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89
89화. Mortal(3)
고오오오…….
커다란 터널에서 바람이 맴도는 듯한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정말 바람 소리일까? 잘 들어 보면 저음의 코러스 같기도 했다.
이 와중에 진입로는 주변 빌딩보다도 훨씬 커져 있었다.
세로로 곧게 선 직경 30미터의 타원형체. 그 안은 너무나도 검어서 한낮의 노량진 풍경과 극도로 대비됐다.
“미, 미, 민구 씨……!”
정혜는 진입로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민구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진입로가 갑자기 부피를 더 늘리는 바람에 곧 혀까지도 뻣뻣해졌다.
스르릅.
대체 얼마나 더 커질 생각일까. 순식간에 직경 40미터까지 늘어난 진입로는 이제 하늘마저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스륵.
진입로의 어둠 너머에서부터 무언가 기어 나왔다.
검고 깡마른, 길쭉한 팔.
청소부였다.
“도망……!”
외과의 최성재가 사색이 되어 뒷걸음을 친다. 그러다가 발이 꼬여서 옆으로 엎어졌다.
냄새는 여전히 정혜의 곁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는데, 진입로에서 청소부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걸 보고선 온몸을 파랗게 빛냈다.
* 위험해!
냄새가 그렇게 외쳤지만 정수 감응력이 낮은 정혜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대신 세준을 데리고 센터 밖으로 막 나온 민구가 그 말을 들었다.
“뭐?”
슥.
냄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민구.
“……!”
꽉 조여져 있던 동공이 순식간에 확장됐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큰 진입로는 둘째치고, 이미 그 안에서부터 수백의 청소부가 달려 나오고 있지 않은가.
놈들은 사방의 골목은 물론 건물 벽면에까지 달라붙어서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중 일부가 센터 코앞까지 들이닥쳤는데, 이때 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게 대체?”
두드드드…….
육중한 기척을 내며 다가온 청소부들이 민구 일행을 무시하고 지나간 것이다.
캬오!
흥분한 냄새가 청소부 행렬을 끊으며 달려들었지만 놈들은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랑이를 장애물로 여기고서 다른 골목이나 건물 옥상 등을 통해 우회했다. 여기서 머뭇거리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정혜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뺨을 감싸며 물었다.
그러나 민구라고 해서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었다. 그도 진입로를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알 것 같았다.
‘뭐가 무서워서 저렇게 도망가는 거지?’
곧 민구의 고개가 청소부들이 달려간 방향으로 돌아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위를 가득 채웠던 괴물들은 벌써 저 멀리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뭔가 더 나올 겁니다. 어서 여길 피합시다.”
민구가 세준과 정혜의 손목을 각각 잡아끌었고, 때맞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성재는 도로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듣기 거북할 정도의 구토 소리와 함께 말이다.
“우워어어어억!”
힘껏 벌린 성재의 입에서부턴 누런 토사물이 쏟아져 나왔다.
“……?”
당황한 민구가 성재를 부축하려 들자 이번엔 세준과 정혜 쪽에서 난리가 났다.
“씨발, 이게 무슨.”
이 자리에서 구토하고 있지 않은 건 반사적으로 보호막을 감은 민구와 냄새뿐이었다.
* 온다!
냄새가 귀를 납작하게 접으며 입을 좌우로 찢었고, 동시에 진입로 안에서부터 신장 6미터의 인간형 괴물들이 뛰어나왔다.
공명수 씨앗을 든 농부들이었다.
“이…….”
민구로선 이틀에 걸친 진입로 변화를 몰아 보는 셈.
현실 감각이 무너지려는 찰나, 농부들의 뒤로 더 이질적인 것들이 나타났다.
크릉…….
냄새도 이때만큼은 겁이 났는지 자세를 낮춘 채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뭐가 어떻게 돼 가는 거야?’
민구의 얼굴이 마구 일그러지다 종래엔 울 것 같은 표정이 됐다.
끼륵, 끼르륵.
새와 벌레 소리 사이의 어딘가에 있을 법한 기묘한 울음.
진입로를 ‘날아서’ 통과한 그것을 보고서 민구가 떠올린 건 뱀장어였다. 그것도 몸길이가 3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뱀장어. 심지어 날개도 없이 허공에 떠서 움직였다.
머리로 보이는 부위엔 돌기인지 촉수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잔뜩 돋아났고, 그 위에 녹색 눈동자 두 개가 박힌 게 보였다.
까맣지만 번들거리는 표피는 해양 생물의 그것을 딱 닮아 있었다.
끼르륵.
들으면 들을수록 소름 돋는 소리다.
놈들은 몸을 S자로 꿈틀대며 공기 속을 헤엄쳤고, 순식간에 상공을 까맣게 채웠다.
마치 물속에 시커먼 기름을 콸콸 부어 대는 장면 같다.
“아아…….”
결국 민구도 뒷걸음을 쳤다. 그러다 농부들마저 진입로에서부터 도망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쿵, 쿵, 쿵!
지축이 흔들릴 정도의 발소리. 하지만 왜인지 모를 다급함이 느껴졌다.
끼륵.
이윽고 뱀장어들이 짤막한 울음과 함께 사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먹잇감을 찾는 것이다.
“도망가요! 어서!”
민구가 세준을 정혜 쪽으로 밀쳐 내며 소리치자 다급해진 그녀가 앙칼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디로요? 어디로 가요, 민구 씨!”
그러자 민구의 얼굴에 난처한 빛이 짙게 서렸다.
사람이 아무리 빨리 달려 봐야 저 기괴한 생물보다 빠르겠는가.
“이, 일단 노량진 역으로 가십시오. 나도 곧 따라갈 테니.”
“네……?”
그 말에 정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망설일 여유는 없었다. 민구의 어깨 너머로 처참하게 무너지는 중인 농부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끼륵, 끼륵.
뱀장어들이 사방으로 달음질하던 농부들을 순식간에 따라잡더니 그들의 길쭉한 팔과 다리에 엉겨 붙었다. 그러곤 휘감는 힘만으로 신체 조직을 산산이 조각냈다.
콰직.
우우웅…….
팔다리가 박살 난 농부에게서부터 묵직한 진동이 방사됐다. 아마도 저것이 놈의 비명일 것이다.
“제길, 정도껏 해야지.”
민구는 비로소 이 세상에 찾아온 종말이란 것이 어떤 형태였는지 깨달았다.
뒤를 흘깃 보니 정혜와 세준, 성재까지 세 사람이 정신 나간 듯 달리는 게 보였다.
그래도 노량진 역사까지 닿으려면 한참 걸릴 것이다. 이쪽이 시간을 좀 벌어 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냄새야, 구원자란 게 굴을 부수는 거라면서. 혹시 저게 굴 아니냐?”
민구가 아파트 크기의 진입로를 가리키며 묻는다.
언젠가 구원자의 목적에 대해 물었을 때 냄새가 해 준 대답이 생각나서였다. ‘굴을. 부순다.’라고.
당시엔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이렇게 진입로를 코앞에서 보게 되니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이에 냄새가 수염을 늘어뜨리더니 낮게 울었다.
* 난. 못해.
“왜?”
민구가 이렇게 묻는 사이, 몇몇 뱀장어가 그와 냄새를 발견하고서 몸을 꿈틀댔다.
일부는 용케 저 멀리 도주 중인 혜정 일행 쪽을 바라봤는데, 이내 냄새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더 큰 정수에 호기심을 가진 거다.
* 대장은. 다섯. 나는…….
납작 접혔던 냄새의 귀가 쫑긋 선다.
뭔가를 계산 중인 듯. 하지만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알았다. 그건 나중에 듣자고.”
이미 십여 마리의 뱀장어가 곧장 냄새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민구가 먼저 이를 악물며 정수 실을 휘두르자 냄새도 사태를 파악하고서 눈을 번득였다.
“최대한 많이 죽여야 해. 그래도 절대 보호막을 벗진 마라.”
그러나 이 시간에도 진입로에선 놈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는 중이었다.
* * *
“헉, 헉……!”
벌써 숨을 쉴 때마다 단내가 나고 이마에선 땀이 비 오듯 했다.
그러다 마침내 발견한 노량진 역 지하 출입구.
정혜의 동공이 있는 힘껏 확장됐다.
“힘내요! 다 왔어요!”
세 사람은 더는 차가 다니지 않는 6차선 도로를 가로질렀다.
그러고 나서야 출입구 근처에 잔뜩 쌓인 사람 시체를 보게 됐다.
“억…….”
외과의 최성재가 기겁하며 주춤했지만 정혜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체들을 넘어 출입구 안으로 진입했다.
“빨리 와요! 거기서 죽을 거예요?”
정혜가 시뻘건 얼굴로 소리치자 그제야 성재의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준은 이미 이를 꽉 악물고서 시체 사이를 지나가는 중이었다.
‘호랑이도 함께 있으니까 민구 씨가 어떻게 될 리는 없어.’
정혜는 머릿속을 흐리는 뱀장어 떼의 모습을 애써 걷어 내며 최대한 깊은 곳으로 계속 움직였다.
“어, 어디까지 가십니까?”
그녀를 따르던 성재가 숨을 헐떡이며 뒤를 흘깃 돌아봤다.
이에 정혜는 개표구를 지나 승강장으로 이어지는 긴 복도를 밟으며 짧게 대답했다.
“몰라요. 최대한 안으로 가서 숨어야죠.”
진심이었다.
민구를 기다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혹시 모를 괴물들의 추격 먼저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계속 안으로 들어가는 중인 것이다. 목적지를 알고 가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노량진 역은 부대시설이 많지도 않고 승강장도 지상층에 개방되어 있다. 따라서 피신처로 삼을 만한 곳이 거의 없었다.
탓!
결국 정혜의 발이 복도를 다 지나기도 전에 멈췄고, 세준과 성재도 제자리에서 주변을 둘러봤다.
“갈 데가 없네요. 차라리 아저씨를 빨리 만날 수라도 있게 개표구 근처에 있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의외로 세준이 침착하게 대안을 내놨다.
반면 성재는 무슨 소리냐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아까 그 괴물들이 출구를 따라 내려오면 바로 개표구입니다. 그럼 우린 바로 죽어요. 여기도 관리실 같은 게 있을 거 아닙니까? 거기라도 찾아서 숨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
이 소릴 들은 정혜는 고민에 빠졌다. 아까 본 그 길쭉한 괴물이 역사 안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다.
길이가 3미터나 되는 놈들이다. 서너 마리만 들어와도 퇴로도 없이 붙잡힐 터.
“이, 일단.”
잠시 고민하던 정혜가 입을 떼는 찰나.
솨아아아아……!
난데없이 멀리서부터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언뜻 들으면 바람이 부는 것 같기도 했고, 바닷가의 파도 소리 같기도 했다.
그러다 이어서 들려온 아주 익숙한 소리.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쇠바퀴가 선로의 공백부 위를 지나갈 때 나는 특유의 소리였다.
노량진 역으로 열차가 들어오고 있는 거다.
“어!”
누가 말리기도 전에 성재가 복도를 가로질러 승강장과 연결된 계단으로 뛰어들었다.
“아주머니!”
세준은 아직 정혜 곁에 남아 있었지만 얼른 가 봐야 하지 않겠냐는 듯 그녀를 다급하게 불렀다.
“무조건 가서 잡아야죠. 열차가 여기 서진 않을 거예요!”
세준의 말엔 일리가 있었다. 저 열차가 어디서 오는 것이든 간에 여기 정차할 리가 없다. 노량진에 출현한 진입로는 열차 안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을 만큼 거대했으니까.
“가! 얼른 뛰어!”
정신이 번쩍 든 정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발을 뗐고, 세준도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정혜는 승강장을 향해 달리면서도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일이 전부 꿈은 아닌가 의심했다.
기괴한 일이 도저히 호흡을 맞출 수 없을 정도로 연달아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헉, 헉.”
이윽고 정혜도 승강장에 도착했다.
세준과 성재는 이미 선로 사이의 펜스를 넘어서 건너편 승강장으로 옮겨 가고 있었다. 열차가 맞은편 선로를 따라오는 중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감속 지점을 지났음에도 열차에서 브레이크 소리가 전혀 나질 않았다.
삐이!
건너편 승강장에 도착한 세준이 비상 정지등을 작동했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감속은커녕 속도를 더 올리는 듯했다.
“아.”
정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온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저 열차는 사람을 구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