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91
91화. 구원의 요람(1)
최대한 빨리 낙하.
용헌이 정우의 지시에 응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만 이해했다.
-이제부터 헬기가 매우 빠르게 낙하할 것이다. 뭐라도 잘 고정된 것을 붙들어야겠다.
다만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낙하하게 될 것인지를 따져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지상으로 사선을 그리며 고속 비행하지 않을까? 정도로 추측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지금 조종간을 붙잡고 있는 건 전문 조종사였으니까.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 상식적인 비행을 할 거라고 기대한 거다.
이들이 최악의 경우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엔진을 끄고 그대로 떨어지는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용헌이 선택한 방법은.
스윽.
“억?”
조종석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던 명일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조종간을 붙든 용헌의 어깨가 위쪽으로 솟아오르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때맞춰 천장 너머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났다.
기이이잉!
회전축에 저항을 받기 시작한 프로펠러가 내는 소리였다.
사태를 직감한 명일이 다른 일행에게 경고하려 했으나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기체가 지상을 향해 수직으로 기우는 중이었으니까.
“미쳤……!”
불완전한 두 음절 위로 무지막지한 풍절음이 밀려들었고, 곧 싸늘한 감각이 발끝부터 단전까지를 휘감으며 올라왔다.
고속 낙하.
후우우우욱!
뱃가죽이 수축하면서 윗입술이 절로 뒤집히고, 몸의 힘이 풀린 탓에 꽉 닫고 있던 턱이 벌어졌다.
오금이 저린다는 것이 뭔지 절절하게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그러고는.
“……!”
이내 매서운 충격이 기내를 강타했다.
콰아앙!
헬기에 몸을 실은 아홉 사람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으웁!”
외부에서부터 전해진 진동이 내장을 뒤흔드는 듯했지만 몸이 바깥으로 튕겨 나가거나 목이 부러지는 일은 전혀 벌어지지 않았다.
기내에 잔뜩 쌓아 놨던 짐들이 일순 들썩였을 뿐이다.
“으아아아아아!”
이윽고 반 박자 늦게 터져 나온 태휘의 비명.
그러나 이미 헬기의 움직임이 멎은 뒤였고, 이를 깨달은 태휘가 슬그머니 소리를 죽였다.
“아아아…… 아…….”
“킥.”
동훈이 도저히 참지 못하겠는지 이를 드러내며 낄낄댔다. 중성도 이때만큼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하고 안면 근육을 움찔했다.
“착륙했습니다.”
용헌이 날숨을 쭉 내뱉으며 착륙 보고를 해 왔다.
“예, 고생 많으셨습니다.”
정수 28만 개짜리 구원자, 박정우의 이마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헬기가 지상과 충돌하는 순간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애를 쓴 탓이다. 자신이 혼절해 버리면 그 즉시 기체를 감싸고 있던 보호막이 소멸해 버릴 터였으니까.
“이, 이런 게 되는군요…….”
선웅은 ‘낙하’가 정말 성공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 주변을 둘러봤다.
창밖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괴물들은 충돌의 여파로 멀리 튕겨 나가 있었다.
덕분에 사위가 아주 말끔했지만 이걸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결코 아니었다.
“왜 이리 어둡죠?”
명일이 눈을 껌뻑거리며 창밖을 바라봤다.
이에 선웅이 얼른 휴대폰을 꺼냈다.
“맙소사.”
예상대로 휴대폰이 작동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이쪽은 공명수가 뿜어낸 어둠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것도 헬기와 함께.
“또…… 군요.”
용헌이 씁쓸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봤다. 진입로에 잠식됐던 행운동이 떠올라서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계기판이 죽었습니다. 이대론 그냥 고철 덩어립니다.”
전자 장비를 무력화하는 공명수의 안개 때문에 헬기가 먹통이 된 것이다.
용헌이 아무리 재가동을 시도해도 기체는 꿈쩍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명일의 질문에 용헌이 사방에 깔린 안개를 응시했다.
저 정체불명의 물질은 접촉한 모든 것을 오염시킨다.
만약 정우가 안개 속에 헬기를 버려두고 진입로를 폐쇄한다면 그 즉시 이 안개와 함께 헬기도 증발할 거다.
‘아무리 정우 씨가 근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해도…….’
용헌은 전망을 비관했다.
이 무거운 헬기를 진입로 앞까지 끌고 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지만 보호막 유지와 괴물들과의 전투도 병행해야 하지 않은가? 사실상 불가능이었다.
그가 낙담한 표정을 짓고 있자 정우가 태연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발이 묶였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물론 썩 반가운 상황까진 아니지만 해법은 있습니다.”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선웅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선웅의 머리 위에 붙은 ‘대리자’라는 문구를.
“……?”
다들 긴가민가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눈썹을 꿈틀거렸다.
경황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 대리자의 주요 능력 중 하나, 정수 차용 말이다.
「정수 차용」 | 활성화.
대리자가 구원자에게 ‘차용 요청’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구원자가 요청을 승인하면 대리자는 일정 시간 동안 구원자의 정수를 대신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가 주변을 정리한 뒤 진입로를 닫으러 갈 테니 그동안 선웅 씨가 보호막을 유지하고 계세요.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정우는 이미 발치의 패스파인더를 보고 있었다.
패스파인더의 또 다른 기능인 진입로 추적은 최대 30개의 진입로를 가까운 순서대로 표시해 준다.
그러니 이곳의 진입로를 찾지 못해 헤매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선웅 씨도 보호막을 만드는 게 가능한 겁니까?”
동훈이 대리자의 능력에 의구심을 내비치자 선웅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 자신이 해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없었으니까.
그저 정우가 돌아올 때까지 보호막만 유지하고 있으면 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어마어마한 부담감과 공포가 몰려들었다.
타인의 목숨이 걸린 일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잠깐이라도 실수하면 저 안개가 모든 걸 먹어 치울 거란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 저는…….”
선웅이 머뭇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려 하자 정우가 먼저 선수를 쳤다.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미 정수를 활성화한 적이 있으시잖아요.”
행운동에서 비둘기 떼와 조우했을 때를 이야기하는 거다.
하지만 그때도 활성화만 됐을 뿐 선웅이 주체적으로 정수를 다루진 못했다.
“으음.”
선웅이 자신 없는 모습으로 짧게 침음한다.
회사에 다닐 때만 해도 사업부 팀장답게 리더십이 있던 그였지만 지금은 그저 방주에 올라탄 ‘인물1’에 불과했다.
“할 수 있어요. 그리고 해야만 합니다.”
정우가 쐐기를 박듯 또렷한 발음으로 강조했다.
“8만 개를 청구하세요. 이 정도면 아까 그놈들이 몰려와도 얼마간은 버틸 수 있을 겁니다.”
낙하 전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정우가 구체적인 숫자를 제시했다.
차용 시간은 60분. 여러 변수를 고려해 넉넉하게 잡았다.
그가 이렇게까지 선웅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헬기보다도 성역 때문이었다.
아마 당장 오늘 성역을 지정하게 될 텐데, 이 작은 공간조차 지키지 못하는 대리자에게 성역을 맡길 수 있겠는가? 이건 최소한의 자격 시험이나 마찬가지였다.
‘살인귀가 되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아. 하지만 정수만큼은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정우가 날카로운 눈을 하고 있자 선웅이 마지못해 정수를 청구했다.
팟.
「귀하의 대리자가 80,000개의 정수를 60분간 차용하길 요청했습니다.」
정우에게 이런 알림 문구가 나타났고, 그가 승인하니 대리자가 보고 있던 것과 동일한 서식이 시야에 추가됐다.
[80,000/281,260] [60:00]정우의 정수 총량에 변화가 생긴 것도 이때였다.
201,260.
대리자에게 빌려준 8만 개가 통째로 빠져 버린 것이다.
‘총량 자체가 줄어 버리네. 이러면 대리자가 죽을 경우 어떻게 되는 거지?’
정우가 의문을 가지기 무섭게 평가관이 기척을 드러냈다.
-반환 전에 유출된 정수는 회수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대리자가 정수 차용 상태에서 죽으면 그 자리에 정수가 떨어진다는 소리다.
‘빌려준 정수가 아예 대리자 쪽으로 넘어가는 방식이구나.’
그래도 예상 범위 내에 있던 리스크다. 선두 특혜랍시고 자살 투표를 하게 만드는 세계이지 않은가. 이 정도 위험부담은 평범한 축에 속했다.
“이제 보호막을 전개하셔야 합니다. 타이머가 돌아가기 시작했으니 저도 서둘러 움직여야죠.”
정우의 말에 선웅이 시야에 떠오른 인터페이스로 눈을 돌렸다.
[80,000/281,260] [58:49]“아.”
그새 1분이 지났고, 선웅의 정수 총량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을 합해 80,051개로 늘어난 상태였다.
‘잠깐…… 빌려온 정수만 쓸 수 있는 게 아니었잖아?’
아주 중요한 포인트를 감지했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으나 정우가 보호막 밀도를 갑자기 낮추는 바람에 주의가 그리로 돌아갔다.
파앗.
돔형 보호막의 색깔에 눈에 띄게 옅어졌고, 이에 맞춰 어둠이 정수를 갉아대는 소리가 더 거세게 났다.
사그극, 사각……!
“남을 지킨다는 생각 말고 선웅 씨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보호막을 전개하십시오.”
“예, 옙!”
이미 선웅은 본인의 생존을 충분히 걱정하고 있었다. 이 일을 해내지 못하면 헬기는 고사하고 자신부터가 살아나갈 수 없음을 잘 알았으니까.
스아앗.
마침내 선웅의 동공이 정우처럼 시퍼렇게 빛나기 시작했다.
“헉.”
“워…….”
이를 지켜보던 나머지 일행은 제각기 다른 심정으로 새로운 마인의 탄생을 주시했다.
반면 본격적으로 정수를 태우기 시작한 선웅은 사색이 되어 담당 구원자를 바라봤다.
“수, 숨이 찹니다.”
실제로 그는 숨이 가빠서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직전까지 겨우 51개의 정수를 품고 있던 사람이 아닌가.
게다가 정수 8만 개는 정우가 대성의 특수전단 2팀을 궤멸하고 나서야 달성한 경지였다.
“으욱, 으어억!”
마치 불을 삼킨 듯 선웅이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통스러워했다.
“이러다 큰일 나는 거 아닙니까? 무슨 조치라도 취해야……!”
태휘가 동훈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매달렸지만 이 냉혈의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구원자의 힘을 쉽게 얻어낼 수 없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요. 그리고 저러한 병증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동훈이 이렇게 말하는 사이 선웅의 입에서 푸른 입김이 새어 나왔다.
“맙소사.”
명일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고, 성호와 선희도 문가에 딱 붙어서 몸을 벌벌 떨었다.
“크아악, 크학!”
이제 선웅은 거의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면서도 몸의 윤곽선을 따라 짙푸른 보호막을 생성했다 지우길 반복했다.
‘대량의 정수에 몸이 적응해 가고 있구나.’
정우로선 이렇게 추측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라고 해서 사람을 살리는 재주가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후읍!”
가련한 대리자가 또 한 번 푸른 입김을 뿜는다.
“…….”
용헌은 정수에 담긴 모종의 악기가 사람을 괴롭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도 했다. 비록 조선웅이 대리자로 지정되긴 했지만 저 지독한 악기를 받아 내기엔 너무 연약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흐아악!”
쿠웅!
선웅이 몸서리를 치며 기내 한쪽에 머리를 박았으나 이미 두꺼운 보호막이 그를 감싸고 있어서 외상은 전혀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흐으읍.”
선웅의 입에서 비교적 정돈된 호흡이 뿜어져 나왔다. 더는 입김이 색깔을 띠지도 않았고 말이다.
눈에선 정우와 마찬가지로 시퍼런 안광이 흘러넘쳤다.
“이제 좀 괜찮습니까?”
정우가 이렇게 묻자 선웅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스윽.
머리의 움직임을 따라 허공에 실선을 그리는 안광.
비로소 다들 직감했다.
이 방주에 부선장이 새로 부임했음을.