졌지만 막상 부질없는 짓에 생을 바친다고 하니 말리고 싶어졌다.
게다가.
“…….”
세준은 여기 남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 이것도 일종의 자살 아닙니까?”
민구가 그답지 않게 우물쭈물한다.
기독교에선 자살을 금기시 여기니 이건 큰 죄다,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였다.
솔직히 세준이란 녀석만 아니었어도 석환이 이곳에 남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을 거다.
45년이나 산 사람에게 이런 걸 간섭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말이다.
하지만 그 아들의 삶은 별개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이 가여운 사람들을 좌시할 순 없습니다. 그것 역시 용서받지 못할 죄일 겁니다.”
석환은 이미 마음을 굳힌 듯 완곡하게 고집을 부렸다.
“으음.”
민구는 고개를 살짝 젓고서 세준에게 시선을 줬다.
“넌 어쩔 생각이냐.”
“지, 지금 무슨 말씀을……?”
석환이 이것까진 예상 못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민구와 세준 사이를 가로막았다.
“아니, 저 아이의 의사도 물어봐야 할 거 아닙니까? 설마 여기 있기 싫다고 해도 억지로 데리고 있을 거요?”
민구는 더 심한 말을 하려다 가까스로 참았다.
자기 신념을 따라 주길 기대하는 걸 넘어서 강요하기에 이른다면 앞서 죽은 광신도들과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그건……. 아니, 세준이는 당연히.”
석환이 뒤를 돌아보며 자신의 아들과 눈을 마주쳤다.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지? 라고 묻는 거다.
그러나 갓 중학교에 입학한 소년이 이 상황에서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녀석의 동공은 쉴 새 없이 흔들렸고, 민구는 곧 석환의 어깨가 축 처지는 걸 보게 됐다.
“아들보다 저 사람들이 더 소중합니까? 물론 저들도 정말 안타까운 사람들이지만…… 하지만 이건 너무 미련한…….”
“가세요.”
“뭣……?”
“가시라고요!”
갑자기 석환이 성난 얼굴을 하며 민구를 밀어냈다.
“이 모든 일을 다 보고도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아들의 목이 매달렸을 때조차 분노하지 않던 그가 지금 화를 내고 있다.
극한의 ‘선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강박인가? 민구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정신도 온전치 않은 사람들을 좀 더 살려 두자고 당신 아들을 죽일 셈이오? 여기 있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니까?”
민구의 항변에도 석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미 이성적 대화 채널을 닫아둔 것 같았다.
크릉……!
뒤늦게 잠에서 깬 냄새가 이를 드러냈고, 민구는 괜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정혜 씨, 저 녀석이랑 의사 좀 데리고 밖으로 나가세요. 저도 곧 가겠습니다.”
“네, 넵!”
그의 말에 정혜가 얼떨떨한 얼굴로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그러다 구석에 우두커니 선 의사, 최성재를 발견하고선 작게 소리쳤다.
“이봐요, 살려 줄 때 얼른 움직여요. 얼른!”
“아.”
비로소 성재가 반응을 보인다.
정혜와 냄새, 그리고 외과의 성재는 짐을 잔뜩 싸 들고서 주민 센터 바깥으로 나왔다.
그러자 광신도들의 시체 토막으로 가득 찬 앞마당이 그들을 반겼다.
“허억!”
다시 봐도 결코 적응되지 않는 광경.
하지만 소름 끼치는 광경은 그것만이 아닌 것 같았다.
“어……?”
정혜를 따라 나오던 성재가 걸음을 뚝 멈추더니 어딘가에 시선을 꽂은 채 미동도 하지 못했다.
“무슨.”
이에 무심코 고개를 돌린 정혜도 이내 뻣뻣하게 굳었다.
“세, 세상에.”
스르릅…….
뭔가 입맛을 다시는 듯한 이질적인 소리.
시야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거대한 진입로가, 주민 센터 바로 옆에 생겨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